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잃은 자를 찾은 기쁨

눅 15:3-22

 

2003년 2월 9일, 현풍제일교회

 

 

올해 우리 교회의 표어는 "새롭게 출발하는 교회"이며, 구체적인 목표는 1) 낙심자와 가족 인도하기, 2) 교육을 통한 신앙 성숙, 3) 구역 예배의 활성화, 4) 교회 이미지의 강화입니다. 특히 올해는 무엇보다 "낙심자와 가족 인도하기"에 주력하기로 합시다. 불신자를 전도하는 일은 얼마나 어렵습니까? 하지만 이런 저런 이유로 낙심한 자들과 우리 가족 중에서 아직 믿지 않는 자들을 교회로 인도하는 것은 그보다는 더 쉽습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우리는 잃은 자들을 찾는 자들의 심정이 얼마나 안타까운 것인지, 그리고 잃은 자들을 찾은 기쁨이 얼마나 큰 지를, 예수님의 비유 말씀을 통해 깨닫고자 합니다.하늘 아버지는 집을 나간 자들, 잃어버린 자들을 찾기 위해 예수님을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잃은 자들을 찾으려 오신 분입니다. 그분은 일평생 잃은 자들을 찾아나셨고, 그들을 부르셨으며, 그들을 고치셨으며, 그들을 하나님의 나라 일군을 기르시고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명은 특히 그분이 가르치신 세 가지 비유 속에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잃은 양의 비유', '드라크마의 비유', '탕자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를 통해 하나님이 잃은 자들을 얼마나 애타게 찾으시며, 그들을 찾았을 때는 얼마나 기뻐하시는지를 알아보고자 합니다.

 

1. 예수님은 잃어버린 자들을 찾아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에게 보냄을 받았다는 확신 속에서 세상에서 버림을 받은 죄인들, 세리들, 창녀들을 찾아나셨습니다. 그분의 관심의 대상은 온통 병들고 잃어버린 자들을 향해 있었습니다. 본문의 비유도 바로 이 점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목자는 일흔 아홉 명의 양보다 한 마리 잃은 양에게 더 큰 관심을 둡니다. 여인은 아홉 개의 드라크마보다 한 개의 잃은 것에 더 집착합니다. 아버지도 충직한 큰 아들보다 집나간 작은 아들을 더 염려합니다. 이처럼 예수님도 스스로 거룩하다는 생각하는 사람들, 이웃에 대하여 무관심한 부자들과 권력자들의 위선과 이기심을 혹독히 나무라셨지만, 잃어버린 자들에게는 편애한다고 비난받을 만큼 큰 관심을 보이셨습니다. 그분은 스스로 의롭다고 자부하던 바리새인들처럼, 혹은 광야에서 수도하던 사람들처럼 죄인들과 떨어지지 않고, 그들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분은 광야로 나가시지 않고 삶의 길목, 시장 한복판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소외된 자들, 잃어버린 자들 속으로 들어가서 활동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에 합당한 성도가 자가 되려면, 우리만의 교제로 만족해서는 안 되며, 잃어버린 자들을 찾아 나서야 합니다.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들의 손을 잡아 주어야 합니다. 그들을 찾아가야 합니다!

 

2. 어찌하여 잃은 자들이 생겼습니까?

1) '잃어버린 양'은 목자의 말을 잘 듣지 않는 성질 사나운 양이었을 지도 모릅니다. 혹시 동료가 싫증이 났는지도 모릅니다. 혹시 목자의 가르침에 싫증이 났거나 목자의 무관심에 실망했는지도 모릅니다. 혹시 목자의 가혹한 통솔이 싫었는지도 모릅니다. 혹시 더 맛있는 꼴을 찾아서 여기저기 방황하다가, 혹시 자기 혼자 실컷 먹을 수 있는 비밀 장소를 찾아서, 혹시 고약한 다른 양의 꾀임에 빠져서 대열에서 이탈했는지도 모릅니다.

