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그리스도인의 생활 방식(1)

 빌 3:12-14

 

2003년 1월 12일, 현풍제일교회

 

 

지난 주일에는 신년 첫 주일을 맞이하는 뜻깊은 자리에서 "새롭게 출발하는 교회"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 제목은 또한 올해 우리 교회의 표어이기도 합니다. 오늘은 또한 여러분의 교회에 정식 담임 목사로 취임하는 날이므로 저는 남달리 새로운 마음을 갖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래저래 우리는 이제 새롭게 출발하는 자리에 서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어떤 환경에서나 늘 새롭게 출발하는 마음가짐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인생은 나그네의 길이라고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인생을 항해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나그네는 한 곳에 오래 머물지 않습니다. 항해하는 배는 목적지에 도달할 때까지 쉬는 법이 없습니다. 나그네가 어떤 자리에 오래 머문다면, 아마 그 때는 병들거나 죽을 때일 것입니다. 배가 도중에 멈추면 파도에 떠밀려가다 바위에 좌초하고 맙니다.

인생만이 아니라 신앙 생활도 곧 기나긴 여정입니다. 그러므로 늘 새롭게 출발해야 하고, 늘 회개해야 합니다. 늘 앞으로 가야합니다. 이처럼 목표를 향하여 가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달리는 경주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이 경주는 단거리 경주가 아니라 장거리 경주, 마라톤과 같이 길고 힘든 경주입니다. 앞을 향해 달려가는 경주자와 같은 그리스도인의 생활 방식은 어떠해야 할까요? 이 본문의 내용을 매 주일마다, 세 번 나누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경주자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목표입니다. 모든 달리기 경주에는 마지막 목표 지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경주자는 항상 자기가 달려야 할 마지막 목표 지점을 분명히 알고 있고, 거기로 달려가야 합니다. 아무리 잘 달리는 경주자라고 하더라도, 아무리 빨리 달리는 경주자라고 하더라도, 만약 그가 도달해야 할 목표 지점을 알지 못하거나 잊어버린다면, 혹은 다른 곳으로 달려간다면, 그는 상을 받기는커녕 사람의 조롱을 받기 십상입니다. 그러므로 남보다 빨리 달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목표 지점을 향해 정확히 달려가는 것입니다.

제가 서울 마포에서 살 때에 주말마다 온 가족과 더불어 자주 등산하기를 좋아했습니다. 하루는 서울에서 제일 높은 북한산을 등반하였는데, 큰아들이 여느 날처럼 앞장서게 되었습니다. 저의 큰아들은 체력이 좋아서 산을 아주 잘 탑니다. 그런데 어느 정도 가고 나니까 그 아들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조금 불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북한산 꼭대기에 올라가는 동안 자주 샛길이 나오기 때문이며, 길을 잘못 들어서면 전혀 엉뚱한 곳으로 가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려오는 사람들에게 아들의 모습을 설명하면서, 혹시 아들을 보았는지를 물어보았습니다. 보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아뿔싸, 이 애가 다른 길로 빠졌구나. 그래서 저는 올라가는 길을 되돌아 내려와서 다른 샛길로 올라가서 아들의 이름을 크게 불렀습니다. 그러자 그 아들이 영문도 모른 듯이 내려왔습니다. 그 때에 저는 깨달았습니다. 인생의 길에서도 빨리 가는 사람이 먼저 가는 사람이 아니다. 천천히 가더라도 올바른 길을 가야 한다고 말입니다. 여러분, 인생에서 아무리 남부럽게, 떵떵거리면서 사는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가 인생의 목적지를 모르고 산다면, 그 잘 산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어떤 학교의 체육 선생님이 학생들을 운동장에 다 모아놓고, 땅에 그어진 둥근 원을 따라 달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몇 바퀴를 돌 것인지, 왜 돌아야 하는지, 어디에서 멈추어야 할 지는 전혀 말하지 않고, 그냥 무조건 달리라고만 합니다. 한참을 달리던 학생들이 묻습니다. 왜, 어디까지 달려야 합니까? 그러자 선생님은 말했습니다. 그 걸 내가 어떻게 알아? 죽을 때까지 달려! 이 말은 제가 지어낸 이야기입니다만, 만약 실제로 그렇게 시키는 사람이나 그렇게 달리는 사람이 있다면, 모두가 비웃을 겁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 인간들은 대개 그렇게 살고 있지 않습니까? 고등학교의 교과서에 어떤 시가 실렸는데, 그 내용에는 이런 글이 있었습니다. "왜 사느냐고 묻는다면, 웃지요." 왜 웃는단 말입니까? "왜 사는지를 어떻게 아느냐? 어차피 알지 못하는 것을 왜 묻느냐?" 그런 뜻이죠. 사실 대개의 사람들은 왜 사는지 모르고 살아갑니다. 물론 사람들은 죽음이 곧 인생의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죽으려고 태어나고, 죽으려고 산다는 말입니까? 죽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라면, 아예 태어나지 않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요? 아니 빨리 죽는 게 더 낫지 않을까요?

