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부자와 거지 나사로

 

눅 16:19-31

2003년 6월 18일, 현풍제일교회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는데, 나사로라 이름한 한 거지가 헌데를 앓으며 그 부자의 대문에 누워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불러 가로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아브라함이 가로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이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 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가로되 그러면 구하노니,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아브라함이 가로되,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가로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1) 우리는 지금까지 계속 비유를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배워가고 있다. 비록 아주 늦은 감이 있지만, 오늘 여러분에게 비유가 무엇인지, 비유를 사용하는 목적이 무엇인지를  학문적으로 조금 설명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특히 오늘의 본문과 관련하여 비유에 대한 상당한 오해가 널리 퍼져 있고, 그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도 상당한 오해가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비유는 시대와 공간을 초월하여 사람들이 가장 즐겨 사용하는 문학의 한 형태(장르)이다. 그런데 비유는 어떤 사실적인 이야기 혹은 가상적인 이야기에 빗대어서 교훈을 주려고 하는 데 목적이 있다. 다시 말하면, 비유는 이를 통해 분명한 교훈을 전달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지, 어떤 상세한 정보를 주려는 데 목적이 있지 않다.

우리 나라 사람들도 예로부터 비유를 상당히 많이 만들어왔다. 그 중에 아주 흔한 이야기를 하나 들자면, '곶감과 호랑이' 이야기가 있다. 어느 깊은 두메 산골의 작은 초가집에 부모가 아무리 달래도 울음을 그치지 않는 아이가 있었다. 호랑이가 온다고 해도 울음을 그치지 않던 아이가 곶감을 준다니까 울음을 뚝 그쳤고, 때마침 집 앞을 서성거리던 호랑이가 곶감 이야기를 듣고는 곶감이 자기보다 더 힘센 놈인 줄로 착각하고 도망을 갔더라고 하는 줄거리가 주된 내용이다.

이 이야기를 들은 여러분은 무슨 깨달음을 얻었으며, 여러분의 생각과 태도에 무슨 변화가 일어났는가? "옛날에 실제로 이런 일이 있었구나!"하는 정보를 얻었는가? 아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누가 지어낸 허황한 이야기에 불과하다. 아니면 "호랑이는 실제로 곶감을 무서워하니까, 위험한 산골을 지나갈 때에는 반드시 곶감을 지참해야지"라는 결심을 하게 되었는가? 그것도 아니다. 실제로 호랑이는 곶감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이도 저도 아니면, "만약 전체적 맥락 혹은 전후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면, 우리도 호랑이처럼 어리석게 착각하기 매우 쉽다"는 진리를 깨달았는가? 이것도 분명히 이야기가 전달하고 하는 교훈의 핵심이 아니다. 이야기의 핵심과 목적은 우는 아이를 달래는 방법으로는 무서운 협박보다는 달콤한 먹이가 훨씬 더 낫다는 교훈을 주는 데 있다. 폭넓게 생각하자면, 채찍보다는 사랑이 훨씬 더 교육적이라는 교훈이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도 분명히 위와 같이 오해될 가능성이 많고, 그래서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오해하고 있다. '나사로'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실제로 있었을 법하다. 그리고 예나 지금이나 이기적인 부자도 많이 있고, 부자 집 대문 앞에서 걸식하는 사람도 많이 있다. 하지만 이것은 실제로 일어난 이야기가 아니다. 이런 이야기는 예수님 당시에 근동 지방에 유사한 형태로 널리 퍼져 있던 민담 혹은 전설의 하나다. 예수님은 그 당시의 청중에게 아주 중요한 교훈을 주려고 이 이야기를 비유로 끌어오셨다. 우리는 이 비유의 목적 혹은 초점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이 비유는 현세와 내세에 관한 상세한 정보를 주려고 하기보다는 중요한 결단을 촉구한다.

만약 여러분이 오늘의 비유에서 "인간은 죽으면 곧바로 천국이 아니면 지옥으로 들어간다"는 정보를 얻었다고 생각한다면, 여러분은 본문의 의도와 핵심을 상당히 벗어나게 된다. 실로 유감스럽게도, 어쩌면 아니 다행스럽게도 예수님은 사후의 세계에 관해 상세한 정보를 주신 적이 없다. 더욱이 예수님은 사후의 세계를 '천국'이라고 부르신 적이 한번도 없다. 우편의 십자가에 달린 강도에게 예수님이 약속하신 '낙원'은 부활 이후의 세계를 의미하거나, 베드로전서 3장 19절에 기록된 '음부'(죽은 영혼이 머무는 옥)를 의미한다. 오히려 예수님은 살아 있는 자들이 받아들여야 하고 경험해야 할 현세적 천국을 더 자주 말하셨다. 죽은 자를 향해서 예수님은  "천국이나 지옥에 갔다"라고 말하시지 않고 "잠잔다"고 표현하셨다. 물론 그리스도 안에서 산 자와 죽은 자는 불완전하나마 천국의 복을 누리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진정한 천국은 부활 후에야 가능하다.

그리고 "부자는 무조건 지옥에 가고, 거지는 무조건 천국에 간다"고 생각하는 것도 상당한 오해일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선한 일을 많이 행한 부자들 혹은 하나님을 잘 섬긴 부자들은 참으로 억울해 할 것이다. 그리고 단지 거지로 살았다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죽어서 천국에 가는 사람들은 참으로 불공평한 횡재를 한 셈이 된다. 물론 예수님은 부자를 향해서는 "부자가 천국에 가기 매우 어렵다"(마 19:23)고 분명히 말하신 적이 있다. 낙타가 바늘구멍을 들어갈 수 없듯이,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는 어려운 게 아니라 실제로 불가능하다. 그리고 "가난한 자는 복이 있으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눅 6:20)라는 예수의 말은 가난한 자는 천국에 무조건, 자동적으로 들어간다는 말로 오해해서도 안 될 것이다. 천국을 소유할 수 있는 자는 실제적인 가난 속에서 하나님의 공의를 갈구하는, 그래서 마음까지도 가난한(마 5:3) 자라고 할 수 있다. 오늘의 비유에는 '나사로'가 하나님을 잘 믿었다는 기록은 없지만, "하나님이 그를 돕는다"는 뜻을 의미하는 나사로의 이름은 그가 경건한 자였음을 암시한다.     

