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밀과 가라지

 

마13:24-30   

(2003년 1월 15일, 현풍제일교회 수요예배)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면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주인이 가로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주인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숫군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1) 본문을 통해 우리가 깨달아야 할 첫 번째의 교훈은 우리의 마음, 교회, 세상에는 두 세계, 즉 하나님의 나라와 사탄의 나라가 함께 활동한다는 사실이다. 사도 바울은 자신 속에서 두 세력이 싸우고 있음을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탄식하였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2-24). 성 어거스틴은 그의 위대한 저서 신의 도성(Civitas Dei)에서 창조 이래로 두 세력, 즉 아벨의 세력과 가인의 세력이 서로 대적하고 있다고 기록하였다. 종교개혁자 루터(Luther)는 그의 논문 "인간의 노예의지에 관하여"에서 인간은 마치 말과 같아서, 그 위에 하나님이 올라타고 있든지 아니면 사탄이 올라타고 있다고 말했다.  

2001년 8월 한 여름에 저는 서울신학대학교에서 가르쳤던 제자들이 경북 영주 근처의 작은 시골 교회에 가서 봉사활동을 할 때에 참여한 적이 있다. 제자들은 뜨거운 햇살 아래서 땀흘려 일하는데 저는 베짱이처럼 한가하게 먹고 놀기가 미안해서, 교회당 뒤편에 있는 논에 들어가 가라지를 뽑는 일을 해 보았다. 그런데 막상 논에 들어가 보니 생각 밖에 가라지가 얼마나 많은지! 주인은 분명히 오직 좋은 씨앗만을 뿌렸는데, 어디서 그 많은 가라지가 날아왔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본문은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원수는 물론 남의 농사가 잘 되는 것을 시기한 사람을 말할 수도 있겠으나, 본문에서 예수님은 분명히 사탄을 지목하신다. 하나님은 분명히 이 세상을 당신의 뜻대로 다스리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의 마음 밭에, 가정의 밭에, 교회의 밭에, 세상의 밭에 심겨지고, 성장하고 있다. 그런데 이를 시기하고 방해하는 사탄이 이 밭에 가라지를 마구 뿌리고 있다. 이로써 예수님은 우리가 두 세계 사이에서 투쟁하면서 살고 있음을 가르치신다.

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이 왜 이를 지금까지 허락하시는가? 그 이유를 피조물인 우리는 참으로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일반적으로 주어진 건전한 대답은 자유 의지이다. 하나님은 피조물을 나무 막대기나 바위처럼 자유 의지가 전혀 없는 존재로 창조하시지 않고, 자유롭게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는 존재로 창조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피조물은 분명히 선과 악 중에서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자유는 분명히 두 가지 길을 열어준다. 갈래길 앞에서 우리는 분명히 선택의 자유가 있기 때문에 그 중에서 한 길로 가기로 결정한다. 만약 갈래길이 없다면, 선택과 결정을 내릴 아무런 이유가 없다. 좋은 길이든 험한 길이든,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자동적으로 한 길만을 가야 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선택의 자유를 주셨다. 만약 하나님이 피조물에게 진리와 선만을 행하도록 만드셨다면, 이 세상은 분명히 아름다운 세상이기는 하겠지만, 피조물은 분명히 일종의 꼭두각시가 되는 셈이다. 그렇게 되면 피조물은 악도 선택할 수 없고 선도 택할 수 없다. 인간은 컴퓨터처럼 입력된 대로 움직일 따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피조물의 자유를 위해 두 가지 가능성을 열어 놓으셨다고 할 수 있다.

또 다른 대답은 인간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이 악을 허용하신다는 사실이다. 잘못을 모르면, 진리도 분별할 수 없다. 거짓을 모르면, 진실도 알 수 없다. 어둠이 없으면, 빛도 알 수 없다. 슬픔이 없다면, 기쁨도 모른다. 실패의 아픔을 모르면, 승리의 기쁨도 맛볼 수 없다. 고된 훈련이 없다면, 영광의 면류관도 없다. 이처럼 하나님은 분명히 하나님의 백성을 만들기 위해 온갖 시련을 허락하신다. 이스라엘 백성은 온갖 고난을 통해 강하게 되고, 바르게 되며, 깨끗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서도 당신의 일을 하신다. 만약 십자가(Cross)의 고난이 없다면, 부활의 영광(Crown)도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도 바울에게도 고난의 가시를 주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은 고난을 당하더라도 기뻐해야 한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에게 고난이 자꾸 닥쳐오면, 하나님이 여러분을 시험하신다고만 생각하지 말고, 여러분을 더 강하게 하시려고, 여러분에게 더 큰 일을 맡기시려고, 여러분에게 더 큰 상급을 주시려고 그리하신다고 믿고, 고난을 기뻐하는 데까지 나아가시기를 바란다. 아니 하나님의 백성은 때로는 남을 위해 스스로 고난을 자초할 줄도 알아야 하고, 안일할 때에는 죄짓지 않기 위해서라도 감당할 만한 고난을 달라고 기도할 줄도 알아야 한다. 예수님도 죄 때문이 아니라 죄인인 우리를 위해 고난을 달게 받으셨고, 그래서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셨다. 부활하신 예수님도 지금도 우리를 위해 여전히 고난에 참여하신다. 부활 후에 도마에게 보여준 예수님의 상처 자국은 바로 이를 말하지 않는가? 그러므로 우리에게 자주 고난이 닥쳐온다고 너무 비관하지도 말고, 이 세상이 곧 천국인 것처럼 매사에 희희낙락하지도 말자. 괴로우나 즐거우나 주어진 현실을 받아들이고, 잘났든 못났든 내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자.

