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그리스도인의 생활 방식(3)

 

빌 3:12-14

2003년 1월 26일, 현풍제일교회

 

  

지난 주일에 저는 "그리스도에게 붙잡힌 사람이 되자"는 취지의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은 그리스도인의 생활 방식에 관한 마지막 설교 말씀으로서 "지나간 것을 잊어버리고, 오직 앞만을 바라보고 살자"는 취지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내 뒤에 있는 것을 잊고 앞에 있는 것만 바라보면서 목표를 향하여 달려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도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라"고 권하고 있습니다(히 12:1).

세월은 앞으로만 흐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월을 거슬러가면서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뒤를 돌아보는 것은 기억이라고 하는 두뇌의 작용 때문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지나간 모든 일을 다 기억하지 못합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람들이 경험한 사실의 정확성은 점점 떨어진다고 합니다. 사건 직후에도 사실 자체를 기억할 수 있는 범위는 10% 혹은 15% 밖에 안되고, 1년이 지난 기억의 50%는 착각을 일으킨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과거의 기억을 너무 신뢰해서는 안 되며, 더욱이 과거의 기억에 너무 사로잡혀 살아가서도 안 됩니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지나간 모든 일을 다 기억한다면, 과거에 사로잡혀서 꼼짝달싹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과거의 죄와 허물, 실수와 같이 쓰라린 추억 때문에 괴로워하다가는 전혀 새로운 일을 계획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가 지난 일을 대부분 잊을 수 있도록 두뇌를 설계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아무리 잊으려고 애써도 쉽게 잊을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1) 그 중의 하나는 육체에 속한 자랑입니다. 바울은 본문 바로 앞에서 그가 예수님에게 사로잡히기 전에 어떻게 육체를 자랑하면서 살았는지를 상세히 알려줍니다. "나도 육체를 신뢰할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내가 팔 일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다"(빌3:3-6). 팔 일만에 할례를 받았다는 말은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임을 자랑하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의 족속이라는 말은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자랑하는 말입니다. 베냐민의 지파라는 말은 그가 서자가 아니라 적자라는 것을 자랑하는 말입니다.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라는 말은 이방인의 피가 섞이지 않은 순수한 혈통임을 자랑하는 말입니다.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라는 말은 유대인 중에서 가장 거룩하게 살아온 종파에 속함을 자랑하는 말입니다. 열심으로 교회를 핍박하였다는 말은 열정을 다해 하나님을 섬겼음을 자랑하는 말입니다. 율법의 의로 흠이 없는 자라는 말은 율법의 기준으로 완벽하게 살아왔음을 자랑하는 말입니다.

바울의 말 그대로 정말 그는 자랑할 만한 사람입니다. 아마도 그 당시에 바울 만큼 그렇게 완벽한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후부터 바울은 이런 것들을 더 이상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이제 이런 것들을 믿음의 장애물, 아니 분토와 같은 것으로 여겼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것들을 자랑하는 것은 육체를 신뢰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그는 육체의 정욕에 따라 살아왔습니다. 이를 그는 육에 속한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이제부터 그는 성령의 인도에 따라 살게 되었습니다. 이를 그는 영에 속한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영에 속한 바울은 더 이상 육체대로 생각하지 않으며, 육체대로 판단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육체를 입고 오신 분입니다. 하지만 그분은 영으로 부활하신 주님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영을 받아들인 사람입니다. 그는 이미 부활의 영을 맛보고 있으며 부활의 소망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이런 영광된 소망에 참여한 그리스도인이 어찌 육체대로 생각할 수 있겠으며, 육체를 자랑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육체도 물론 부활에 참여할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육체에 매여 살아가지 않습니다. 육체의 욕망에 이끌려 살아가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술에 취해 성령의 인도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육체를 신뢰하지 맙시다. 육체에 따라 판단하지 맙시다. 지나간 육체의 행위를 자랑하지 맙시다. 이런 것들은 다 세상에 속한 것이고, 일시적인 것입니다. 육체만으로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물려받을 수 없습니다. 육체 속에서 살되, 육체를 따라 살지는 맙시다. 육체를 사랑하되, 육체를 위해서 살아가지는 맙시다. 형제, 자매를 육체에 따라 판단하지 말고, 온 우주와 바꿀 수 없는 영혼으로 보고,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여러분은 이런 예화를 들어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어떤 형제가 예수님의 모습을 직접 뵙기 위해 기도했답니다. "예수님, 주님의 모습을 한 번만이라도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그런데 그 날밤의 꿈에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내일 정오에 너의 집에 가겠다." 이튿날 형제는 집안을 깨끗이 청소하고 좋은 옷을 갈아입고 진수성찬을 차려놓고 예수님이 나타나시기를 손꼽아 기다렸답니다. 그런데 정오가 되자 난데없이 웬 거지가 나타나서 "밥 한술 달라"고 구걸하였습니다. 화가 난 형제는 거지를 발로 차서 내쫓았습니다. 정오에 오신다던 예수님은 끝끝내 오시지 않았습니다. 그날 밤에도 예수님은 꿈에 나타나셨습니다. 그러자 형제는 예수님에게 물었습니다. "예수님, 왜 약속대로 오시지 않았습니까?" 그러자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더랍니다. "어제 정오가 찾아간 거지가 곧 나였다."  

