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과부와 재판관

 

눅 18:1-8

2003년 7월 2일, 현풍제일교회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 하여 가라사대,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관이 있는데,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주께서 또 가라사대, 불의한 재판관의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1) 오늘의 본문 첫머리는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가르치기 위해 과부와 재판관의 비유를 든다고 말한다. 여기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향한 지속적이고 끈질긴 기도의 필요성을 가르치시고 있다. 하지만 8절의 구절 -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 을 보면, 이 본문은 단순히 개인적인 기도를 넘어선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본문은 하나님의 나라가 오기까지 끈질기게 기도할 것을 가르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예수님의 재림이 도대체 언제 일어날 것인지에 대해 늘 의문을 갖게 되며, 그래서 재림을 의심하게 된다. 정말로 인자 예수님은 다시 오는가?  우리는 주기도문을 외울 때마다 하나님의 나라가 오기를 간절히 기도하지만, 지금까지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은 듯이 보인다.

제자들과 우리의 의심을 미리 염두에 둔 듯,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지속적으로 기도하라고 격려하신다. 이 비유는 우리에게 재림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가 오도록 계속 기도하라고 격려한다. 사람의 필요와 하나님의 율법에 대해 무관심한 불의한 재판관도 과부의 끈질긴 간청을 들어주었다. 하물며 의로운 재판관인 하나님이 어찌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오기를 간절히 기도하라고 가르치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신실하시기 때문에 당신의 백성을 변호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도하는 사람만이 낙망하지 않으며, 계속해서 기도하는 사람만이 신앙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2) 신앙 생활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무엇인가? 사람마다 다르게 말할 것이다. 원수에게 보복하지 않고 그를 사랑하는 것이 가장 어렵다. 거짓말을 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가장 어렵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가장 어렵다. 약속을 지키는 것이 가장 어렵다. 믿음대로 행하는 것이 가장 어렵다. 하지만 나는 기도하는 것, 아니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이 가장 어렵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흔히 기도가 영적인 호흡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호흡을 쉬는 경우는 전혀 없지만, 기도를 쉬는 경우는 많다. 물론 호흡이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지듯, 기도도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질 수도 있다. 길을 가다가, 바쁜 일을 하는 도중에 "주여"하고 짧게 기도할 수도 있고,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서도 마음으로는 뭔가를 간절히 빌 수는 있다.

하지만 의식적인 기도, 더욱이 끊임없는 기도는 정말 힘들다. 그런 면에서 기도는 하나의 투쟁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기도는 노동이라고 말했지만, 사실 기도는 노동보다 더 고된 일, 즉 하나의 투쟁이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과부는 단순히 노동하거나 애걸하는 것을 넘어서 투쟁하고 있다.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지도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재판관에게 소원을 아뢰는 행위는 처음부터 집요하고 대담한 공격적인 태도를 요한다. 불의하고 교만한 재판관이 한낱 비천하고 연약한 여인의 소원을 들어줄 리가 있겠는가? 더욱이 과부는 아무런 뇌물도 제공하지 않았다. 더욱이 재판관은 과부의 소원을 들어주어 할 아무런 의무감도 가지지 않았고, 과부에게 그 어떤 빚도 지지 않았다. 하지만 과부가 하도 귀찮게 졸라대니, 재판관은 결국 소원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가 번거로우니까, 우리가 졸라대는 것이 괴로우니까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지 않는다. 만약 그렇게 생각한다면, 이것은 이교도의 생각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고 하셨다(마 6:7). 여기서 "중언부언하지 말라"고 하는 말은 아람어로 옮기었을 때는 "내용 없는 공허한 말을 하지 말라"라는 뜻이 되고, 그리스어로 옮기면 "더듬더듬, 어물어물하지 말라"라고 하는 뜻이다. 이방인의 기도처럼 수다스럽게 많은 말로 기도하지 말라는 뜻이다. 이방인들은 고대의 수많은 신들의 이름을 다 들먹이거나 마술적인 주문을 많이 외어야 신들에게 영향을 미쳐서 효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세네카(Seneca)도 "많은 말로 기도하는 것은 신들을 지치게 한다"라고 비판한 적이 있다. 이방인들의 수다스러운 기도는 결국 응답을 받을 수 없다는 불신앙에서 나온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권능과 자비를 신뢰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모든 기도와 이성을 뛰어 넘어서 자신의 자녀를 돌보신다는 것을 확신한다. 그러므로 기꺼이 주시고자 하시고 미리 우리의 사정을 아시는 하나님에게 확신을 가지고 기도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가 구하기 전에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미리 아시는 하나님에게 기도할 필요가 왜 있는가? 하나님은 우리의 사정을 미리 다 아시니까, 우리가 기도할 필요가 전혀 없지 않은가? 자비롭고 지혜로운 엄마가 자식의 모든 것을 다 소상히 배려하는 것처럼 하나님도 우리의 사정을 다 소상히 헤아려 보살펴 주시니까, 우리는 기도할 필요가 전혀 없지 않은가? 하지만 "보채는 아기에게 엄마가 젖을 물린다"는 속담이 있듯이, 하나님도 우리의 간절한 기도에 응답하신다. 하나님은 자동기계가 아니라 인격적인 분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의 소원에 응답하기를 기뻐하신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를 원하듯이, 하나님도 우리의 기도에 응하기를 기뻐하신다.