알렉산더 대왕의 소년 시절에 그의 가정 교사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왕자님께서 임금이 되시면, 무슨 일을 하시겠습니까? 그리스를 통일하겠습니다. 그 후에는 무슨 일을 하겠습니까? 소아시아를 정복하겠습니다. 그 후에는? 팔레스틴과 이집트를 정복하겠습니다. 그 다음에는? 페르시아와 인도까지 손에 넣겠습니다. 인도 점령이 끝나면, 무슨 일을 하겠습니까? 그 때쯤이면, 저도 죽겠죠. 아리스토텔레스는 왕자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신중하게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멀리 돌아다니다 죽으나, 지금 죽어버리나 별로 큰 차이가 없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죽기까지 복음을 전하며 살았지만, 죽기 위해 살지는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분명히 목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부름의 상이었습니다. 경주가 있다면 분명히 목표도 있고, 목표가 있다면 분명히 상이 있다고 바울은 믿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말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성도 여러분, 목표도 없고 상도 없는 경기를 하는 경주자가 있겠습니까? 그런 경주자는 절대 없습니다. 만약 있다고 한다면, 그는 분명히 미친 사람일 겁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에게 미치기는 했지만, 목적이 없는 그런 미친 삶을 살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매일매일 구원의 목표, 완전한 구원을 향해, 부름의 상을 향해 중단없이, 힘써 달려갔습니다.

예수님은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눅 9:23)고 말씀하셨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12:1-2)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경주 목표는 예수님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닮은 것이야말로 신앙인의 최대의 목표요, 목적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구하라"(마 6:33)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죽을 때까지 붙들 말씀이 있다면, 바로 이 말씀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장차 제가 죽기 직전에 "당신은 지금까지 무슨 말씀을 붙들고 살아왔습니까? 당신이 가장 좋아하고 가장 의지하는 말씀이 무엇입니까?"라고 묻는다면, 바로 이 말씀으로 대답할 것입니다.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공의를 구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것도 결국에는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자만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 그곳에서 누릴 영광과 그곳에서 받을 상급이야말로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의 목표입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영광과 상급과는 감히 비교할 수 없는 이 놀라운 이 영광과 상급은 험한 인생 길을 가는 우리에게 가장 큰 힘과 소망이 됩니다. 일제시대 때에 주기철 목사님은 온갖 고문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항복하지 않고 신사참배를 거절하며 신앙을 지켰습니다. 그러니까 일본경찰이 물었습니다. 왜 그렇게 죽으려고 하느냐? 그 때에 주기철 목사님은 짤막하게 대답하였습니다. 나에게는 하나님의 나라가 있기 때문이다. 그 순간에 일본 사람도 숙연해졌다고 합니다.

