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선한 사마리아인

 

눅 10:25-37

2003년 5월 14일, 현풍제일교회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 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1) 지난 시간에 우리는 '양과 염소의 비유'를 통해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것은 바로 예수님을 돕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점을 배웠으며, 우리가 어려운 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맺었는지, 즉 그들을 참으로 사랑했는지에 따라서 심판을 받는다는 점을 배웠다. 그런데 이 비유에서는 양으로 분류된 사람들이 왜 어려운 사람들을 도왔는지, 그리고 염소로 분류된 사람들이 왜 어려운 사람들을 돕지 않았는지를 분명히 알 수 없다. 단지 우리가 알 수 있는 점은, 한 부류의 사람들은 사랑을 통해 믿음의 열매를 맺은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이었다는 사실과 다른 부류의 사람들은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하면서 사랑을 행하지 않은 형식적 그리스도인들 혹은 가식적인 종교인들이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오늘 우리가 함께 읽었던 본문, 이른바 '선한 사마리인의 비유'로 잘 알려진 이 본문에서 비로소 우리는 왜 종교인들이 어려운 사람들을 돕지 않았는지를 어느 정도, 아니 분명히 깨닫게 된다. 본문은 제사장과 레위인이 강도의 습격을 받아 길가에 쓰려져 죽어 가는 사람을 보고도 돕지 않고, "피하여 지나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당시 가장 거룩한 일에 종사하는 제사장과 레위인이 어려운 사람을 돕지 않았고, 이들이 가장 멸시하는 사마리아인이 그를 도왔다는 사실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하지만 이 본문은 단지 예수님이 그 당시에 일어날 법한 사건을 비유 이야기로 꾸미셨다기보다는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에 관해 말하시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왜 상식에 어긋나는, 아니 상식을 뒤집는 일이 일어났는가? 왜 사랑을 가장 열심히 실천해야 할 거룩한 종교인들은 긴급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피하여 지나갔고, 평신도, 아니 세상 사람들은 위험하고 바쁜 상황에서도 끝까지 그를 도왔는가? 이런 일은 사실 오늘날에도 다반사로 일어난다.

본문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우리가 본문을 통해 추측할 수 있는 분명한 이유를 볼 수 있다. 제사장과 레위인의 입장에 서서, 그들이 내세울 만한 충분한 이유를 들어보기로 하자. 구제와 사회봉사는 종교의 임무가 아니라 세상 혹은 국가의 임무이다. 종교와 정치, 교회와 세상은 분리되어 있다. 이것을 우리는 이른바 '정교분리(政敎分離)의 원리'라고 말한다. 이런 원리를 내세워 사회 봉사를 부차적인 일, 혹은 소홀히 여겨도 될 일로 생각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오늘날에도 상당히 많다. 하지만 엄격히 말해서, 그리스도인은 결코 두 세계를 왔다 갔다 하면서 살아가는 이중국적자가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이 세상 한 가운데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 안에서만이 아니라 바로 이 세상 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뜻, 즉 정의와 사랑을 구하고 실천해야 한다. 정교분리의 원리를 주장하는 사람들도 뒤로는 정부와 은밀히 타협하고 거래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런 분명한 근거를 들이대면, 아마도 제사장과 레위인은 할 말을 잃을 것이라고 여러분은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잘못한 일이 현장에서 들통난 사람들조차도 자신의 잘못을 쉽게 인정하지 않는 법이다. 정치인들만이 아니라 심지어 종교인들도 잘못이 명백히 드러날 때까지 계속 시치미를 떼거나 거짓말을 하는 경우를 우리는 종종 보아왔다. 더욱이 "처녀가 애를 낳아도 할 말이 있다"는 우리의 속담처럼 이 두 사람에게도 분명한 핑계거리가 있었을 것이다. 제사장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나는 지금 제사를 드리러 가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해야 한다. 그런데 제사장이 피와 시체를 만지면, 부정을 타게 된다. 그렇게 되면, 나는 해가 질 때까지 성전 안에 들어가지 못한다(레 22:4-7). 나의 중요한 임무인 제사까지 망치면서 이 사람을 도울 수 없다. 레위인의 핑계거리도 이와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도 전적으로 성전에 속한 일만을 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구제는 내 소관이 아니다. 아마도 내가 아니더라고 누군가 이 사람을 도와줄 것이다.

그들의 입장에 서서 생각해 보면, 그들도 나름대로는 자신의 본분에 충실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제사와 성전 일을 구실로 내세워 죽어 가는 사람을 돕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일이다. 하나님은 제사보다 자비를 더 원하신다. 아니 하나님은 심지어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시지 않는다"(마 12:7)까지 말씀하신다. 불쌍한 사람을 돕는 것이 하나님에게 제사를 드리는 것보다 더 귀한 일이다. 아니 이웃을 사랑하는 일은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일을 핑계로 삼아 이웃을 섬기는 일을 무시하는 일은 바로 하나님의 일을 망치는 일이다.

하나님의 일이 하나님의 일을 망친다? 도대체 말이 되는가? 그러나 실제로 그런 일은 우리 주위에서도 다반사로 일어난다. 교회에서는 많은 헌금을 드리면서도 가난한 사람들, 부모 형제에게는 정말로 인색한 그리스도인들이 많다. 이처럼 하나님의 일을 핑계로 삼아 하나님의 일을 회피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이보다 더 큰 문제는 하나님의 일을 명분으로 삼아 하나님의 일을 망치는 일이다. 중세기에는 교회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무고한 수많은 여인들을 마녀로 몰아 죽였고, 교회의 이름으로 양심적인 사람을 무수히 죽였으며, 성경의 이름으로 진리를 수없이 억압했다. 부시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룩한 전쟁'이라는 명분으로 무고한 양민을 죽이는 '더러운 전쟁'을 벌렸다. 하나님이 전쟁을 원하시는가, 평화를 원하시는가? 칼은 칼을 부를 뿐이다. 평화는 오직 평화를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부시도 바로 하나님의 일을 핑계로 하나님의 일을 망친 사람들에 속한다.

