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잃어버린 자

 

눅 15:3-22

2003년 2월 9일 현풍제일교회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다니지 아니하느냐 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어느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도록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또 찾은즉 벗과 이웃을 불러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았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또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그 둘째가 아비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비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주었더니, 그 후 며칠이 못되어 둘째 아들이 재산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 다 없이한 후 그 나라에 크게 훙년이 들어 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하나에게 붙여 사니, 그가 저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저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을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1)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에게 보냄을 받으셨다는 확신 속에서 세상에서 버림을 받은 죄인들, 세리들, 창녀들을 찾아 나서셨다. 그분의 관심의 대상은 온통 병들고 잃어버린 자들을 향해 있었다. 본문의 비유도 바로 이 점을 분명히 보여준다. 목자는 일흔 아홉 명의 양보다 한 마리 잃은 양에게 더 큰 관심을 둔다. 여인은 아홉 개의 드라크마보다 한 개의 잃은 것에 더 집착한다. 아버지도 충직한 큰 아들보다 집나간 작은 아들을 더 염려한다. 이처럼 예수님도 스스로 거룩하다는 생각하는 사람들, 이웃에 대하여 무관심한 부자들과 권력자들의 위선과 이기심을 혹독히 나무라셨지만, 잃어버린 자들에게는 편애한다고 비난받을 만큼 큰 관심을 보이셨다. 그분은 스스로 의롭다고 자부하던 바리새인들처럼, 혹은 광야에서 수도하던 사람들처럼 죄인들과 떨어지시지 않고, 그들 속으로 들어가셨다. 그분은 광야로 나가시지 않고 삶의 길목, 시장 한복판으로 들어가셨다. 예수님은 지금도 소외된 자들, 잃어버린 자들 속으로 들어가서 활동하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에 합당한 성도가 자가 되려면, 우리만의 교제로 만족해서는 안 되며, 잃어버린 자들을 찾아 나서야 한다.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들의 손을 잡아 주어야 한다. 그들을 찾아가야 한다.

 

2) 어찌하여 잃은 자들이 생겼는가? '잃어버린 양'은 목자의 말을 잘 듣지 않는 성질 사나운 양이었을 지도 모른다. 혹시 동료가 싫증이 났는지도 모른다. 혹시 목자의 가르침에 싫증이 났거나 목자의 무관심에 실망했는지도 모른다. 혹시 목자의 가혹한 통솔이 싫었는지도 모른다. 혹시 더 맛있는 꼴을 찾아서 여기저기 방황하다가, 혹시 자기 혼자 실컷 먹을 수 있는 비밀 장소를 찾아서, 혹시 고약한 다른 양의 꾀임에 빠져서 대열에서 이탈했는지도 모른다.

'잃어버린 드라크마'는 동전이므로 제 스스로 빠져나갈 능력이 없다. 이 동전은 아마도 여인이 잘못 다루어 어디론가 굴러갔거나, 어디 둔 곳을 몰라 잃어버렸을지도 모른다. 무관심과 부주의, 실수로 귀중한 장식품의 일부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탕자'는 아버지를 떠날 테니 자기 몫의 유산을 미리 달라고 졸라서 이를 챙긴 후에 세상 속으로 달려나갔다. 아버지의 감독과 훈계가 싫었을지도 모른다. 집안 일보다 세상이 더 즐거울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혹시 못된 친구들이 꼬셨는지도 모른다. 혹시 부모로부터 일찍 자립하는 게 좋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혹시 세월이 흐르다 보면, 유산을 제대로 못 받을지도 모른다는 염려 때문에, 혹시 일찍 유산을 챙기는 것이 유리하겠다는 속셈으로 그리 하였는지도 모른다. 여하튼 그는 제 발로 당당히 부모 곁을 떠났다.  

 

3) 잃은 자들을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잃은 양'은 지금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지금 어디에 있는지를 전혀 모른다. 혹시 구덩이나 가시덤불에 빠져서 울부짖고 있을지도 모른다. 여하튼 그는 스스로 되돌아올 수 없다. 스스로 헤쳐 나올 수가 없다. 방향 감각과 자구 능력이 없다. 이런 경우에 주인은 어떻게 잃은 양을 찾겠는가? 들판이나 계곡을 다 뒤지며 갈만한 곳으로 헤매다가, 혹시 울부짖는 소리를 듣고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낙심한 사람들도 지금 자신들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어디로 가야할지를 잘 모르고 있을 것이다. 그들은 인생의 의미와 목표를 잃어버렸거나 잘못 정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가 목자의 심정으로 그들이 있을 만한 곳, 구석구석을 찾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그들이 소리를 지르든 안 지르든, 그들은 분명히 우리의 도움이 필요로 한 자들이 아닌가?

'드라크마'는 주인이 언제, 왜 잃어버렸는지 모르니, 어디에 있는지도 알 턱이 없다. 이스라엘의 집에는 대게 창문이 없다. 그러므로 캄캄한 집안에서 동전을 찾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어디에 떨어졌는지, 어디로 굴러갔는지도 모르니 답답한 심정이다. '잃은 양'처럼 갈만한 곳도 모르고, 가까이 가도 소리내어 울지도 않는다. 이런 경우에 여주인은 어떻게 잃은 한 드라크마를 찾겠는가? 불을 켜고 빗자루로 집 전체를 쓸면서 구석구석 뒤져 볼 것이다. 오늘날도 우리의 무관심 속에서, 아니 우리의 교만이나 실수 때문에 모르는 사이에 슬그머니 빠져나간 사람들이 많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스스로 돌아올 생각도 하지 않거니와, 돌아오려고도 하지 않는다. 설령 그들이 그런 의욕과 능력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스스로 돌아올 힘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인처럼 마음과 눈의 불을 켜서 우리 주위를 샅샅이 뒤져서 데려와야 하지 않겠는가? 여기저기 수소문해야 하지 않겠는가?

