4. 절대적인 믿음

마 8:5-13

 

2001년 6월 30일(토)

대전 육군교육사령부 창조대 교회(김영철 목사) 기독장교 조찬기도회 설교

 

 

주님 안에서 여러분에게 평강을 기원합니다. 부족한 사람이 오늘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게 됨을 큰 기쁨과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아마 이 본문은 여러분께서 자주 들어보신 본문이라 생각합니다. 구약성서와 달리 군대에 관한 이야기가 별로 없는 신약성서에서 이 본문은 많은 군인들이 애호하는 본문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백부장, 오늘날의 군대 편제로 보면, 소대장 정도가 되는 한 군인이 예수님에게 달려와, 하인(부하일까요?)의 중풍병을 고쳐 달라고 애원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친히 그의 집에 가셔서 환자를 고쳐주겠다고 하였는데도, 그는 굳이 그러실 필요가 없다고 하면서, 그 자리에서 그냥 고쳐달라고 합니다.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감당치 못하겠사오니"(15:8)하고 말하는 모습을 보면, 그는 굉장히 겸손한 사람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바로 바로 뒤에 나오는 구절을 보면, 그게 아니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백부장은 그냥 명령 한 마디만 해 달라고 애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백부장은 군대 조직의 속성을 비유로 들고 있습니다. 군인이 명령 하나로 움직이듯이, 예수님도 명령 하나로 신하의 병을 고쳐 주시라는 것입니다.

혹시 군인의 관행에 익숙한 그가 무심코 이런 말을 한 걸까요? 군대 안에서만 통용되어야 할 법칙을 사회에 적용하려는 이 모습은 종종 비난의 대상이 됩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 주변에서는 "군사 문화" 혹은 "군대 문화" 운운하면서, 그 폐해를 지적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군인은 명령에 죽고 삽니다. 그래서 군인은 단순하게 보이고, 때로는 - 이런 말을 사용하는 것을 용서하십시오 - 무식하게 보이기까지 합니다. 앞뒤를 안 가리고 죽기살기로 일을 처리한다든지, 꼭두각시처럼 자신의 양심과 판단은 뒤로 한 채 무조건 명령에 따라서만 움직인다든지 하는 것을 사람들은 잘못된 "군사 문화"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만약 군대가 명령에 따라 움직이지 않는다면, 더 이상 군대가 아닙니다. 각자의 판단대로 알아서 행동하는 집단은 특히 전쟁과 같은 위기에서는 대단히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러므로 군대는 오직 명령 그 자체에 모든 것을 걸게 됩니다.

그런데 군인은 왜 무조건 명령에 따르는 것입니까? 단순히 상관의 지시라는 그 하나만으로 따르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정말 군인은 얼빠진 꼭두가시가 됩니다. 상벌을 고려하여 명령에 따르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군인은 아직 유치한 어린이의 수준에 머물러 있는 셈입니다. 명령의 가치와 효율을 믿기 때문에 명령을 따르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이런 일은 합리적이고 계산적일 수는 있어도 군대의 속성과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비겁하여 도망가는 자들도 있고, 계산적으로 명령을 회피하는 자들도 있으며, 심지어는 명령의 정당성을 거부하는 자들도 가끔은 생깁니다.

그러나 진정한 군인이라면, 그는 상관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복종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단지 명령이 군대 속성상 절대적인 것이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명령을 따르는 것은 명령하는 자를 절대적으로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상관이 부하보다 더 많은 정보와 경험, 책임과 위엄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부하는 상관의 명령에 내적으로 동의하며 따릅니다. 이것을 우리는 편의상 "진정한 권위에 의존하는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이 본문에서 나오는 군인 백부장은 바로 이런 "진정한 권위에 의존하는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에게 저돌적으로 요구합니다. "그저 말씀한 하옵소서". 사람들은 이런 믿음을 "맹목적 믿음", "무식한 믿음"이라고 비난할 지는 몰라도, 예수님은 그의 믿음을 극찬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중에서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다"고 감탄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극찬하신 경우는 매우 예외적입니다. 그래서 백부장의 절대적인 믿음을 보신 예수님은 바로 그 자리에서 그의 하인의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군인으로 오시지 않았습니다. 그는 무력주의자가 아니라 평화주의자였습니다. 예수님은 칼을 휘두른 베드로에게 "칼을 들고 일어선 자는 칼로 망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무장한 군인처럼 행동하시지 않았으며, 무력을 빌려 이 세상을 통치하길 원치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물리적인 힘이 궁극적으로 인간을 지켜주거나 구원한다고 믿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 사랑과 그에 근거한 이웃 사랑만이 인간을 진정으로 행복하게 해 준다고 믿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섬김을 받는 것보다 섬기는 것을 더 위대하게 평가하셨습니다. 아니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라, 원수가 굶주리면 먹여주고, 그의 복을 빌어주라"고 하셨습니다. 원수를 진멸할 능력을 지니신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고 행동하셨다면, 그분은 분명히 언제나 "햇볕 정책"을 선호하신 셈입니다.

