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두려워하지 말라

막 4:35-41

2006년 7월 16일: 현풍제일교회

 

1. 두려워하라 두려움은 필요하다. 두려움은 인간이 살아가는 데 반드시 없어서는 안 되는 보호 본능이다. 만약 우리에게 두려움이 전혀 없다면, 그야말로 범이 무서운 줄 모르는 하룻강아지처럼 눈앞의 위험도 모르고 날뛰는 어리석음을 범할 것이다. 두려움을 아는 사람은 두려움을 모르는 사람보다 더 자주 곤경과 낭패를 당하기 쉬울 것이다. 물이 전혀 두렵지 않는 사람은 물에 빠져 익사하기 쉬울 것이다. 그래서 수영을 잘 하는 사람이 물에 빠져 죽기 더 쉽다는 말이 생겼다. 수영을 못하는 사람은 물이 무서워 물에 들어가지 않거나, 물에 들어가도 깊이 들어가지 않으므로 익사할 위험은 전혀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불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불에 데일 위험이 더 크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두려움을 주신 것을 우리는 감사해야 한다. 물론 두려움 전혀 없는 세상에서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지만 이 세상에는 위험하고 무서운 것이 너무 많으므로 우리는 매사에 두려움을 갖고 신중하게 말하고 신중하게 행동해야 한다.

2. 두려워하지 말라 하지만 지나친 두려움은 금물이다. 매사에 신중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매사에 아무 것도 하지 못 할 정도로 지나치게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적당한 두려움은 꼭 필요하지만, 매사를 두려워하거나 지나치게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만약 매사를, 그리고 지나치게 두려워한다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밥을 먹다가 혹시 체하지나 않을까, 혹시 밥 속에 독약이 들어 있지나 않을까 염려하다 보면, 밥을 도저히 먹을 수 없을 것이다. 길을 가다가 혹시 치한을 만나지는 않을까, 혹시 길이 갑자기 꺼지지나 않을까 염려하다 보면, 한 걸음도 내딛지 못할 것이다. 이런 두려움, 저런 두려움에 휩싸이다 보면, 정신적으로 피폐해지고 육체적으로 병들어 머잖아 죽고 말 것이다. 차라리 그럴 바에야 하고 싶은 일을 실컷 하다가 빨리 죽는 게 더 낫지 않겠는가! 지나친 두려움 때문에 아무 것도 하지 않느니보다는 차라리 좋아하는 일을 하다가 실패하는 것이 훨씬 더 나을 것이다. 비록 실패하는 일이 있더라도, 그래도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해 보았으니 얼마나 다행이고 또 감사할 일인가!

그러나 인간이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큰 재앙이 다가오는데 어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강력한 태풍이나 해일이 밀려오거나, 엄청난 수의 적군이 쳐들어오거나, 무서운 전염병이 돌기 시작할 때, 어찌 두려워하지 않겠는가! 감당하기 어려운 시련이 닥쳐오는 마당에 어찌 온 몸과 마음이 사시나무처럼 떨지 않겠는가! 하루는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시고 큰 호수를 건너가시게 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호수에 큰 광풍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큰 물결이 배를 흔들고 물이 배 안을 가득 채우게 되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사정도 모르시고, 얼마나 곤하셨던지, 뱃전에서 쿨쿨 주무시고 계셨다. 철떡 같이 믿던 예수님은 나 몰라라 주무시고, 배는 이제 침몰하기 시작하니 제자들은 얼마나 두려웠겠는가? 그러자 제자들은 주무시던 예수님을 깨워 도와달라고 아우성을 질렀다. "선생님, 우리가 죽게 된 것을 어찌 돌아보지 아니하십니까!"

배를 가라앉힐 정도로 험한 폭풍과 파도 앞에서 죽을 정도로 벌벌 떨던 제자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하지만 이것은 비단 제자들만의 모습은 아니다. 우리도 역시 큰 위험은 물론이거니와 작은 위험 앞에서도 벌벌 떨며 두려워한 적이 얼마나 많았는가! 망망한 대해 위의 일엽편주(一葉片舟)와 같은 나약한 우리는 얼마나 자주 두려워하는가! 인간이 얼마나 두려워하길 좋아하면, "자라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을 보고도 놀란다"는 속담까지 나왔겠는가! 만약 우리가 제자들의 처지에 놓였다면, 제자들보다 더 일찍, 더 많이 놀라지 않았겠는가!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교훈 한 가지를 깨닫게 된다. 먼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도 위험이 닥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이 배 안에 계신 중인데도 큰 폭풍이 일어났다. 이처럼 예수님을 진심으로 믿고 따르는 사람에게도 큰 시련이 닥쳐온다. 만약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시련도 다가오지 않는다면, 아마도 세상 사람 모두가 예수님을 믿게 될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연 섭리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도 예외가 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두루 비치게 하시고,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두루 내리게 하신다(마 5:45). 바로 그처럼 하나님은 악인과 선인,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두루 태풍과 지진을 허락하신다. 얼마 전에 인도네시아 부근에 거대한 해일(쓰나미)이 닥쳐와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을 때, 서울의 어느 교회의 목사님은 "하나님이 주일을 지키지 않고 향락을 즐기는 사람에게 해일을 내리셨다."고 했다. 또 미국 남부에 큰 물난리가 났을 때, 역시 그 목사님은 "하나님이 동성애자들이 모이기로 한 그 장소에 홍수를 내리셨다."고 했다. 그 목사님의 설교에 동의하는 사람도 더러 있었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 목사님을 비난했다. 어려움을 당한 사람을 동정하고 그 사람들을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그들을 비난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비난했다. 하지만 그 목사님은 잘못 말하기 전에 잘못 생각했다. 하나님은 그렇게 마구 화풀이를 하실 정도로 속이 좁고 잔인한 분이 아니다. 그리고 큰 시련을 당한 사람들 중에는 신실한 성도들도 분명히 들어 있었다.