하나님이 간절하고 지속적인 기도에 응답하신다는 사실은 다른 비유를 통해서도 설명되고 있다. "너희 중에 누가 벗이 있는데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빌리라. 내 벗이 여행 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 하면, 저가 안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소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됨을 인하여서는 일어나 주지 아니할찌라도, 그 강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소용대로 주리라.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아비 된 자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면,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면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눅 11:5-13)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라." 이 말은 지속적인 기도를 요청하는 말처럼 들린다. 하지만 이 말은 점점 더 강해지는 기도처럼 들린다. 구하는 사람은 찾으러 나선다. 그리고 찾으러 나선 사람은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서, 이 문 저 문을 두드린다. 처음에는 문을 약하게 두드리다가, 그래도 주인의 반응이 없으면 더 세게 두드린다. "여보세요! 아무도 없어요?" "나의 억울한 사정을 들어보세요!" "혹시 당신은 내 소원을 들어줄 분이 아닌가요?" 사정이 이렇게 되면, 기도는 하나의 투쟁이 된다. 어떤 수도사는 "기도는 노동이고 노동은 기도이다"라고 말하였다. 하지만 나는 "기도는 투쟁이고, 투쟁은 기도이다"라고 말하고 싶다.

얍복 강에서 하나님의 사람, 천사와 씨름한 야곱을 보라. 겟세마네에서 피땀을 흘리며 기도하신 예수님을 보라. 이것은 바로 간절하고 지속적인 기도의 훌륭한 모범이다. 긴급한 기도일수록 우리는 더욱 긴급하고 간절하고 대담하게 기도해야 한다. 집요한 기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꺾고 하나님을 우리의 뜻에 굴복시킬 수는 없다. 하지만 집요한 기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더욱 깨달을 수 있고, 그 뜻을 더 효과적으로 이룰 수는 있다.  그리고 강청 기도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을 귀찮게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강청 기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에 긴급히 귀를 기울이도록 할 수는 있고, 그래서 하나님을 늘 우리편에 묶어 둘 수는 있다.

이리하여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과의 끊임없는 만남과 대화의 수단이 되고, 그래서 어떤 환경에서도 우리는 낙망하지 않을 수 있다. 설령 세상 종말까지 우리의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설령 하나님의 나라가 한없이 늦게 오더라도 우리는 실망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가장 큰 선물인 성령을 얻었기 때문이다. 성령은 곧 하나님이다. 하나님보다 더 큰 분이 어디 있으며, 하나님보다 더 큰 선물은 어디 있는가? 만약 하나님이 우리와 늘 함께 하신다면, 누가 우리를 감히 대적하겠는가? 만약 하나님이 우리와 늘 함께 하신다면, 물불이 두렵겠는가, 창검이 두렵겠는가? 억울한 고난 때문에 하나님에게 강하게 대들고 하나님과 투쟁했던 욥은 살아 계신 하나님을 이전보다 더 생생히 만났으며, 결국 하나님이 그의 구원자가 되심을 확신했다. 그 이후에 욥이 얻은 더 큰 재물과 자손의 축복은 사족(蛇足), 아니 '새 발의 피'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그는 이제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불굴의 신앙을 획득했기 때문이다. 우리도 욥과 예수님처럼, 그리고 바울의 권면처럼 쉬지 말고 기도하자. 기도는 환난에 대적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요, 세상을 향한 가장 강력한 투쟁이다. 기도는 두 손을 맞잡고, 그리고 하나님의 손을 붙잡고 환난을 이기는 가장 강력한 무기요, 세상으로 진격하는 가장 강력한 투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