 '탕자'는 제 발로 나갔으니 제 발로 돌아올 때까지 아버지처럼 기다릴 수밖에 없다. 그는 지금 어디에 있는지도 알고 있으며, 스스로 후회할 줄도 안다. 아들의 자유와 자존심을 꺾고 아버지가 일방적으로 끌어올 수는 없다. 그러므로 아버지는 기다릴 도리 밖에 없다. 아들은 돌아올 능력이 있고 돌아올 방향을 알고 있고, 자신의 곤경을 벗어나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러므로 아버지는 아들이 스스로 돌아올 때까지 기다린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저 잠잠히 기다리지 않는다. 동구 밖으로 나가 보기도 하고, 발을 동동 굴리기도 하며, 멀찌감치 아들이 보이면 재빨리 달려나갈 준비를 하면서, 자주 멀리 쳐다본다. 빨리 돌아오라고 두 손을 모아 기도하며, 아들이 올 때를 위해 음식과 선물을 준비한다. 우리도 밖에 나가 지치고 외롭고 실패한 성도들을 억지로 데려올 순 없다 하더라도, 그들이 스스로 깨닫고 돌아올 날을 위해 애써 기도하고, 기다리고, 준비를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들이 돌아 올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항상 따뜻하게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하지 않겠는가?

 

3) 잃은 자를 찾은 기쁨은 너무나 크다. 목자는 잃은 한 마리의 양을 어깨에 메고 돌아와 친구와 이웃을 불러 잔치를 베풀었다. 한 드라크마를 찾은 여인은 너무 기뻐서 친구와 함께 향연을 베풀었다. 잃은 아들을 찾은 아버지는 성대한 축제를 베풀었다. 잃은 자를 찾으면, 왜 그렇게 기쁜가? 하나가 없으면, 나머지는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한 마리의 양이 없으면, 나머지의 양들은 있으나마나 한다. 그러므로 목자는 한 마리의 양을 찾기 위해 일흔 아홉 마리의 양들을 들에 그냥 방치해 두다시피 했다. 물론 아흔 아홉 마리를 우리 안으로 안전하게 몰아 넣어놓고 한 마리를 찾으려 나갔을 것이다다. 한 마리를 찾으려다가 다른 양들을 모두 잃어버릴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목자의 마음에는 한 마리, 한 마리가 다 소중했다. 예수도 한 영혼이 온 천하보다 더 귀하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여인은 정혼한 약혼자가 정성껏 만들어 준 머리 수건에서 떨어져 나간 한 개의 동전을 찾으려고, 아홉 개의 동전에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다. 한 개의 동전이 없다면, 머리 수건은 있으나마나 하다. 약혼자를 쳐다볼 면목이 없다. 사랑이 담긴 머리 수건에 아무 동전을 매단다고 해서, 마음이 흡족할 리가 없다. 그러므로 여인은 한 개의 동전을 찾으려고 혈안이 되었다. 아니 그는 눈물을 흘리면서 찾을 것이다.   

아버지는 작은 아들을 기다리느라 큰 아들이 얼마나 성실히 집안 일을 돌보는지 눈여겨보지 않았다. 부모는 모든 아들을 고루 사랑하지만, 아픈 아들을 더 사랑할 수밖에 없다. 상처난 손가락에 더 신경이 쓰이듯이, 방탕한 아들을 위해 더 걱정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큰 아들이 아무리 똑똑하고 집안 일을 잘 처리해도, 다른 아들 하나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아버지에겐 아무런 기쁨도 없을 것이다. 작은 아들이 돌아와 준다면, 전 재산도 다 주고 싶은 심정일 것이다. 왜냐하면 한 아들만 없어도 집안 전체가 쓸쓸하고 슬프기 때문이다.

우리도 우리 중에서 잃은 사람들을 찾으러 나가자. 잃은 양을 찾지 못했는데, 잃은 동전을 찾지 못했는데, 집나간 자식이 돌아오지 않았는데, 나머지 식구들이  태연하거나 저들끼리 즐겁게 산다고 한다면, 그 얼마나 무정한 사람들인가? 그러므로 잃은 자들을 위해 기도하자. 그들을 찾으러 나가자. 그들을 데리고 오자. 그들을 위해 잔치를 준비하자. 우리만의 잔치는 무슨 소용이 있는가? 우리만의 잔치에 무슨 큰 기쁨이 있겠는가? 집나간 자식을 위해 식음을 전폐하지는 못할망정 우리끼리 기뻐한다면, 하나님 아버지도 아주 섭섭해하실 것이다. 그들을 찾아야, 우리도 잃은 기쁨을 되찾을 수 있다. 그러므로 그들을 찾는 것은 우리의 기쁨을 되찾기 위한 길이기도 하다. 잃은 자가 돌아오는 것은 바로 바로 우리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