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악한 종

 

마 24:32-51

2003년 4월 2일, 현풍제일교회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주인이 도적이 어느 경점에 올 줄을 알았더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뇨?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저에게 맡기리라. 만일 그 악한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동무들을 때리며 술친구들로 더불어 먹고 마시게 되면,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의 받는 율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1) 동양인들은 대체로 시간과 인생, 역사가 돌고 돈다고 생각한다. 이것을 한 마디로 일컬어, 순환론적 세계관이라고 한다. 동양인들은 자연을 정복하려고 하기보다는 자연 속에서 살면서 자연과 조화를 이루려고 노력했다. 그런 탓으로 동양인들은 시간과 역사를 자연의 원리에 따라 이해했다. 달이 주기적으로 기울다가 차고, 해가 주기적으로 뜨고 지듯이, 그리고 계절이 주기적으로 순환하듯이, 역사도 주기적으로 반복하고 순환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므로 동양인들은 운명 혹은 사주팔자를 신봉한다. 그래서 한국 사람들도 흔히 "팔자소관"이라는 말을 자주 한다.

그와 달리 유대교와 또 유대교를 개혁한 기독교는 시간과 인생, 역사를 직선적으로 생각한다. 이것을 한 마디로 일컬어, 목적론적 세계관이라고 한다. 유대인들은 자연에 비추어 역사를 이해하지 않고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사건에 비추어 역사를 이해했다. 하나님의 역사적 사건은 단순히 반복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역사 속에서 늘 새롭게 행동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역사에 의미와 목적을 주시고, 이 목적을 향해 사람들을 부르신다. 그러므로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은 운명 혹은 팔자를 믿지 않고 회개 혹은 결단을 강조한다. 이 세계는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늘 달라질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늘 새롭게 결단하고, 새롭게 탈출해야 한다.      

특히 기독교의 세계관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것은 종말론이다. 이 세계는 저절로 존재하는 것, 시작도 끝도 없이 돌고 도는 자연(自然)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물이다. 그러므로 이 세계는 시작과 끝이 있으며, 목적과 의미가 있다. 하나님은 언젠가 이 세계를 완성 혹은 심판하시기 위해 예수님을 다시 보내실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설명하실 때, 종에게 포도원을 맡기고 멀리 떠났다가 다시 돌아와 회계하는 임금을 비유로 드시거나, 신랑을 기다리는 열 처녀를 비유로 드시곤 했다. 오늘의 본문도 바로 그런 비유에 속한다. 오늘의 본문은 언제 들어올지 모를 도둑과 집안 일을 맡긴 후에 다시 돌아오는 주인을 비유로 든다.

그런데 주인이 언제 오는지를 어떻게 아는가? 그것은 시대의 징조를 통해 알 수 있다. 예수님은 인자가 재림할 때에 난리와 기근, 질병과 전쟁 등의 징조가 있을 것이라고 말하셨다. 옛날부터 지금까지 이런 사건들은 늘 일어났기 때문에 결정적인 때가 언제인지를 분간하기는 정말 쉽지 않다. 오늘의 본문에서 예수님은 무화과나무를 비유로 들어 인자의 재림의 날을 설명하신다. 무화과나무의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다가오는 것을 느끼듯이, 시대의 징조를 통해 인자의 재림을 읽을 줄 알아야 한다고 예수님은 가르치신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시대에 민감해야 할뿐만 아니라 시대 속에서 재림의 징조도 읽을 줄 알아야 한다. 하지만 예수님은 재림의 시와 날은 오직 하나님만이 아신다고 분명히 못을 박으셨다. 예나 지금이나 예수님의 재림의 날을 잘못 예언하여 큰 낭패와 창피를 당한 사람들이 허다하다. 그 날은 예수님조차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날을 알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을 넘어서서 하나님처럼 높아지려는 교만이다. 예수님도 분명히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말하셨다. 하물며 우리가 어찌 모든 것을 안다고 허풍을 떨 수가 있겠는가?