하나님의 자연 섭리 혹은 일반 섭리를 보면,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가 그리 크지 않은 것 같이 보인다. 그 이유는 뭔가? 물론 연약한 피조물인 우리로서는 하나님의 뜻을 훤히 들여다 볼 수는 없다. 다만 우리의 믿음이라는 것은 "그렇기 때문에 믿는" 싸구려 믿음이라기보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는" 귀한 믿음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눈에 환히 보인다면, 그 누가 하나님을 안 믿겠는가? 아직까지는 믿음은 보이는 대로 믿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은 것을 믿는 것이다. 바로 그래서 믿음은 더욱 귀한 것이고, 바로 그래서 아무나 믿는 것이 아니다. 더욱이 오늘의 본문을 보면, 제자들을 큰 시련으로 인도하신 분은 바로 예수님이다. 예수님은 분명히 태풍이 불어올 것을 미리 아셨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제자들을 폭풍 한가운데로 데리고 가셨다.

여기서 또한 우리는 한 가지의 교훈을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은 종종 불신자들보다 신자들에게 더 큰 시련을 안겨 주신다는 사실이다. 왜 그러시는가? 해를 비추시고 비를 내리시는 일, 재앙과 시련을 주는 일에 하나님은 신자와 불신자를 크게 차별하시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신자와 불신자 간에 행복과 불행의 차이가 그다지 커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신자와 불신자는 엄연한 차이가 있다. 장차 누리게 될 미래의 소망을 바라 볼 때,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는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는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가 전혀 없다는 말인가? 그렇지만은 않다. 신자들이 이 세상에서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은 신자들을 위로하신다. 더욱이 하나님은 신자들의 고통을 함께 나누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고통을 견디고 이길 수 있도록 힘을 주신다.

어디 그뿐이랴! 불신자들을 향해서 하나님은 대개 방관하시고 방치하신다. "네 마음대로 살아 보라."고 방관하시고, 네 욕심대로 죄를 지어 보라."고 방치하신다. 하지만 신자들을 향해서는 하나님은 잊지 않으시고 훈계하시고 경고하신다. 하나님의 뜻을 거역할 때마다 하나님은 "돌아서라"고 훈계하시고, 우리 욕심대로 살려고 할 때마다 "육신의 정욕대로 살지 말라"고 경고하신다. 그 뿐만이 아니다! 하나님은 불신자들과는 달리 신자들에게 종종 특별한 고난을 내리신다. 신자들을 더 강하게 단련하시기 위해, 신자들의 신앙이 더욱 성장하고 성숙하게 되기 위해 하나님은 신자들을 종종 고난으로 인도하신다. 부모는 남의 자식들이 어떻게 살든 관심이 별로 없다. 하지만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는 자식을 위해 훈계하고 훈련시킨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훈련하시기 위해 폭풍 속으로 인도하셨다. 그러므로 신자들이 고난을 당할 때, 불신자들처럼 섣불리 두려워하거나 낙심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고 바울은 말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고난도 결국 유익이 된다. 그러므로 죄로 말미암아 다가오는 고난이 아니라면, 고난도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알기 때문이다."(롬 5:3-4)고 했고, 심지어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하다"(빌 1:21)고 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고난으로 인도하셨지만, 고난 중에 예수님도 함께 하셨다. 예수님이 함께 계시는 중임에도 불구하고 고난을 두려워하는 것은 믿음이 약한 탓이기 때문이다. 폭풍 때문에 두려워하던 예수님이 제자들을 어떻게 책망하셨는가?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3. 두려워하라 고난 중에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하셨을 뿐만 아니라 제자들의 고난을 해결해 주셨다. 예수님이 깨어나신 후에 바람을 향해 "잠잠하라, 고요하라!"라고 바람을 꾸짖으시니, 곧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졌다. 그러자 제자들은 또 다시 두려움에 휩싸이게 되었다. "저희가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저가 뉘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고 하였더라." 그렇다. 우리는 그 어떤 고난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의 고난을 해결해 주시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난이 지나간 후에도 우리가 늘 두려워해야 할 분이 있다. 바로 예수님이다. 예수님을 향한 두려움은 정당한 두려움이다. 바람을 잠잠케 하시는 예수님을 어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세상의 사소한 일에는 조심하고 두려워해야 한다. 그러나 큰 어려움 앞에서는 결코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우리가 늘 두려워해야 할 분이 계신다. 바로 예수님이시다. 우리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명하신 예수님을 우리는 두려워해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바람과 폭풍만이 아니라 우리를 친히 다스리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렵고 떨림으로 예수님에게 순종하며 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