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용서받지 못한 종

 

마 18:21-35

2003년 2월 5일 현풍제일교회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번 뿐 아니라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할지니라. 이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회계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회계할 때에 일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한대, 그 종이 엎드리어 절하며 가로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그 종이 나가서 제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 하나를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가로되, 빚을 갚으라 하매, 그 동관이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 나를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저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그 동관들이 그것을 보고 심히 민망하여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고하니, 이에 주인이 저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1) 본문은 베드로의 질문과 함께 시작하고 있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려 주리이까?" 이 본문은 인생살이가 항상 갈등과 분쟁 속에 있다는 사실을 전제한다. 아마도 제자들 사이에서 자주 분쟁이 일어났던 것 같다. 물질 분배의 문제 혹은 자리다툼 때문이었을 것이다. 우리도 자주 싸운다. 그렇지만 우리가 갈등과 분쟁 속에 휘말리는 주된 이유는 우리가 서로 다른 사람에게 잘못을 범하고도, 서로 사과하지 않고 용서하지 않으며, 서로 화해하지 않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남에게 전혀 잘못을 범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러므로 남의 용서가 전혀 필요하지 않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공자와 맹자라도, 아니 부처라고 그렇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남에게 잘못을 범하며, 그에게 물질적, 정신적 피해와 상처를 주곤 한다. 물론 어떤 경우에는 누가 가해자이고 누가 피해자인지 구분하기가 매우 어려울 때가 있다. 그리고 교통사고의 경우처럼 종종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바뀔 때도 더러 있다. 어떤 경우에는 내가 완전히 결백할 때도 분명히 있다. 그렇지만 모든 경우에 내가 완전히 피해자일 수만은 없다. 항상 피해를 보고 산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우리는 피해망상자라고 부른다.

우리는 불완전한 존재요 죄인이기 때문에 늘 용서를 받아야만 살아갈 수 있다. 우리는 서로의 죄를 용서해야 하고, 서로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치유해야 하며, 서로의 빚을 상환하거나 탕감해야 한다. 때로 우리는 우리의 권리를 양보하거나 포기해야 한다. 그래야만 망가진 인간의  관계와 사회는 회복될 수 있고, 우리는 늘 새롭게 출발할 수 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용서를 선포하고 있으며, 우리도 서로 용서하고 살라고 명령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어느 정도까지 남의 잘못을 용서해야 하는가? 오늘의 본문에서도 베드로는 제자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분쟁과 갈등을 경험하면서 예수님에게 그렇게 묻고 있다. 그런데 한 두 번이면 몰라도, 아니 단 세 번 정도는 몰라도 일곱 번까지 남의 용서를 덮어준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 한국 사람은 매사에 "삼세번"이라는 말은 자주 내뱉는다. 우리 민족은 뭐든지 세 번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민족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 번까지는 참아줄 수 있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한 번 정도는 몰라도 세 번까지 남의 잘못을 용서해 주는 사람도 많지는 않을 것이다. 대개는 피해를 준 사람에게 즉각 보복하거나, 곧 보복해야 한다고 벼르는 사람이 더 많을 것이다. 9.11 테러가 일어났을 때, 미국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테러에 가담했다고 여긴 아프카니스탄을 무자비하게 보복했으며, 더 나아가 이라크도 공격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다. 아마도 미국은 이라크를 공격할 것이다. 그래야만 총잡이 미국 사람의 직성이 풀리는 것 같다. 팔레스타인 사람이 이스라엘 사람에게 땅을 빼앗겼다고 자주 테러를 행한다. 그럴 때마다 이스라엘은 즉각 보복을 가한다. 더욱이 미국과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받은 피해보다 엄청나게 더 큰 피해를 입히고야 만다. 자칭 기독교 국가라는 미국과 오랫 동안 땅이 없이 유리방황하며 지냈던 하나님의 선민 이스라엘 백성조차 이렇게 가혹하게 보복한다면, 이 세상에서 누가 가해자를 관대히 용서해 줄 수 있겠는가? 개인적인 단위든 민족적인 단위든, 인간은 이처럼 보복을 즐기는, 아니 보복을 꼭 해야만 화가 풀리는 야수와 같은 존재인가? 실로 용서는 참으로 어렵다. 용서는 참으로 대단한 희생과 용기를 필요로 한다.

그런 면에서 베드로가 "일곱 번까지 하리이까?"라고 질문한 것은 대단히 관대한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성격이 아주 급했던 베드로가 일곱 번이나 용서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특이한 일이다. 아마도 일곱 번의 용서는 그가 보일 수 있는 최대한의 한계였을 것이다. 정말 우리가 일곱 번이라고 용서할 수 있다면, 대부분의 갈등과 분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며, 설령 일어났다고 하더라고 해결되었을 것이다. 여러분은 정말 남의 잘못을 일곱 번까지 용서할 수 있는가? 여러분은 정말 남의 빚을 일곱 번까지 탕감할 수 있는가? 정말 그런 적이 있었는가?