'잃어버린 드라크마'는 동전이므로 제 스스로 빠져나갈 능력이 없습니다. 이 동전은 아마도 여인이 잘못 다루어 어디론가 굴러갔거나, 어디 둔 곳을 몰라 잃어버렸을지도 모릅니다. 무관심과 부주의, 실수로 귀중한 장식품의 일부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탕자'는 아버지를 떠날 테니 자기 몫의 유산을 미리 달라고 졸라서 이를 챙긴 후에 세상 속으로 달려나갔습니다. 아버지의 감독과 훈계가 싫었을지도 모릅니다. 집안 일보다 세상이 더 즐거울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혹시 못된 친구들이 꼬셨는지도 모릅니다. 혹시 부모로부터 일찍 자립하는 게 좋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혹시 세월이 흐르다 보면, 유산을 제대로 못 받을지도 모른다는 염려 때문에, 혹시 일찍 유산을 챙기는 것이 유리하겠다는 속셈으로 그리 하였는지도 모릅니다. 여하튼 그는 제 발로 당당히 부모 곁은 떠났습니다.  

 

3. 잃은 자들을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잃은 양'은 지금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지금 어디에 있는지를 전혀 모릅니다. 혹시 구덩이나 가시덤불에 빠져서 울부짖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여하튼 그는 스스로 되돌아올 수 없습니다. 스스로 헤쳐 나올 수가 없습니다. 방향 감각과 자구 능력이 없습니다. 이런 경우에 주인은 어떻게 잃은 양을 찾겠습니까? 들판이나 계곡을 다 뒤지며 갈만한 곳으로 헤매다가, 혹시 울부짖는 소리를 듣고 찾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낙심한 사람들도 지금 자신들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어디로 가야할지를 잘 모르고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인생의 의미와 목표를 잃어버렸거나 잘못 정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목자의 심정으로 그들이 있을 만한 곳, 구석구석을 찾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들이 소리를 지르든 안 지르든, 그들은 분명히 우리의 도움이 필요로 한 자들이 아닙니까?

'드라크마'는 주인이 언제, 왜 잃어버렸는지 모르니, 어디에 있는지도 알 턱이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집에는 대게 창문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캄캄한 집안에서 동전을 찾기가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어디에 떨어졌는지, 어디로 굴러갔는지도 모르니 답답한 심정입니다. '잃은 양'처럼 갈만한 곳도 모르고, 가까이 가도 소리내어 울지도 않습니다. 이런 경우에 여주인은 어떻게 잃은 한 드라크마를 찾겠습니까? 불을 켜고 빗자루로 집 전체를 쓸면서 구석구석 뒤져 볼 것입니다. 오늘날도 우리의 무관심 속에서, 아니 우리의 교만이나 실수 때문에 모르는 사이에 슬그머니 빠져나간 사람들이 많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들은 스스로 돌아올 생각도 하지 않거니와, 돌아오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설령 그들이 그런 의욕과 능력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스스로 돌아올 힘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인처럼 마음과 눈의 불을 켜서 우리 주위를 샅샅이 뒤져서 데려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기저기 수소문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탕자'는 제 발로 나갔으니 제 발로 돌아올 때까지 아버지처럼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는 지금 어디에 있는지도 알고 있으며, 스스로 후회할 줄도 압니다. 아들의 자유와 자존심을 꺾고 아버지가 일방적으로 끌어올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아버지는 기다릴 도리 밖에 없습니다. 아들은 돌아올 능력이 있고 돌아올 방향을 알고 있고, 자신의 곤경을 벗어나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버지는 아들이 스스로 돌아올 때까지 기다립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저 잠잠히 기다리지 않습니다. 동구 밖으로 나가 보기도 하고, 발을 동동 굴리기도 하며, 멀찌감치 아들이 보이면 재빨리 달려나갈 준비를 하면서, 자주 멀리 쳐다봅니다. 빨리 돌아오라고 두 손을 모아 기도하며, 아들이 올 때를 위해 음식과 선물을 준비합니다. 우리도 밖에 나가 지치고 외롭고 실패한 성도들을 억지로 데려올 순 없다 하더라도, 그들이 스스로 깨닫고 돌아올 날을 위해 애써 기도하고, 기다리고, 준비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들이 돌아 올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항상 따뜻하게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3. 잃은 자를 찾은 기쁨은 너무나 큽니다.

