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양과 염소

 

마 25:31-46

 2003년 5월 7일, 현풍제일교회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저희도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이까?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1) 오늘의 본문은 양과 염소의 비유를 통해 마지막 심판에 관해 가르치고 있다. 양과 염소는 유목 생활에서 가장 쉽게 볼 수 있는 동물인데, 예수님은 심판을 통과한 사람과 심판을 통과하지 못한 사람을 구분하기 위해 양과 염소를 비유로 드시고 있다. 이와 비슷한 말씀은 에스겔 34장 17-19절에도 나타난다.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양 떼 너희여! 내가 양과 양의 사이와 수양과 수염소 사이에 심판하노라. 너희가 좋은 꼴 먹은 것을 작은 일로 여기느냐? 어찌하여 남은 꼴을 발로 밟았느냐? 너희가 맑은 물 마신 것을 작은 일로 여기느냐? 어찌하여 남은 물을 발로 더럽혔느냐? 나의 양은 너희 발로 밟은 것을 먹으며, 너희 발로 더럽힌 것을 마시는도다 하셨느니라."  

양과 염소의 비유는 인자 예수님이 영광 중에 재림하셔서, 인류를 영광의 보좌 앞으로 불러모아 심판하실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대개의 사람들은 이 본문을 '마지막 심판의 비유'라고 생각한다. 분명히 이것은 마지막 심판의 비유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심판은 단지 종말에만 한꺼번에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마지막까지 심판을 미루고 길이 길이 참으시다가, 그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인류가 행한 모든 기록을 들여다보면서 인류를 한꺼번에 심판하시는 분은 아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매일 일어난다고도 할 수 있다. 때로는 하나님의 심판은 일어나지 않는 듯이 보이고, 때로는 하나님의 심판이 너무나 더딘 것처럼 보이지만, 천천히 돌아가는 물레가 곡식을 고루고루 빻듯이, 하나님의 심판은 역사 속에서 천천히, 그러나 분명히 일어난다. 그래서 유명한 철학자 헤겔(Hegel)은 "세계의 역사는 곧 심판의 역사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 비유는 분명히 마지막 심판에 관한 말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항상 어디서나 일어나는 심판을 암시하기도 한다. 여하튼 이 비유가 인류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방법으로 최종적인 심판을 받는가를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분명히 궁극적인 심판도 말하고 있다.

역사 속에서 항상 일어나지만 역사의 마지막에 일어날 하나님의 심판은 어떤 기준과 척도에 따라 이루어지는가? 어떤 사람들이 최종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는가? 이를 아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에 대한 생각이 우리의 마지막 운명을 결정하기 때문이며, 그래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의 나라는 오직 믿음으로만 들어간다고 말한다. 어린이 찬송가에 쓰여져 있듯이, 하나님의 나라는 돈으로도 못 가고, 힘으로도 못하고, 선행으로도 못 간다. 그렇다면 오늘의 비유는 완전히 잘못된 것이 아닌가? 오늘의 비유에서 마지막 심판자는 인간들에게 믿음에 관해 아무 것도 묻지 않는다. 심지어 세례의 여부, 교회의 직분과 교회 충성의 정도에 관해서도 묻지 않는다. 심판의 기준은 "우리가 어떻게 믿었느냐?"에 있는 게 아니라 "우리가 불행한 사림을 어떻게 대접했는가?"가에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우리가 굶주린 자, 목마른 자, 벌거벗은 자, 나그네, 병든 자, 갇힌 자를 어떻게 대했는가?"에 있다.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심판의 기준은 "우리가 고난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실천했느냐?"에 있다.