또 한 가지의 예화를 들겠습니다. 성결교회가 낳은 위대한 부흥사 이성봉 목사님은 6. 25  동란 중에 공산당원에게 붙잡혀 죽을 뻔하다가 살아났는데, 그 때에 있었던 이야기는 우리를 매우 감동적입니다. 목포에서 복음을 전하던 이성봉 목사님은 8월 2일 수요일 기도회를 마치고 난 후에 북한 보안서원들에게 끌려갔습니다. 며칠 전에 유엔 비행기 열두 대가 목포에 와서 쌀창고를 폭격하였는데, 어느 여학생이 모함하기를, 이성봉 목사님이 비행기가 오라고 신호를 보냈다는 것이었습니다. 보안서원은 "다른 목사들은 피난을 갔는데 너는 왜 가지 않고 이 구석에 와서 그런 일만 하고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대답하기를 "나는 예수를 믿고 전도하는 사람이지, 그런 일은 안 하는 사람이오" 하니, "이놈아! 너희가 예수를 믿었느냐, 이승만을 믿었지. 목사놈들, 다 때려 죽여라. 이 나라를 좀먹는 목사 놈들이라"고 하면서 달려들었습니다. 젊은 사람 10여명이 이성봉 목사님을 잡아끌고 뒷산으로 가서 굵은 몽둥이로 마구 때렸습니다. 이성봉 목사님은 "나는 이제야 순교할 때가 되었구나" 생각하고, 스데반의 돌무더기를 연상하면서 "너희들이 나를 죽일지라도 나는 천국에 가니, 아무쪼록 너희들은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라고 소리를 친 후에 "아버지여! 저희들이 알지 못하여, 그러하오니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아무리 때려도 조금도 아프지 않더랍니다. 그래서 맞으면서도 계속 기도만 하고 있었는데, "이 놈의 새끼가 얼마나 뚱뚱한지, 아픈 줄을 모른다"고 하면서, 이마를 치니 몽둥이에 코피가 쏟아졌습니다. 이성봉 목사님은 "주님은 나를 위하여 물과 피를 쏟아 주셨는데, 코피라도 쏟게 됨을 감사합니다"라고 말하고, 그만 기절하여 쓰러졌습니다. 치안서장이 소리를 질러, "그 자식을 아주 죽이지 말라. 좀 더 고생을 시켜 죽이는 것이 좋다. 끌어다가 유치장에 집어넣어라"고 하였습니다. 찬물을 머리에 끼얹어 정신을 회복시켜, 불과 3평 이내의 감방에 사십여 명을 수용한 곳에 들여보내니, 숨이 막혀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오줌통이 놓인 자리가 조금 비어 있어서, 그곳에 엎드려 신음을 하니 매맞은 자리에 이제 본격적으로 고통이 왔습니다. 그래도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옥중에 갇혔을 때에 찬송과 기도로 옥문이 열린 것이 생각나서, 허사가를 멋지게 불렀답니다. 처음에는 아주 듣기가 좋은 모양인지 조용하더니 "홍안 소년 미인들아, 자랑치 말고, 영웅 호걸 열사들아, 뽐내지 말라, 유수같은 세월은 널 재촉하고, 저 적막한 공동 묘지는 널 기다린다"고 하니, 그만 보안서원들이 "저 자식, 죽은 줄 알았더니 또 다시 살아났다"고 소리를 벼락같이 질렀습니다. 그러나 삼일만에 빨치산 삼십여 명이 반역자로 지목한 사람들을 총살하고는, 그곳에 와서 죽일 사람이 없느냐고 하니, 보안서장이 말하기를 "목포에서 쌀창고 폭격 주동자를 잡아왔는데, 그 자식이 목사요, 죽여도 때려도 기도와 찬송만 하고 있으니, 저 놈을 어찌하면 좋으냐"고 했습니다. "아, 그거 왜 여태껏 두었는가? 속히 처치해 버리지" 하더니, "목사 새끼, 나오너라" 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빨치산 대장이 묻기를 "목사 노릇 몇 해나 해먹었는가?" "예, 한 25년 했습니다." "아이구, 무던히 착취해 먹었구나. 그래서 그렇게 뚱뚱보가 되었구나." "아니오, 착취해 먹어서 그런 게 아니오. 나는 아이 때에 별명이 깔따귀요. 여러 가지 병투성이였소. 그러나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은혜로 신유의 능력을 얻어 25년간 의약을 모르고 이렇게 건강하게 지금까지 지내온 것입니다."