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어리석은 부자

 

눅 12:13-21

2003년 5월 21일, 현풍제일교회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업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또 비유로 저희에게 일러 가라사대,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1) 유산 분배를 둘러싸고 분쟁하던 형제가 예수님에게 나아와 해결책을 묻자, 예수님은 어리석은 부자를 비유로 들어 교훈을 주신다. 형제가 예수님에게 도움을 청했던 것은 유산의 공정한 분배였다. 하지만 예수님은 형제 사이의 유산 분쟁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신다. 그것은 바로 인간 마음에 깊이 도사리고 있는 탐욕의 문제이다. 사실 형제 사이의 유산 분배 문제도 결코 작은 문제는 아니다. 아주 사이가 좋던 형제들도 부모가 물려준 유산을 나누는 문제로 심각한 갈등과 분쟁에 휘말리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되며, 심지어는 형제 살인으로까지 사태가 악화하는 경우도 있다. 부모가 현명하게, 분쟁의 소지가 없도록 미리 재산을 잘 분배하는 것이 가장 바람한 일이다. 그렇게 하지 못한 경우, 혹은 그렇게 한 경우라도 유산 분쟁은 항상 일어날 소지가 있다. 왜 그런가? 유산을 공정하게 분배하는 것도 어렵지만, 설령 유산이 공정하게 분배되었다고 하더라도, 인간은 결코 자신의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설령 유산이 좀 불공정하게 분배되었다고 하더라도, 다른 형제가 이해하거나 양보하면 그만이다. 중국의 관포지교(管鮑之交)라는 고사가 있다. 관(管)과 포(鮑)라는 두 친구가 서로 동업을 하는데, 항상 한 친구가 더 많은 돈을 가져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친구는 늘 그 친구를 이해한다. 그 친구가 자기보다 더 가난하고 식구가 많으니, 오히려 그가 더 많이 가져가는 것을 다행하게 생각한다. 친구 사이에도 이런 아름다운 관계가 있는가 하면, 형제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매우 험악한 관계로 발전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왜 그런가? 형제를 이해하고 양보하려는 마음가짐이 없는 것도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이겠지만, 우리 속담에도 "남의 떡이 더 커 보인다"는 말이 있듯이, 나보다 다른 형제의 재산이 더 커 보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또 무엇인가? 물론 유산이 공정하게 이루어지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것은 한계를 모르는 인간의 탐욕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런 경우에는 공정한 재산 분배보다 탐욕을 다스리는 일이 더 중요한 일이 될 것이다 .

오늘의 본문에서도 예수님은 경제정의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인 인간의 탐욕을 지적하신다. "모든 탐심(탐욕)을 물리치라." 탐욕은 인간이 퇴치해야 할 고질적인 질병 중의 하나다. 그래서 십계명은 탐욕을 하나님이 금하시는 중요한 죄악의 하나로 지목한다.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출 20:17). 예언자 미가도 인간의 탐욕을 지적하며 나무란다. "밭들을 탐하여 빼앗고, 집들을 탐하여 취하니, 그들이 사람과 그 집사람과 그 산업을 학대하도다"(미 2:2). 바울도 하나님을 떠난 자들이 범하는 갖가지 추악한 죄악들 가운데서 탐욕을 지적한다.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롬 1:28-29).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골 3:5). "너희도 이것을 정녕히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엡 5:5). 디모데도 돈을 사랑하는 것을 악의 뿌리라고 말한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10).  

이처럼 성경은 한결같이 탐욕을 혹독하게 나무란다. 탐욕이란 무엇인가? 필요한 것을 충분히 가진 사람이 더 많이 가지려고 하는 욕망이다. 필요한 만큼 갖는 것이 아니라 필요 이상을 과도하게 쌓아두려는 욕망이다. 왜 사람은 필요 이상의 재물을 쌓아두려고 하는가? 그것은 오늘의 본문에도 나오듯이, 많은 재물은 안전과 향락을 제공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많은 재물은 생계의 걱정을 벗어나게 하고, 인생을 마음껏 즐길 수 있게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보면, 이것은 정말 맞는 말이다. 여유있게 살기 위해서는, 자유롭게 살기 위해서는, 그리고 인생을 즐기면서 살기 위해서는 많은 재물이 필요하다.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을 보면, 우리도 부러워서 못 견딘다. 우리도 그런 사람이 되었으면 참으로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더 열심히 일하게 되기도 하고, 때로는 허황한 줄 알면서도 주식이나 복권, 투기 등에 손을 댄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사람을 어떻게 보시는가? 오늘의 본문에서 예수니은 그런 사람을 한 마디로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평하신다. 왜 어리석은가? 많은 재물이 생명을 보장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생명은 재물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손안에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눅 12:15). 그리고 재물은 그날그날, 즉 일용할 것을 위해서만 있기 때문이요, 내일에도 내가 살아 있을 줄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의 말씀은 재물을 쌓아두는 부자의 어리석음을 통렬하게 지적한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유대인의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오늘 저녁에 먹을 빵이 있으면서도 내일 아침에 먹을 빵을 걱정하는 것을 어리석은 일이다. 왜냐하면 내일 내가 살아 있을 지를 전혀 모르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내일 살아 있지 못하다면, 내일을 위한 오늘의 걱정은 부질없는 셈이다."