군대는 오직 악을 제어하고 생명과 평화를 지키기 위한 마지막 수단으로서만 정당화되는 것이지, 모든 생활의 방식까지 군대적인 것으로 만드는 행위는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반인류적이고 반민주적입니다. 하지만 군인이 자기의 모든 목숨을 걸고 상관의 지시를 따르는 행위는 마치 그리스도인들이 모든 것을 걸고 하나님을 믿는 행위와 마찬가지로 참으로 숭고한 것입니다. 물론 자잘한 일에서 우리는 의심할 수도 있습니다. 신앙의 내용과 형태에 관해서 우리는 죽기까지 의심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의심은 믿음의 적이 아닙니다. 이런 의심은 죽기까지 신앙을 따라다니며, 신앙을 시험하고 단련합니다.

하지만 절대자에 대한 신뢰는 궁극적인 것이어서, 여기에는 의심의 틈이 벌어질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런 저런 사람을 믿을 수도 있고 안 믿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저런 대상을 좋아할 수도, 싫어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궁극적인 존재를 회피할 수는 없습니다. 절대적인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도 돈이나 권세, 출세와 향락 등을 절대적으로 신봉합니다. 그러므로 신앙에서 중립 지역(DMZ), 공동경비구역(JSA)가 있을 수 없습니다. "신앙이냐 불신앙이냐?"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할 도리 밖에는 없습니다. 아니, 이 말은 잘못입니다. "진정한 하나님을 신앙하느냐? 거짓 신, 우상을 섬기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이 세상에 아무 신도 섬기지 않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누구나 그 어떤 대상을 절대적으로, 궁극적으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궁극적이고 절대자에 대한 우리의 경외와 신뢰는 절대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 절대적인 믿음은 군인 정신과 똑같은 것은 아닐지라도 매우 유사합니다. 그래서 백부장은 군대에서 터득한 이 절대적 믿음으로부터 출발하여, 예수님에 대한 믿음으로 점프, 도약하였습니다. 바로 이 믿음을 예수님은 기뻐하셨습니다.

제가 예수님을 절대적으로 믿는 것도 바로 백부장의 절대적인 믿음을 받아들이고 칭찬하신 예수님의 권위와 인격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병자를 고치시고 죄인을 용서하시는 예수님을 진정한 주님으로 믿든지 아니면 희대의 사기꾼으로 믿든지는 할 수 있어도, 어정쩡하게 훌륭한 성인, 훌륭한 선생으로 믿을 수는 없습니다. 혹시 성인과 선생이 병자를 고칠 수 있을 지는 몰라도, 죄인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혹시 성인과 선생이 죄인을 용서한다고 선언할 수 있을 지는 몰라도, 온 인류의 죄를 대신 질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예수님을 성인과 선생 이상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믿습니다. 이 본문을 통해서도 우리는 그분을 절대적으로 신뢰할 만한 근거를 발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백부장처럼 어떤 상황에서도,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에서도, 예수님의 권위와 인격에 절대적인 믿음을 던져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저보다 주님을 더 가까이, 더 굳건히 믿을 수 있는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지닌 군인 정신은 그 누구보다도 하나님과 그분이 보내신 예수님을 절대적으로 믿을 수 있는 동기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복된 분입니다. 여러분도 본문의 백부장처럼 절대적인 믿음의 용사가 되실 뿐만 아니라, 부하를 내 몸처럼 아끼고 사랑하는 훌륭한 믿음의 지휘관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