2) 오늘의 본문에서 제사장과 레위인이 왜 중요한 하나님의 일을 행하지 않았는지를 알아보는 일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유대인이 멸시하고 이웃으로 삼기를 꺼리던 사마리아인이 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였는가를 알아보는 일이다. 본문을 보면, 사마리아인은 강도를 만난 사람을 보고 불쌍히 여겼다고 기록되어 있다. '불쌍히 여긴다'는 말은 남의 아픔이 나를 아프게 하며, 그래서 남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여긴다는 뜻이다. 남의 아픔과 내 아픔이 하나가 되어 서로 부둥켜안는다는 뜻이다. 사마리아인은 강도를 만나 귀한 재물을 빼앗기고 목숨까지 위태로울 정도로 만신창이가 된 사람을 불쌍히 여겨서, 위험을 무릅쓰고 그에게 가까이 갔다. 불쌍히 여기는 삶은 불쌍한 사람을 멀리서 동정하지 않고, 그에게 가까이 다가간다. 그리고 그가 도울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그를 진심을 돕는다.

사마리아인이라고 왜 적당한 핑계거리가 없었겠는가? 그는 종교적인 일에 종사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어려운 사람을 돕지 않은 이유를 종교적으로, 신학적으로 끌어댈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핑계가 없는 무덤은 없다"는 속담처럼 그에게도 왜 그럴듯한 핑계거리가 없겠는가? 내가 어려운 사람을 도울 처지가 되는가? 이 세상에서는 어쩔 수 없이 불행을 당하는 사람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가난한 사람은 나라님도 구제하지 못한다는 속담도 있듯이, 내가 무슨 용빼는 재주로 불행한 사람을 만날 때마다 그를 도울 수 있겠는가? 불행은 그의 운명이거나 그의 잘못이므로 그의 불행은 그가 스스로 감당해야 한다. 아니 이 세상은 최소한의 희생을 요구한다. 그리고 남을 도우려다 나까지 어려움에 처하는 것보다는 앞으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 더 좋다. 그리고 불행한 사람들 구제하는 제도와 법을 시급히 만드는 것이 더 현실적인 대책이다.

하지만 사마리아인에게 이런저런 핑계가 아무 소용이 없었다. 당장 중요한 것은 불행에 빠진 사람을 최대한 빨리 돕는 일이었다. 그는 한 사람의 생명을 그 무엇보다 소중하게 생각했다. 그를 향한 불타는 마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모든 장벽과 변명을 뛰어넘었다. 그래서 사마리아인은 불쌍한 사람에게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상처에 붓고 싸매 주었으며, 자기가 타고 온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정성을 다해 돌보아 주었다. 그리고 이튿날에 부득불 길을 떠나야 하므로, 주인에게 경비가 더 들면 자신이 돌아오는 길에 갚아줄 것이니 잘 돌보아 달라고 부탁하였다. 일시적인 동정과 일시적인 구제가 아니라 그의 힘이 미치는 데까지 끝까지 돌보아 주었다.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고 묻는 예수님의 질문에 율법사는 "자비를 베푼 자이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은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말하셨다. 이것이 본문의 핵심적인 결론이다. 우리도 이와 같이 해야 한다. 영생을 얻기 위해 단지 믿기만 해서는 안 되고, 믿음의 열매인 사랑을 행해야 한다. 우리가 사랑해야 할 이웃은 누군가? 오늘의 본문에서처럼 우리가 사랑해야 할 사람은 공간적으로는 멀리 떨어져 있지만 심리적으로는 우리와 가장 가까운 사람이 아니라, 공간적으로는 가장 가까이 있지만 심리적으로는 가장 멀리 있는 사람이다. 만약 내가 아주 싫어하는 사람, 아니 내 원수가 지금 고통에 빠져 있다면, 그를 불쌍히 여기고 도와야 한다. 우리가 그의 이웃이 됨으로써, 그가 또한 나의 이웃이 되고, 나의 친구가 되도록 해야 한다. 고통을 당하는 사람의 그 어떤 조건도 보지 말고, 즉각 도와야 한다.

오늘의 선한 사마리아인은 우리가 영원히 따라야 할 참된 사랑의 모범이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참으로 우리의 진정한 이웃이 아니신가? 예수님은 우리의 선한 친구가 되어 주셨다. 우리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여기시고, 우리의 고통을 친히 감당해 주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처럼 살아야 한다. 바로 여기에 영생의 길이 있다. 여기에 예수님의 진정한 제자가 되는 길이 있다. 예수님의 제자는 높은 종교적 직분이나 뛰어난 신학 지식을 가진 사람도 아니고, 신령한 은사를 소유하고 기적을 행하는 사람도 아니다. 세상 한 복판에서 나의 도움을 긴급히 필요로 하는 불쌍한 사람을 아무 조건도 없이 끝까지 돕는 사람이 바로 영생의 길이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이다. 이런 일을 하는 데 그 어떤 것도 중간에 끼여들어 방해를 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불쌍히 여기는 사람을 불쌍히 여기신다(마 5:7). 그가 바로 복이 있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