천국에 가는 거지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고, 지옥에 가는 부자는 불꽃 가운데서 목이 타는 고통을 당한다는 말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도 상당한 오해를 낳는다. 왜 천국에서는 하나님의 품에 안기지 않고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는가? 그리고 몸이 없는 영혼이 뜨거운 불 속에서 혀가 타는 고통을 당한다는 말도 우습지 않은가? 지옥에 있는 자가 천국에 있는 자와 대화하고 도움을 요청한다는 것은 더욱 우습지 않은가? 그리고 아브라함은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날 수 없다"고 말하지 않고, 비록 죽은 자가 살아나서 부자의 아들에게 가서 말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고 말하는가? 마치 죽은 자가 살아나서 이승으로 되돌아 올 수 있는 듯한 느낌을 풍기지 않는가? 이런 이유로 그리스도인들 중에서도 '윤회' 혹은 '환생'을 믿는 자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본문의 말 그대로 이해하면, 그럴 듯하지 않은가?  오늘의 비유는 이런 상세한 정보를 주기 위해 기록된 것이 아니다. 만약 여러분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앞에서 말한 것처럼 '곶감과 호랑이'가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라거나, 호랑이가 실제로 곶감을 무서워한다거나, 상황을 제대로 파악해야 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이야기의 의도와 목적을 착각하고 만다.

 

2) 오늘의 비유는 다음과 같은 점을 말한다. 오늘의 비유는 물질적 성공이 반드시 의로움의 표시가 아니며, 가난이 반드시 악함의 표시가 아님을 말한다. 오늘의 비유는 무엇보다도 부자를 향해 경고와 충격을 준다. 부자는 화려한 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잔치를 즐기면서도 가난한 사람을 전혀 돌보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율법을 무시하였다. 신명기는 이스라엘 사람 중에 가난한 자가 없어야 한다고 말한다.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만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명령을 다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유업으로 주신 땅에서 네가 정녕 복을 받으리니,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신 15:4).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자는 의로운 사람이다(잠 11:23-24, 21:26, 29:7). 친절함으로(잠 14:31), 빌려줌으로(잠 19:17), 자유롭게 해줌으로(잠 11:25, 21:26) 가난하고 병든 자들을 돕는 부자는 선한 사람이다. 그래서 어떤 랍비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자선을 거절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자선을 거절하는 사람은 우상숭배자와 같다. 그는 하늘의 짐을 벗어 던진 자이다. 이것은 그가 짐을 질 수 없는 병자라는 의미이다." 오늘의 비유에 나오는 거지는 식탁에서 땅에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주어먹으며 겨우 생명을 유지할 정도로, 그리고 부자 집의 개가 그의 상처를 핥을 정도로 비참한 생활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자는 그를 전혀 돌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실로 불의한 자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비유의 핵심 혹은 초점, 즉 교훈은 다음과 같은 점에 있다. 만약 부자가 가난한 자를 계속 방치하고 외면하는 불의를 행한다면, 언젠가는 반드시 큰 심판을 받을 것이다. 오늘의 본문에는 심판이 죽은 후에 비로소 일어나는 것을 설명되어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심판은 단지 죽은 후에만 일어나지 않는다. 만약 그렇다면,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죽은 자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이 죽을 때까지 기다리셔서 그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심판하시는, 어떻게 보면 상당히 너그럽고, 어떻게 보면 상당히 게으르고, 어떻게 보면 상당해 무책임한 하나님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 비유는 불의하고 불공평한 현실을 고치려는 동기를 주기보다는 오히려 불의한 현실을 두둔할 것이다. 왜냐하면 "불의한 세상은 결국 죽은 후에야 비로소 뒤집어지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는 현실을 묵묵히 참고 살자"는 식의 체념과 방관을 조장하기 때문이다. 이런 태도 때문에 민중의 희망이 되어야 할 기독교가 민중의 아편이라는 혹독한 비판을 받아야 했다. 세상의 부패를 방지하는 '세상의 소금'이 되어야 할 교회가 세상을 썩게 만드는 '세상의 설탕'이 되었다는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이런 태도는 본문의 의도와 완전히 어긋난다.

본문이 말하려고 하는 내용은 그와는 완전히 정반대이다. 본문은 부자의 교만과 무책임을 지적하고 언젠가 반드시 닥쳐올 운명의 뒤바뀜을 예고함으로써, 부자의 회개를 강하게 촉구한다. 그리함으로써 부자가 이 땅에서 재물을 올바로 사용하기를, 이 땅에 더 이상 가난한 사람이 없기를, 부자와 가난한 자의 엄청난 차이와 차별이 사라지기를 촉구한다. 이런 의미에서 야고보는 탐욕스러운 부자를 향해 다음과 같이 경고한다.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을 인하여 울고 통곡하라.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 먹었으며,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 ... 너희가 땅에서 사치하고 연락하여, 도살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지게 하였도다"(약 5:1-5). 그리고 디모데도 다음과 같이 부자를 훈계한다.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딤전 6:7-10, 17-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