그런데 일곱 번이 인내의 마지막 한계라고 생각한, 아니 자기 딴에는 최대한의 관용을 베풀 수 있다고 자부한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전혀 예상 밖의 대답을 내어놓으신다. 베드로의 자랑을 전혀 무색케 하시려는 듯이, 예수님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답변을 내어놓으신다. "일곱 번 뿐 아니라 일흔 번 씩 일곱 번, 즉 마흔 아홉 번이라도 용서하라!" 말 그대로 꼭 마흔 아홉 번까지만 용서하라는 말씀이 아니다. 일곱은 완전 숫자이다. 그렇기 때문에 완전에 또 완전을 곱한 숫자만큼, 즉 무한히 용서하라는 말씀이다. 아니 일곱 번은커녕 단 세 번도 용서하기 어려운 실정에 무한히 용서하라니! 인간으로서는 완전히 실현할 수 없는 요구가 아닌가? 예수님은 우리가 어느 정도 실천할 수 있는 요구를 주셔야 현명하시지 않는가? 애초부터 실천하기 어려운 요구를 주신다면, 우리를 처음부터 포기하게 만드시는 것은 아닌가?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하는 속담도 있지 않는가?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에게 실천할 수 없는 요구를 주시지 않는다. 예수님은 말장난을 즐기시는 분이 아니다. 예수님은 우리더러 도달할 수 없는 신기루로 가라고 말씀하시지 않는다. "정말 우리가 이웃을 무한히 용서할 수 있는가?" 하고 묻는다면, 예수님은 "그렇다!"고 대답하실 것이다. 왜냐?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무한히 용서하시기 때문에 우리도 그리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비는 무한하다. 하나님은 늘 우리를 불쌍히 여기신다. 하나님은 끊임없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용서하신다. 우리가 하나님에게 아무 것도 미리 드린 것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당신과 원수가 된 우리를 한없이 사랑하시고 용서하신다. 하나님의 이런 사랑을 정말 체험한 사람은 남을 무한히 용서할 수 있다. 그러므로 본문은 일차적으로 우리에게 무거운 의무의 짐을 지우지 않고 하나님의 큰 은혜를 높이 선포한다. 우리는 하나님에게 크게 빚진 종과 같다. 우리는 앞으로도 계속 그런 종으로 살아갈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가는 것은 우리의 능력 때문이 아니다. 만약 하나님의 사랑이 없다면, 하나님의 용서가 없다면, 우리는 한 순간도 숨을 쉬며 살 수 없는 불쌍한 죄인이다. 이것을 깨달은 자가 곧 그리스도인이요, 천국 백성이다.

 

2) 다른 한편으로 이 본문은 하나님으로부터 큰 잘못을 용서받아 놓고도 우리 이웃의 작은 잘못조차 용서하지 못하는 옹졸함을 폭로한다. 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받은 자가 백 데나리온의 빚도 탕감하지 못한다. 만 달란트와 백 데나리온의 차이는 50만원과 1원의 차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결국 50만원의 빚을 탕감받는 자가 남의 빚은 l원도 탕감해 주지 않았다는 셈이다. 얼마나 옹졸하고 이기적인가? 비웃음이 나오지 않는가? 우리는 일평생 하나님으로부터 50만원 정도가 아니라 5억, 아니 셀 수 없이 많은 액수의 혜택을 받고 산다. 요즈음은 물도 사먹게 되었다. 만약 하나님이 물과 태양, 공기와 동식물, 광물 등과 같은 자연 물질에 대한 비용을 내라고 하신다면, 우리 중에 몇 사람이나 그 돈을 갚을 수 있을까? 더욱이 하나님은 우리의 죄악을 위해 당신의 유일한 아들 예수님을 희생 제물로 바치셨다. 이렇게 큰 빚을 탕감받은 우리도 얼마나 이웃에게 인색할 때가 많은가?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얼마나 잘 잊어버리고 이웃에게 박정하게 대하는가? 우리는 본문에 나오는 어리석은 종을 비웃지만, 본문은 실로 우리를 비웃고 있다. 그리고 우리의 양심을 도려내는 예리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렇게 큰 은혜를 누리는데도 불구하고 너희는 서로 작은 은혜도 베풀지 못하는가?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심과 같이 너희도 마땅히 서로를 불쌍히 여겨야 하지 않겠는가?

정말 이웃의 작은 티를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큰 은혜를 받지 못했음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그는 결국 심판의 날에 하나님의 용서를 받지 못할 사람으로 등장할 것이다. 평소에는 하나님이 우리를 우리의 행위대로 심판하시지 않는다. 우리의 죄값을 일일이 묻지 아니 하시며, 죄값을 당장 치르라고 강요하시지 않는다. 하지만 심판의 날에 하나님은 우리의 행동에 따라 우리를 심판하신다. 시편 18편은 "자비한 자에게는 주의 자비하심을 나타내시며, 완전한 자에게는 주의 완전하심을 보이시며, 깨끗한 자에게는 주의 깨끗하심을 보이신다"고 말한다. 마태복음 5장 7절은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가 우리의 죄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한다(주기도문). 그러므로 오늘의 본문은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행위를 강조한다. 우리는 늘 잘못을 범하는 죄인이다. 하지만 심판의 날에 예수님은 "우리가 죄인이냐 아니냐?"를 보시지 않고, "우리가 용서받은 죄인으로서 그에 합당한 삶을 살았느냐?"를 보신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지 않는가? 그 사랑에 감격하면서 우리도 서로 사랑하자. 서로 용서를 베풀면서, 은혜 안에서 늘 화목하게 살아가자. 이것이야말로 분쟁과 갈등의 시대에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간곡한 부탁, 아니 절대적인 명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