하니, "예수는 무엇 하러 믿는 것이오?" "예수요? 예수는 자아를 혁명하는 것이오. 당신은 사회 혁명하느라고 수고하지만, 예수는 자아를 먼저 혁명하는 것이오. 물줄기가 길게 흘러가려면 물 근원을 파야 하고, 나무가 좋은 나무가 되려면 그 뿌리를 잘 가꾸어야 하는 것이오. 이 나라, 우리 민족이 참으로 축복을 받으려면, 우나 좌나 정치적으로보다도 먼저 이 민족의 양심을 바로잡아야 합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대장은 "그래, 양심을 얼마나 바로잡았소?"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내 마음은 바로 잡힌 것이 확실하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래 예수쟁이들은 밤낮 천당, 천당하며 현실을 부인하고 천당만 가겠다고 하니, 천당을 가보았소?" 묻기에, "보구 말구요." "어디서 보았소?" 나는 "천당 본점은 못 보았어도 천당 지점은 보았지요. 본점 없는 지점이야 어디 있소? 은행 지점을 보면, 으레 은행 본점이 있는 것을 알 수 있고, 경찰서 지서를 보면, 으레 경찰서 본서가 있는 것을 알 것 아니오? 나는 아직 육안으로 천당 본점은 못 보았어도, 천당 지점은 내 마음에 성취된 것이오. 하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오. 성신을 힘입은 의와 평강과 기쁨이랍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렇게 악형을 하고 죽인다고 하는데도 내 마음은 지극히 평화스럽소" 하였습니다. 보안서원들과 빨치산들이 살기가 등등하여 잡아먹을 것 같더니, 웃음보를 터뜨리며 "아하, 천당 지점! 이거 처음 듣는 말이로구나. 예수쟁이들이 말을 잘 한다더니, 참 잘하는구나" 하더니, 빨치산 대장이 "목사님, 이 전쟁을 어떻게 봅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이 전쟁요? 과거에 이스라엘과 유대가 범죄할 때에 앗수르와 바벨론의 방망이로 징계하였고, 우리 조선 이조가 500년 범죄할 때에 일본 방망이로 36년간 얻어맞았소. 이제 하나님의 축복으로 피 한방울 흘림 없이 그 무서운 일제의 사슬에서 행방을 주었어요. 그러나 이 민족이 감사할 줄을 모르고 더욱 죄악을 범하니, 이제는 공산 방망이로 이 민족을 내려치는 것이오. 그러나 인민정치가 이 나라에 와서 또 다시 애매한 사람들을 악형하고 교회를 핍박하면, 하나님께서 좋아하시지 않을 것입니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런데 요행히 빨치산 대장이 예수를 믿던 사람이더랍니다. 그 당시에 광주 의과대학에 다니던 학생인데, 이성봉 목사님을 알았던지, 꼭 목사님이라고 하면서 동정을 많이 하더랍니다. 다른 자들은 "이 자식, 저 자식"하면서 험하게 구는데, 그 사람은 "목사님, 어디 악형을 당하셨습니까?" 하였습니다. "보구료, 온갖 매질을 당했소" 하니, "어디 봅시다." 하고 벌거벗겨 보니 온 몸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성한 곳이 없었습니다. 대장은 깜짝 놀라며 보안서원들을 책망하였습니다. "여보, 이거 뭐요? 우리 인민 정치에는 이런 법이 없소. 죽일 사람은 즉살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가두어 두고 감화를 시키든지 하는 거요. 당신들 까닭에 우리 인민 정치가 오해를 받는 거요. 동무들, 우리가 오해하였소. 이 목사님은 참말로 예수만 아는 목사님이지, 다른 것은 모르는 목사님이오. 왜 우리 인민 정치에도 종교는 자유라고 하지 않았소. 예수야 좋은 양반이지요. 예수의 탈을 쓰고 다른 짓들을 하니까 그렇지요. 동무들, 사과합시다" 하더니, 보안서원들을 데리고 와서 백 배로 사과를 하고 풀어주었다고 합니다.