그렇다면 구원은 인간의 공로와 행위로 결정된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은 헛된 것이란 말인가?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만 산다"는 바울의 말도 헛된 것이라는 말인가? 그렇다면 기독교는 다시 은혜와 믿음의 종교로부터 행위와 공로의 종교, 즉 율법의 종교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말인가? 단호히 말하건대, 결코 그럴 수 없다. 본문은 결코 인간의 행위가 구원을 결정한다는 사실을 말하고자 하지 않는다.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믿음은 행위를 통해 드러나고, 행위를 보면 믿음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열매를 보아 나무를 안다"고 말하시지 않았는가?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 7:15-21). 예수의 동생 야고보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 2:14-17). 칼빈(J. Calvin)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들의 행위에 따라 갚으신다. 왜냐하면 각 사람은 그의 행위에 의하여 신자인지 불신자인지 증명할 것이기 때문이다." 참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열매를 통해 자신의 모습과 운명을 분명히 드러낸다. 믿음은 구원의 사실적 근거가 되지만, 행위는 믿음을 측정하는 척도가 된다.

 

2) 오늘의 본문에서 또 우리가 깨달아야 할 중요한 사실을 무엇인가? 하나님을 섬기는 행위, 즉 예배는 인간을 섬기는 행위, 즉 사랑과 뗄 수 없다는 사실이요, 예수님은 단지 성전 안에만 존재하시지 않고 세상 속에서, 특히 고난을 당하는 자들 속에서, 그들과 함께 고난을 당하는 모습으로 존재하신다는 사실이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마 25:40)는 말씀은 바로 이 점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여기서 예수님은 자신을 지극히 작은 자들과 동일시하신다. 그러므로 바로 지극히 작은 자를 섬긴 자는 곧 예수님을 섬긴 자로 인정을 받고 구원을 받지만, 그렇지 않는 자들을 예수님을 박대한 자로 인정을 받고 멸망을 받는다. 그래서 초대교회의 교부 터툴리안(Tertullian)도 "너희가 도움이 필요한 형제들을 볼 때, 그것은 주님을 보는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우리는 어디서나, 모든 사람들 속에서 예수님을 만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특히  가난한 자, 연약한 자, 병든 자, 박해받는 자, 쓰러진 자 속에서 예수님을 가장 분명히 만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을 예수님처럼 대하여야 한다. 그들이 곧 예수님은 아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자신과 동일한 자로 인정하셨다. 그러므로 그들을 돕고 섬기는 행위도 교회당 안의 예배 못지 않게 거룩한 예배라고 할 수 있다. 아니 교회당 안에서만 하나님에게 예배를 드리고 세상 속에서는 어려운 사람을 돕는 생활 예배를 드리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에게도 진정한 예배를 드렸다고 할 수 없다. 교회당 예배와 생활 예배는 별 개가 아니다. 그렇다고 생활 속에서 이웃을 섬기는 예배를 드리면, 교회당 안에서는 굳이 예배를 드릴 필요가 없다고 말해서도 안 된다. 하나님을 신령과 진정으로 섬기는 자만이 세상 속에서도 참으로 이웃을 섬길 수 있다. 그러므로 교회당 안의 예배를 소홀히 여겨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참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이웃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을 예배하고 사랑하노라!" 말하면서도, 이웃을 섬기고 사랑하지 않는 자는 참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라고 할 수 없다.

"어려운 사람들을 단지 어려운 사람으로만 생각했느냐, 아니면 그들을 참으로 예수님으로 생각했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참으로 중요한 것은 그들을 도움으로써 결국 예수님을 섬긴다는 사실이요, 그들을 외면함으로써 결국 예수님을 외면한다는 사실이다. 그들과 어떤 관계를 맺었는지, 그들을 참으로 사랑했는지에 따라서 우리는 심판을 받는다. 하나님은 마지막 심판 때에, 아니 우리가 임종할 때에 바로 사랑의 열매를 물으실 것이다. 신앙의 정도와 직분의 종류, 교리에 대한 지식을 물으시지 않고, 사랑의 행위를 물으실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참으로 사랑이 충만한 곳이요, 그래서 오직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사랑이 없다면, 하나님을 볼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요일 4: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