또 이런 예화가 전해오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한창 흑인 차별이 심할 때에 어떤 한 흑인 형제가 주일날에 어떤 교회당 안을 들어서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교회당 앞에서 한 백인이 문을 막고서는 "여기는 백인의 교회이니 들어올 수 없다"고 하며, 흑인 형제를 내쫓았습니다. 그 당시에는 식당과 버스 등 모든 공공 시설마다 흑인과 백인을 차별했답니다. 하지만 교회마저 흑인을 차별하자, 흑인 형제는 교회당 기둥에 기대어 울면서 예수님에게 물었답니다. "예수님, 어찌 교회조차 흑인을 무시합니까?" 그러자 흑인 형제에게 다음과 같은 예수님의 음성이 들려왔다고 합니다."형제여, 이 교회당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서러워하지 말아라. 나도 지금껏 한번도 들어가지 못했다."       

왜 예수님을 보고 싶었던 형제는 예수님을 보고도 영접하지 못했습니까? 예수님조차 들어가시지 못할 교회당 안에서 왜 백인만이 헛된 예배를 드렸습니까? 모두가 다 예수님과 형제를 육체대로 판단했고, 육체를 자랑하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이제 우리도 바울처럼 육체를 신뢰하지도 말고, 육체를 자랑하지도 맙시다. 이런 것들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지나간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미래의 약속을 바라보고 살아갑시다.  

                

2)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아무리 잊으려고 애써도 쉽게 잊을 수 없는 또 하나는 바로 마음의 상처입니다. 물론 본문에서 바울은 과거의 상처에 대해서는 일절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는 한번 이 본문의 내용을 뛰어넘어 바울이 받았을 만한 상처가 무엇인지 한번 상상해 보고자 합니다. 비록 바울이 마음의 상처를 분명히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에게도 분명히 잊기 어려운 상처가 있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일평생 육체의 가시(고후 12:7) 때문에 괴로워했던 것 같습니다. 그가 가진 육체의 가시가 무엇인지 우리는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어떤 이들은 안질이라고 말하고, 어떤 이들은 중풍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바울은 이 육체의 가시를  하나님의 섭리로 여겨 달갑게 받았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육체의 가시를 주셨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선교 여행 중에 수많은 환란을 겪었습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11:23-28). 하지만 그는 어떠한 형편에든지 자족하기를 배웠으며, 모든 일에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능력 주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었습니다. 모든 환경을 믿음으로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빌4:11-13). 그러므로 열악한 건강과 환경이 그를 괴롭힐 수는 없었습니다.

일평생 동안 바울을 괴롭힌 가장 큰 상처는 아마도 그를 사도로 인정하지 않는 제자들의 무시였을 것입니다. 그는 직접 예수님에 의해 선택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환상을 통해 예수님을 만났으며, 이 체험을 통해 그는 자신을 이방인의 선교사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소명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12사도들은 이전에 기독교인을 핍박하다가 갑자기 회심한 바울을 사도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오죽하면 바울은 편지를 쓸 때마다 늘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된 바울..."이라는 말로 시작했을까요! 문장으로 보면, "나도 예수님의 선택을 받은 당당한 사도이다"라고 말하는 것 같으나, 내심으로는 "제발 나를 사도로 인정해 주세요"라고 간청하는 듯이 보입니다.