하지만 대개의 사람들은 천년만년 살 것처럼 살아가고 있다. 아니 천년만년은 못 산다고 하더라고, 오늘밤에는 죽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건강하게 보이던 사람이 하루밤 사이에 죽은 경우를 많이 보았다. 심지어 장례식장에 가는 길에, 혹은 장례식장에서 돌아오는 길에 교통사고로 죽는 사람들도 보았다. 그래도 인간은 미리 많이 쌓아놓지 않으면, 불안해한다. 설령 내일 죽는 한이 있더라도, 지금 많은 재물을 쌓아 놓아야 마음이 든든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 생각도 어리석기는 마찬가지다. 왜 그런가? 인간의 생명을 주장하는 것이 재물이 아니라 하나님임을 모르기 때문이다. 생명을 창조하시고 보존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내일 전혀 쓰지 못할 지도 모를 재물을 열심히 모은다. 그렇게 해야만 안심이 된다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동물들은 주어진 것으로 먹고산다. 그때그때 공급되는 음식으로 생명을 지탱한다. 하지만 미리 저장하는 습관을 가진 동물들도 없지는 않다. 다람쥐와 개미, 꿀벌 등이 그런 동물이다. 사람도 저장하기 좋아하는 동물이라면, 결국 사람의 수준은 이런 동물과 수준과 같다는 말인가? 여하튼 개미를 제외하면, 다른 동물들의 저장은 대개 어리석은 일에 속한다고 한다. 다람쥐는 저장한 장소를 잘 잊어버리기 때문에 저장한 대부분의 음식은 썩어버린다고 한다. 꿀벌이 저장하는 꿀도 대개 다른 동물이나 사람에게 빼앗긴다. 인간이 저장한 것도 대개 그 자신의 것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전쟁과 도둑, 재해 등으로 하루아침에 재산을 날리는 사람들을 많이 본다. 설령 죽을 때까지 재물을 꼭꼭 쥐고 있어도, 대부분을 쓰지 못하고 죽는다. 재물이 생명을 조금 여유있게 하고, 즐겁게 하고, 건강하게 하고, 그래서 생명을 조금은 연장할 수 있겠지만, 재물로 생명을 맞바꿀 수는 없다. 더욱이 재물로 생명을 살 수도 없다. 그렇다면 생명의 안정과 향락을 위해 재물을 쌓아두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2) 그렇다면 우리는 매일매일 번 것을 매일매일 다 쓰면서 살아야 하는가? 오늘 번 것을 오늘 흥청망청 쓰면서 살아야 하는가? "내일 죽을 지도 모르니, 오늘 다 쓰고 보자" 하며, 있는 재산을 다 탕진해야 하는가? 아니다. 필요한 것 외에는 창고와 통장에 쌓지 말고 하늘에 쌓아야 한다(눅 12:33). 재물을 어떻게 하늘에 쌓을 수가 있는가? 그 말은 바로 "자선을 베풀라"(눅 12:33)는 말이다. "가난한 이웃, 꼭 필요한 이웃에게 나누어라"는 말이다.

최근에 한국교계에서는 "기독교인이 더러운 부자가 되어서는 안 되지만, 깨끗한 부자는 되어야 한다"는 책을 쓴 어떤 목사의 견해를 둘러싸고 격렬한 논쟁이 일어난 적이 있다. 물론 더러운 부자보다는 깨끗한 부자가 더 바람직한 것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더러운 부자든 깨끗한 부자든, 예수님은 우리에게 "부자가 되라"고 말하신 적은 결코 없다. 오히려 예수님은 부자가 얼마나 위험한지를 심각하게 경고하셨다. 부자는 하나님보다 재물을 더 의지한다. 아니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다. 그에게 재물은 일종의 하나님, 우상이다. 그래서 그는 영생과 안전이 재물에 있는 줄로 착각한다. 부자는 가난한 자의 아픔을 모른다. 더욱이 부자는 대개 가난한 자에게 돌아갈 몫을 빼앗는 자이다. 아니 부자는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는 자다. 그러므로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는 약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기보다 더 어렵다.

그렇다면 기독교인은 깨끗한 부자도 되어서는 안 된다. 행여 많은 재물이 생기게 되면, 그것을 즉시 하늘에 쌓아야 한다. 즉 이를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영원히 낡아지지 않는 주머니에 재물을 쌓는 길이요, 도둑과 좀이 전혀 들지 않는 든든한 창고에 재물을 쌓는 길이다. 하나님은 그 재물의 가치를 인정하시고, 갚아주신다. 하나님은 그에게 이 세상에서는 비교할 수 없는, 이 세상에서는 결코 발견할 수 없는 하나님의 나라를 주실 것이다(눅 12:32). 그야말로 진정 복있는 자요, 진정 평안과 희락을 누리는 자요, 진정한 부자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재물로 부자가 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에 대하여 부자가 되려고 애쓰자. 탐욕을 멀리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나의 모든 것을 기꺼이 나누는 자가 되자.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공의를 구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이 언제나 쓸 것을 주시기 때문에 그는 언제나 부자로 살아 갈 것이다.

예수님은 부자 청년에게 "너희 재물을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지만, 그는 재산이 많은 고로 근심하여 되돌아갔다고 한다. 하지만 성 프랜시스는 이 말을 듣고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많은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고, 일평생 청빈한 삶을 살았다고 한다. 그렇다고 그는 굶어죽지 않았으며, 비참하게 살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는 가난한 사람들의 친구로서 그들을 행복하게 해 주었고, 예수님을 진지하게 따르려고 하는 자들의 훌륭한 모범이 되었다. 그러자 새와 다람쥐도 그의 친구가 되었다고 한다. 그는 가난하지만 진정 부유한 삶을 살았다. 하나님은 우리가 거지가 되는 것도 원치 않으시지만, 부자가 되는 것도 원치 않으신다. 부자가 된다면, 오직 하나님에 대해서만 부자인 자, 즉 자신의 재물을 이웃과 나누면서 영생을 소유하는 자가 되길 원하신다. 돈과 재물을 하나님처럼, 아니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우리는 예수님이 명하신 길을 따름으로써, 즉 서로 사랑함으로써 우리가 예수님의 참 제자임을 보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