           

2) 본문을 통해 우리가 깨달아야 할 두 번째 교훈은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나라와 사탄의 나라를 분별하기 매우 어렵고, 더욱이 우리의 힘으로 사탄의 세력을 뿌리뽑기도 매우 힘들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관용의 태도 속에서 살아야 하며, 가라지를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얻도록 성장해야 한다. 가라지를 가장 잘 식별하는 방법은 밑줄기를 구분하는 데 있다. 겉으로는 도저히 분간이 안 된다. 그런데 등을 엎드려 아래를 보면, 가라지의 밑줄기가 더 굵고 더 힘차게 뻗어져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처럼 이 세상에는, 그리고 심지어는 교회 안에서도 악한 사람이 선한 사람을 이기고, 기세가 등등한 경우가 많다. 그래서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말이 있고,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밀어낸다"는 속담도 있지 않는가! 처음에는 알곡과 가라지가 좀 분간이 되는가 싶더니,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분간하기 어려웠다. 한참 가라지를 잘라내는 중에 의심이 생겨났다. 도대체 내가 뭘 잘라내는 거야? 내가 지금 알곡을 잘라낸 것은 아닌가?

실제로 체험해 보니, 정말 알곡과 가라지를 구분하기가 쉽지 않았다. 우리 마음에 일어나는 생각과 욕망, 우리가 하는 일이 때로는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교회 안에도 여러 종류의 성도들이 어울려져 있는데, 어느 성도가 알곡인지 가라지인지를 쉽게 구분할 수 없다. 때로는 가라지가 알곡 행세를 할 때가 많다. 때로는 악인이 선인의 흉내를 낼 때가 많다. 사탄도 천사의 얼굴로 가장할 때가 있다. 그래서 예수님도 "양의 탈을 쓴 이리를 조심하라"고 경고하셨다. 가장 귀한 보물에는 모조품이 많다. 이 세상에는 마음을 미혹하는 사기꾼이 많으며, 교회 안에서도 거짓 교사, 거짓 선지자, 심지어는 적그리스도가 종종 출현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을 분간하고 뿌리뽑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는 사실이다. 섣불리 판단하다가는 알곡을 뿌리뽑기 쉽다. 섣불리 판단하다가는 선한 사람을 내몰기 쉽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참 예언자들은 가짜 예언자들에 의해 많은 수난을 당해 왔으며, 교회의 역사도 순교자의 역사로 얼룩져 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을 너그럽게 대할 줄 알아야 하듯이, 남도 너그럽게 대해야 한다. 남을 외모로 보고, 그리고 지금의 처지를 기준으로 삼아 쉽사리 판단해서는 안 된다. 교회를 쉽게 비난해서는 안 된다. 설령 교인들이 매우 타락해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을 저주해서는 안 되며, 교회 자체를 부인하거나 죄악시해서도 안 된다. 앞에서도 말씀을 드렸다시피, 하나님은 우리를 단련하시기 위해 종종 악한 사람을 허용하신다. 달걀이 몇 개 썩었다고 달걀 꾸러미를 통째로 버릴 수 없다. 세상이 좀 썩었다고 세상을 떠날 수 없다. 그처럼 교회와 목사, 성도가 좀 타락했다고 하더라도, 교회를 떠나서는 안 된다. 일단 우리 자신, 우리 가정, 우리 교회, 우리 세상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마음을 그대로 방치해서는 안 된다. 악한 생각과 욕망이 틈타지 않도록 늘 깨어 있어야 한다. 예수님도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다. 우리 교회에 악한 사람들이 활개를 치지 않도록 늘 경계해야 한다. 세상에 악인이 계속 번성하지 않도록 계속 지켜보아야 한다. 그러자면 우리는 지혜로워야 하고, 늘 성장해야 한다. 지혜로운 사람만이 가라지를 분간할 수 있고, 쉽게 뿌리뽑을 수 있다. 가라지를 뽑으려다가 알곡까지 뽑지 않으려면, 신중하고 지혜로워야 한다. 그리고 만약 알곡이 가라지보다 더 왕성하게 자란다면, 가라지는 자리를 잡기 어렵게 된다. 그리고 알곡과 가라지는 자랄수록 구분하기도 쉬워진다. 하지만 알곡과 가라지를 구분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결국 열매를 보는 것이다. 알곡은 비록 부실해 보여도 결국에는 알찬 열매를 맺는다. 가라지는 아무리 화려해 보여도 결국에는 쭉정이만을 남긴다. 그래서 예수님도 마지막 심판 때에 양과 염소를 구분하실 때에 그 열매를 보신다.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하면서 선한 행위를 하지 않는 사람들을 향해 "너는 나와 도무지 상관이 없다"고 하신다. 하지만 말없이 선한 행위를 한 사람들에게는 "착하고 충실한 종아, 너를 위해 영원한 나라가 준비되어 있다"고 하신다.