설명이 좀 길어졌습니다만, 주기철 목사님과 이성봉 목사님은 죽음을 각오하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믿고 소망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나라의 소망은 죽을 때까지 우리를 모든 환경을 이길 수 있게 합니다.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이 땅에서 살아갈 의미와 기쁨을 줍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바라보고 산다고 해서, 이 땅의 삶은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염세주의자처럼 살아서는 안 됩니다. 이 땅에서 열심히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고 찾은 사람만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아니 지난 번 수요일 예배 때에 말씀을 드린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안으로 들어옵니다. 우리에게 임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밭에 뿌려진 씨와 같이 이 땅에 심겨졌으며, 겨자씨와 누룩과 같이 이 세상 속에 들어와 이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는 이 땅에서 우리는 벌써 하나님 나라를 맛보기 시작합니다. 아니 그 나라가 날로 커져 가는 것을 볼 수 있으며, 또 우리는 그 나라의 확장을 위해 일할 수 있습니다. 이 땅에서 우리는 비록 부분적이지만 그 나라의 맛을 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이미 우리는 살아갈 의미를 갖게 됩니다. 살아갈 가치와 보람을 누리게 됩니다.

지금은 소련 연방이 무너졌지만, 그 옛날 소련은 죄수를 추위가 혹심한 시베리아 지역으로 유형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추운 지역이라도 음식과 노동이 적당히 구비되면, 그럭저럭 살수는 있습니다. 물론 노동과 추위, 배고픔이 죄수들에게 가장 참기 어려운 고통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그런 것들이라기보다 무의미한 생활이었습니다. 어느 날 그들은 무거운 물건을 한 장소에 옮겨놓으라는 지시를 받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날이 되면, 그 물건들을 다시 원래의 자리에 옮겨놓으라는 지시를 받습니다. 그리고 또 그 다음 날이 되면, 다시 그 물건을 처음 옮겨놓은 자리로 다시 옮겨놓으라는 지시를 받습니다. 아무런 목적도, 이유도 없이 그저 동일한 일을 반복해서 하라고 시킵니다. 그러면 죄수들은 미칠 듯이 괴로워합니다. 무의미한 노동은 결국 죄수들의 정신을 무력하게 하고, 그래서 빨리 병들고 죽게 만듭니다.   

그와 달리 비록 포로의 신분이라고 하더라고, 신나는 노동을 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유명한 영화 "콰이강의 다리"의 실제적인 배경이 되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제2차 세계대전 말엽에 일본 군인에게 포로로 잡혀 태국 국경 수용소에 갇힌 영국 병사들이었습니다. 제가 작년에 태국에 갔을 때에 그곳의 기념관을 둘러보았는데, 그들의 생활상이 정말 비참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그들은 태국과 미얀마(버마)를 가로지르는 콰이강 위에 기차가 다니는 다리를 건설하는 작업에 투입되었습니다. 그런데 영화를 통해 보았지만, 그들은 일본의 침략을 돕는 다리를 정말 신나게 만들었습니다. 다리를 만드는 보람도 물론 컸겠지만, 그들에게는 분명한 목표가 있었습니다. 멋진 다리를 만들어, 멋지게 부수겠다는 목표였습니다. 정말 그들은 일본군의 군수 열차가 건너가는 동안 힘들여 만든 다리를 멋지게 폭파했습니다.

이처럼 목표가 있는 생활은 힘과 보람이 있습니다. 소망과 기쁨이 있습니다. 살맛이 납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까지 여러분은 어떤 목표를 정해놓고 살았습니까? 올해의 목표가 무엇입니까? 기왕이면 가장 원대한 목표, 가장 웅장한 목표를 세우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선포하시고 실현하셨으며, 수많은 성도들이 죽기까지 소망하면서 확장했던 하나님의 나라, 이것이야말로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놀라운 인생의 목표와 소망이요, 기쁨과 보람이요, 의무와 권리입니다. 험한 세상 길을 가시는 여러분, 여러분이 도달하고 이루어야 할 이 목표를 항상 놓치지 마십시오. 아니 이 목표를 분명히 붙들고, 항상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어느 환경에서도 실망하거나 실패하지 않을 것이며, 그 나라가 임할 때에 여러분은 큰 영광과 상급을 누릴 것입니다. 그 날에 여기에 계신 성도들 중에 한 분도 탈락하는 일이 없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천국에 이르면, 세 가지 사실에 놀란다는 말이 있습니다. 꼭 올 거라고 생각한 사람이 오지 않은 사실, 꼭 올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한 사람이 온 사실, 그리고 저와 같은 사람도 천국에 올 수 있었다는 사실에 놀란답니다. 여러분, 끝까지 믿음의 경주를 다 달려, 끝까지 선한 싸움을 다 싸워, 하나님 나라의 위대한 영광에 다 참여하시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