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두 기도자

 

눅 18:9-14

2003년 7월 9일, 현풍제일교회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과부와 재판관'의 비유처럼 오늘의 본문도 '바리새인과 세리'를 대조하면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풀어준다. '과부와 재판관'의 비유가 지속적인 기도의 필요성을 가르쳐 주었다면, 오늘의 본문 올바른 기도 태도를 가르쳐준다. 오늘의 본문에서 우리는 세 가지 중요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1) 첫째, 기도는 정직해야 한다. 바리새인은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라고 기도하였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기도하였다. 율법적으로 보면, 분명히 바리새인은 의로운 사람이고, 세리는 의롭지 못한 사람이다. 행위로 볼 때, 분명히 바리새인은 흠잡을 데가 없을 사람일뿐만 아니라 경건한 사람이다. 표면상으로는 그는 분명히 가난한 사람을 착취하지 않았고, 도덕적인 악행을 저지르지 않았으며, 성적인 외도를 범하지 않았다. 더욱이 그는 율법이 명하는 대로  이틀에 한 번씩 금식하고, 수입의 십분의 일을 정확히 하나님에게 바쳤다. 그와는 달리 세리는 유대 사회에서 가장 욕을 먹는 직업에 종사한 사람이었다. 그는 로마인의 하수인으로서 동족에게 많은 세금을 뜯어내어 중간 이득을 착복하였다. 이 밖에도 그는 율법을 수없이 범하였다. 돈이 오가는 곳에 음란이 성행하는 것은 만고의 법칙이다. 그는 실제로 그가 번 많은 돈으로 외도를 행했을 것이다. 이런 세리가 금식하거나 십일조를 제대로 바쳤을 리가 없다. 그러므로 율법적, 표면적, 외형적, 도덕적으로 볼 때, 바리새인은 그 당시에 가장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받아야 마땅한 사람이었고, 세리는 그 당시에 가장 비난을 받아야 마땅한 불의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감찰하신다.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만 보시지 않고 그 마음을 보신다. 간음하다가 붙잡혀 온 여인을 돌로 치려고 하던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셨다. 그랬더니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은 사람들이 모두 물러갔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하셨다(요 8:1-11). 율법적으로 보면, 분명히 여인은 간음을 범하였다. 하지만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 간음하지 않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예수님만이 아니라 유대교(탈무드)도  몸만이 아니라 시선과 마음으로도 혼인의 파기된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예수님은 완전함과 순수함을 요구하시며, 위선을 미워하신다. 예수님의 눈으로 볼 때, 바리새인도 죄인이기는 마찬가지다. 그의 마음도 온갖 음란을 가득하다. 그런데도 그는 마음을 숨기고 스스로 의롭다고 가장한다. 그는 정직하지 않다. 하지만 세리는 자신의 죄를 솔직히 고백하면서, 가슴을 치며 회개한다. "가슴을 친다"는 것은 자신의 불의를 뼈저리게 회개를 한다는 뜻도 되겠지만, 마음으로 지은 죄까지도 괴로워하며 진심으로 회개한다는 뜻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정직한 사람의 기도를 기뻐하시고, 그를 외롭게 여기신다. 성도는 하나님에 의해 의롭다고 인정을 받은 사람이지, 아직은 완전히 의로운 사람은 아니다. 하나님 앞에서 기도할 때, 우리는 우리의 모든 허물을 인정하는 솔직함, 정직함을 보여야 한다.

 

2) 첫째, 기도는 겸손해야 한다. 바리새인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을 믿고 자신의 행한 것과 행하지 않는 것을 의지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 앞에서 교만한 사람이다. 이와 달리 세리는 자신을 믿을 수 없음을 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나약한 처지를 인정한다. 그는 자신이 행한 것을 자랑하지 않고 오히려 부끄럽게 여긴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한없이 낮춘다. 그러므로 그는 겸손한 사람이다. 하나님은 바로 이런 사람을 불쌍히 여기시고, 의롭게 여기신다.

오늘의 본문에 이어 나오는 본문도 겸손을 가르친다. 어떤 사람들이 어린아이를 데리고 예수님에게 나오자, 제자들은 그들을 꾸짖는다. 하지만 예수님은 도리어 제자들을 꾸짖으신 후에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하신다(8:15-17). 여기서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 하나님에게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어린아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사람임을 예수님은 분명히 가르치신다.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질 것이다(18:14).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흩으신다(눅 1:51).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다(잠 16:18). 사람이 교만하면 낮아지게 되겠고, 마음이 겸손하면 영예를 얻는다(잠 29:23)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고,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신다(약 4:6).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고,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신다. 그러므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신다(벧전 5:5-6). 하나님은 공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자들을 찾으신다(미 6:8).

 

3) 기도 중에 남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 바리새인은 스스로 옳다고 여기면서 기도하고, 세리를 업신여긴다. 아니 그는 세리를 자신의 기준대로 판단하고, 심판한다. 이것도 영적인 교만이다. 판단하는 것은 하나님의 특권이지, 우리의 몫이 아니다.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고전 4:5). 기도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지 않고, 오직 자신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에 감사해야 한다. 믿음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지, 자신을 의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을 남과 비교하지도 않으며, 남을 자신보다 못하다고 업신여기거나 비판하지 않는다. 이것은 자신이 마치 하나님 입장에 서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영적인 교만이다.

선을 소유하였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우상을 섬기는 사람이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하나님의 선을 소유할 수도 없거니와 더욱이 독점할 수도 없다. 하나님의 은혜는 무한하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무한하다. 우리는 무한한 하나님의 은혜와 선하심 앞에서 언제나 빚진 자로 서 있을 따름이다. 우리는 남의 아픔과 허물을 위해서 기도할 수는 있을지언정, 감히 남을 비판할 자격이 없다. 더욱이 하나님의 선을 홀로 독점하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면서, 남을 비판하거나 비난할 수 없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따름이고, 자신의 허물을 볼 따름이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모두 같은 죄인이다.

설령 사람 앞에서 조금 더 의롭고 조금 더 불의한 사람이 있을지는 몰라도, 남의 불의가 나의 의로움을 입증하거나 보증하지 않는다. 더욱이 남을 비난하는 것이 나의 옳음을 증명하는 것도 아니다. 더욱이 남의 불의는 나의 책임이기도 하다. 우리는 남의 허물에 대해 무한한 책임 의식을 져야 한다. 만약 남이 착취한다면, 나도 일정한 부분 그의 착취에 기여하고 있다. 만약 남이 불의하다면, 나도 일정한 부분 그의 불의에 동참하고 있다. 만약 남이 음란하다면, 나도 일정한 부분 그의 음란에 동참하고 있다. 우리는 공동 운명체이다. 우리는 결코 홀로 죄를 짓지 않으며, 홀로 용서받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남의 허물이 눈에 보이면, 그것이 나의 허물 탓은 아닌지, 나도 그 허물에 동참하고 있지 않은지, 어떻게 하면 우리가 함께 우리의 허물을 함께 질 수 있고 해결할 수 있는지 고민하고 기도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니도 다음과 같이 기도하셨다. "우리가 우리에게 범한 죄를 사하여 주신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혹시 사람 앞에서는 나의 죄, 너의 죄, 우리의 죄가 선명하게 구분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애초부터 그런 것이 불가능하다. 하나님 앞에서는 나의 죄, 너의 죄가 따로 없고, 우리의 죄가 있을 따름이다. 그리고 우리는 기도 중에 남의 허물을 비난하기보다는 남의 허물을 대신 질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 예수님은 바로 십자가에서 이런 일을 행하셨고, 그래서 우리의 참 구주가 되시지 않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