 목자는 잃은 한 마리의 양을 어깨에 메고 돌아와 친구와 이웃을 불러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한 드라크마를 찾은 여인은 너무 기뻐서 친구와 함께 향연을 베풀었습니다. 잃은 아들을 찾은 아버지는 성대한 축제를 베풀었습니다. 잃은 자를 찾으면, 왜 그렇게 기쁩니까? 하나가 없으면, 나머지는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한 마리의 양이 없으면, 나머지의 양들은 있으나마나 합니다. 그러므로 목자는 한 마리의 양을 찾기 위해 일흔 아홉 마리의 양들을 들에 그냥 방치해 두다시피 했습니다. 물론 아흔 아홉 마리를 우리 안으로 안전하게 몰아 넣어놓고 한 마리를 찾으려 나갔을 겁니다. 한 마리를 찾으려다가 다른 양들을 모두 잃어버릴 수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목자의 마음에는 한 마리, 한 마리가 다 소중했습니다. 예수님도 한 영혼이 온 천하보다 더 귀하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여인은 정혼한 약혼자가 정성껏 만들어 준 머리 수건에서 떨어져 나간 한 개의 동전을 찾으려고, 아홉 개의 동전에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한 개의 동전이 없다면, 머리 수건은 있으나마나 합니다. 약혼자를 쳐다볼 면목이 없습니다. 사랑이 담긴 머리 수건에 아무 동전을 매단다고 해서, 마음이 흡족할 리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인은 한 개의 동전을 찾으려고 혈안이 되었습니다. 아니 그는 눈물을 흘리면서 찾을 겁니다.   

아버지는 작은 아들을 기다리느라 큰 아들이 얼마나 성실히 집안 일을 돌보는지 눈여겨보지 않았습니다. 부모는 모든 아들을 고루 사랑하지만, 아픈 아들을 더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상처난 손가락에 더 신경이 쓰이듯이, 방탕한 아들을 위해 더 걱정하는 것은 인지상정입니다. 큰 아들이 아무리 똑똑하고 집안 일을 잘 처리해도, 다른 아들 하나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아버지에겐 아무런 기쁨도 없을 겁니다. 작은 아들이 돌아와 준다면, 전 재산도 다 주고 싶은 심정일 겁니다. 왜냐하면 한 아들만 없어도 집안 전체가 쓸쓸하고 슬프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목자처럼, 정혼한 여인처럼, 아버지처럼 한 영혼, 한 영혼을 온 천하보다 더 귀하게 여기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직접 잃은 자들을 찾으시려고 하늘의 영광을 버리시고, 거친 땅으로 내려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머리를 둘 곳도 없이, 두 벌 옷도 없이, 먹고 자고 할 아무런 준비도 없이, 들로 산으로 헤매고 다니셨습니다. 그러다가 한 잃어버린 사람 하나라도 찾을 양이면, 너무나 기쁘신 나머지, 잔치를 베풀고 기뻐하셨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우리 중에서 잃은 사람들을 찾으러 나갑시다. 잃은 양을 찾지 못했는데, 잃은 동전을 찾지 못했는데, 집나간 자식이 돌아오지 않았는데, 나머지 식구들이  태연하거나 저들끼리 즐겁게 산다고 한다면, 그 얼마나 무정한 사람들입니까? 그러므로 잃은 자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그들을 찾으러 나갑시다. 그들을 데리고 옵시다. 그들을 위해 잔치를 준비합시다. 우리만의 잔치는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우리만의 잔치에 무슨 큰 기쁨이 있겠습니까? 집나간 자식을 위해 식음을 전폐하지는 못할망정 우리끼리 기뻐한다면, 하나님 아버지도 아주 섭섭해하실 것입니다. 그들을 찾아야, 우리도 잃은 기쁨을 되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찾는 것은 우리의 기쁨을 되찾기 위한 길이기도 합니다. 잃은 자가 돌아오는 그의 일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