                   

3) 본문을 통해 우리가 깨달아야 할 세 번째 교훈은 하나님께서 마지막 때에 결국 악의 세력을 심판하신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소망 가운데서 그 날을 기다리면서, 항상 즐거워해야 한다. 가라지를 뽑으면서 갈수록 가라지를 분간하기 힘들어지자, 저는 결국 최종적인 판단을 추수 때까지 미루기로 하였다. 추수하는 농부는 가라지를 거두어 불사르고, 곡식은 모아 곳간에 넣는다. 알곡을 불사르고, 가라지를 곳간에 넣는 어리석은 농부는 없다. 하물며 만물의 창조자요 심판자이신 하나님이 알곡 신자를 버리시고, 쭉정이 신자를 영접하시겠는가? 그러므로 이 땅에 살 동안 악인이 잠시 동안 형통한다고 부러워하지 말자. 그들은 바람에 날리는 겨와 같고, 해가 지면 아궁이 속에 들어갈 풀과 같다. 그들의 부귀와 영화도 일장춘몽(一場春夢)으로 변할 것이고, 모래 성 위에 지은 누각(樓閣)이라는 사실이 드러날 것이다. 든든한 믿음의 반석 위에 행함의 기둥으로 집을 짓지 않은 사람들은 폭풍과 홍수에 떠내려가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땅에 살 동안 많은 고난을 겪고 세상적으로 성공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너무 서러워하거나 한탄하지 말자. 고난은 잠시 뿐이다. 영원한 나라가 우리를 기다린다. 이성봉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말하셨다. "가시밭이 백합화에게 불행이 아니다. 가시밭이 없으면 장난꾼 아이들이 와서 그 꽃을 꺾어갈 것이다. 가시밭이 있으므로 장난꾼들이 만지지도 못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성도들의 사면에 있는 환난 고통의 울타리가 결단코 불행이 아니라 우리를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울타리라는 것을 아는 자는 참으로 행복하다." 그리고 이성봉 목사님은 다음과 같은 재미난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만주에서 어떤 집사가 이성봉 목사님에게 "목사님, 정말 하나님이 계십니까?"고 물었다. "집사, 이거 웬 말이오?" 하니, "나는 아무래도 하나님이 계신 것 같지 않아요. 아무개도 교회 집사 장로까지 하다가 타락하여 저렇게 불의한 술장사, 아편장사를 하여도 부자가 되어 밭 사고, 논 사고, 벽돌집 짓고, 아들 딸 낳고, 소실을 몇이나 얻어 재미를 보니, 하나님이 있으면 왜 저런 놈을 저렇게 두겠소" 했다. 그래서 이성봉 목사님은 말하시길, "여보! 집사, 잔칫집 돼지 보았소? 잔칫집 돼지는 어떤가요? 잔칫날 가까워 오면 어떻게 하던가? 더 잘 먹이지요. 고와서 잘 먹이던가요? 잔칫날에 잡아먹으려고 잘 먹이지요. 그럼 죄 짓고 불의한 일하고도 잘되는 것 부러워하려면, 잔칫집 돼지를 부러워하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세상 사람들을 겉으로만 판단하지 말자. 마지막 심판 날에 어떻게 될 것인지를 생각하면서, 인내와 소망 중에 살아가자. 분명히 악인의 마지막은 멸망이지만, 선인의 마지막은 영광이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해처럼 밝히 빛나며, 하나님을 찬양하며 영원한 복락을 누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