 

2) 재림의 징조와 때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그 때가 도둑처럼, 혹은 주인처럼 졸지에 올 수 있으므로 늘 그 때를 위해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악한 종은 주인이 더디 오리라고 생각하다가 갑자기 주인이 옴으로써, 큰 낭패를 당하였다. 그러므로 종은 항상 주인이 오는 날을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주인이 아직도 오지 않았으니 당분간은, 아니 자기 생애 동안에는 오지 않으리라고 방심하면 안 된다. 주인이 언제 오더라도, 아니 더디 온다고 하더라도, 아니 갑자기 올 수 있기 때문에 지혜로운 종은 항상 주인이 맡긴 일을 충실히 실천해야 한다.

종말이 언제 올지 모르기 때문에, 아니 더디 오기 때문에 방심해서도 안 되지만, 설령 종말이 곧 온다고 생각되더라도, 시한부 종말론자들처럼 가사와 직장을 때려치우고 어느 한 곳에 모여서 종말을 기다려서도 안 된다. 그들이 그 날과 그때를 알 수 있다고 생각한 것도 큰 잘못이지만, 그보다 더 큰 잘못은 종말이 온다고 기도와 찬송 외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태도이다. 하지만 스피노자와 같은 철학자조차 "내일 세상의 종말이 오더라도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 말은 내일 모든 일이 수포로 돌아가는 한이 있더라도, 사는 날 동안 자기의 인생을 최선을 다해 살겠다는 뜻이다. 종말이 오면, 그가 심은 나무는 아무 소용이 없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는 날까지는 최선을 다하겠다는 다짐의 말이다.

하지만 본문의 뜻은 스피노자의 뜻과 완전히 다르다. 본문은 내일이면 만사가 끝장이 나더라도 사는 날까지는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내일 세상의 종말이 올 수 있기 때문에,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오늘의 일을 최선을 다하여야 한다는 말이다. 종말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종말의 날, 즉 결산의 날이 있기 때문에 오늘의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말이다. 오늘의 본문에서 악한 종은 종말이 더디 올 수 있기 때문에 흥청망청 살았다면, 종말이 곧 임박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중에서는 내일이면 자신의 모든 재물이 아무 소용이 없으니 마구 쓰고 보자는 사람들도 종종 볼 수 있다. 차라리 그 재물을 남에게 베풀었다면, 오히려 주인에게 칭찬을 들을 수도 있었을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재물은 종의 것이 아니라 주인이 맡겨놓은 것이다. 그러므로 재물을 흥청망청 탕진하든, 남을 위해 유익하게 사용하든, 재물의 소유권은 자신에게 있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뜻대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 재물은 재물의 주인의 뜻대로 사용해야 한다. 주인의 뜻대로 사용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재물을 잘 관리하고 운용하는 것이다. 그리고 주인의 분부대로 성실히 사용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다가 주인이 오면, 종은 큰 칭찬과 상급은 받는다.

종말 때문에 오늘의 삶을 비관하거나 부정해서는 안 된다. 종말은 오늘의 일을 무의미하게 만들지 않고 오히려 의미가 있게 만든다. 종말이 오면, 오늘의 일이 끝장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가치를 더욱 발한다. 아니 악한 일은 종말에 다 끝장나지만, 선한 일은 종말까지, 아니 그 이후까지 계속 이어진다. 하나님의 나라가 올 때, 하나님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땀흘리고 수고한 모든 것을 기억하시고, 영광의 선물로 보답하신다. 이 땅에서 성도가 행한 선한 일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난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 이 땅에서 성도가 흘린 눈물은 하늘의 도성에서 보석처럼 빛난다. 우리가 이 땅에서 행한 작은 일, 즉 약한 사람들에게 물 한 그릇 대접한 것도 하나님은 결코 잊지 않으신다. 사도 바울이 모든 것은 다 떨어지고 헤어지고 낡아져도, 사랑은 언제까지 있을 것이라고 말한 것도 다 이와 같은 이치 때문이다.

목적지가 있으므로 나그네의 발걸음은 힘겹지 않다. 추수할 때가 있으므로 농부의 땀은 결코 헛되지 않다. 해산할 날이 있으므로 임산부의 고통은 결코 무익하지 않다. 아니 발걸음 하나 하나가 있으므로 목적지는 더 가까워진다. 땀을 흘릴수록 곡식은 더 탐스럽게 익어간다. 해산의 인내가 있는 만큼 자식은 더 사랑스럽게 자란다. 그러므로 종말의 날이 언제 올지 모르므로 우리는 늘 깨어 기도할 뿐만 아니라 오늘의 일을 충실히 함으로써 그 날을 복되게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