일평생 살다 보면, 우리는 남으로부터 마음의 상처를 많이 당하게 됩니다. 육체의 상처는 그리 오래 가지 않지만, 마음의 상처는 상당히 오래 갑니다. 저의 예를 하나 든다면, 저는 집안이 무척 가난하여 학교 준비물을 제대로 가져가지 못하였습니다. 중학교 1학년 때라고 생각되는데, 하루는 미술 시간에 준비물을 가져오지 않았다고 하여, 미술 선생님이 제도용 큰 자로 손바닥을 여러 번 내리쳤습니다. 손이 상당히 아팠습니다만, 그 아픔은 금방 사라졌고 나도 그 일을 까맣게 잊었습니다. 그런데 마음의 상처는 그리 쉽사리 잊혀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35년 이상 흘러간 몇 해 전에 갑자기 그 때의 기억이 떠올랐는데, 그러자 창피하게도, 아니 이상하게도 갑자기 울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가난도 서러운데, 준비물을 가져가지 못한 것도 창피한데, 더욱이 나의 형편도 알아보지도 않고 선생이라는 놈이 무지막지하게 때리다니, 나쁜 놈의 새끼 ..."하고 욕하며 울었습니다. 몇 분 동안 통곡하듯 울고 나니, 속이 후련하였습니다. 마음의 상처가 그리 오래 갈 줄은 차마 몰랐습니다.

여러분도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남에게 무시당한 것, 남에게 맞은 것, 남에게 속임을 당한 것, 남에게 모함을 당한 것 등, 수많은 마음의 상처를 받아왔을 것입니다. 특히 한국 여인들은 오랫동안 억눌려 살아왔기 때문에 세계에서 희귀한 화병을 앓고 있습니다. 마음의 상처는 마음의 가시입니다. 이 가시는 나의 마음을 찌르다가, 종종 남을 찌르곤 합니다. 지나온 시절 동안 받은 이 마음의 상처를 어떻게 치유할 수 있을까요? 지난 상처는 쉽게 잊혀지지 않습니다. 억지로 덮어버리고 억누른다고 해서 상처가 고쳐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상처를 치유할 수 있을까요?

스스로 자존심을 회복하는 겁니다. "남이 뭐라고 하든, 나는 그리스도의 당당한 사도이다"라고 외친 바울처럼 "남이야 나를 어떻게 보든, 나를 어떻게 모욕하든, 나에게 어떤 상처를 주든, 나를 마구 때리고 짓밟든, 나는 하나님의 존귀한 자녀이다"라고 선언하는 겁니다. 대개 마음의 상처는 모욕을 받고 마음속에 차곡차곡 쌓아놓기 때문에 생겨납니다. 남들이 좋은 것을 주더라도, 종종 나는 그것을 거부할 수 있습니다. 하물며 남들이 좋지 않는 것을 주는데, 왜 내가 그것을 무조건 받아야 합니까? 남들이 이런 저런 모욕을 주더라고, 안 받으면 그만입니다. 허허 웃으면, 그만입니다. 모욕을 안 받으면, 그 모욕은 부당하게 모욕한 사람에게 도로 돌아갑니다. 내가 되돌려 주었으니까, 당연히 주인에게 돌아갑니다.

 이제부터는 육체의 가시에 연연하지 맙시다. 만약 내 몸에 연약한 부분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내가 교만하지 않도록, 아니 내가 하나님을 더 의지하도록 주신 선물이라고 생각하십니다. 이제부터는 남이 주는 마음의 가시에도 아파하지 맙시다. 만약 마음이 상처가 남아 있다면, 예수님에게 고쳐달라고 드리십시다. 예수님은 당신의 상처를 통해 우리의 상처를 고쳐 주십니다.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벧전 2:24). 과거의 것은 과감히 잊어버립시다. 새 일을 기대하는 사람은 과거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이사야는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적 일을 생각하지 말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사 43:18)라고 말했습니다. 과거를 잊어야만,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과거를 잊어야만, 앞에 있는 목표로 달려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경주자가 지나간 실수와 상처를 자꾸 되돌아보면, 앞으로 힘껏 달려갈 수 없습니다. 과거의 육체의 자랑, 과거의 마음의 상처를 훌훌 털어 버리고, 앞으로만 달려갑시다. 하나님의 큰상이 기다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