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초대받은 자들

 

마 22:1-14

2003년 3월 19일, 현풍제일교회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가로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저희가 돌아보지도 않고 하나는 자기 밭으로, 하나는 자기 상업 차로 가고,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능욕하고 죽이니,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예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치 아니하니, 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너라 한대,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자리에 손이 가득한지라. 임금이 손을 보러 들어올쌔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무언이어늘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1) 오늘의 비유는 어떤 임금이 아들의 결혼식을 준비하고 손님을 초대하는 기쁜 상황으로부터 출발한다. 여기서 우리가 먼저 깨달아야 할 교훈이 있다면,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결혼과 같이 즐거운 축제 마당이라는 사실이다. 세상에 많은 축제들이 있지만, 아마도 결혼식처럼 즐겁고 유쾌한 축제는 없을 것이다. 신랑과 신부만이 아니라 그의 친구들과 가족들, 이웃들, 지나가는 행인들, 거지들과 나그네들도 참여할 수 있는 곳이 결혼 축제 마당이다. 결혼식에서는 풍성한 음식이 차려지며, 즐거운 음악이 연주되며, 흥겨운 놀이가 일어난다.

예수님은 종종 하나님의 나라를 결혼식 축제에 비유하셨다. 그리고 그는 가나의 혼인 잔치에 참여하셨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포도주가 모자라자 물로 포도주를 만들어 주시면서까지 흥을 돋구어 주셨다. 예수님은 종종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즐거운 식사를 나누셨다. 오죽하면, 유대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보고 "먹고 마시기를 즐기는 자"라고 비난하였겠는가? 그래서 어떤 학자는 예수님을 "파티광"이라고 표현한 적도 있다. 예수님이 늘 풍성한 파티를 열어 가난한 자들을 먹이실 만큼 큰 부자였을 리는 없다. 그리고 예수님이 항상 파티를 먼저 준비하셨을 리도 없다. 그리고 이 자리는 매우 조촐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이 그를 따르던 사람들과 함께 자주 식탁의 사귐을 나누셨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복음이란 곧 기쁜 소식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복음 전도는 바로 "이 세상에서 우리가 가장 기다리던 즐거운 축제가 베풀어졌으므로 모두 다 와서 이 즐거움에 참여하라"고 초대하는 기쁜 소식이다. 요즈음 거리에서 전도하는 사람들의 구호처럼 복음 전도는 "예수를 안 믿으면, 지옥에 간다"는 협박이 아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처럼 "나무 뿌리에 도끼가 놓였으니, 회개하지 않으면 찍어버린다"는 그런 협박성의 전도를 하시지 않았다. 예수님의 복음 전도는 기쁜 축제로 오라는 즐거운 초대였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돌이켜서 복음을 믿으라!" 이처럼 천국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는, 그리고 우주에서 가장 성대하고 기쁜 축제다. 그리고 축제를 준비하고 초대하는 사람이 스스로 즐거워하지 않을 리가 없다. 예수님은 슬프고 우울한 마음으로, 혹은 분노하고 강요하는 분위기 속에서 복음을 선포하시지 않았다. 그는 즐거운 소식을 즐겁게 전하셨다. 그러므로 비록 성서에서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우리는 예수님이 종종 파안대소(破顔大笑)하시며 즐겁게 웃으셨으리라 충분히 연상할 수 있다. 예루살렘을 내려다보시며 슬피 우실 만큼 정서가 풍부하신 예수님이 잔치 집에서 기쁘게 웃으시지 않았겠는가? 기쁨의 소식을 전하시는 예수님이 어찌 기쁨에 들떠서 웃으시지 않았겠는가?

이처럼 우리도 기쁜 복음을 기쁘게 전해야 한다. 더욱이 우리는 기쁜 잔치를 베풀어놓고 사람을 초대해야 한다. 교회가 기쁨과 행복에 가득 찬 곳에 아니라 싸움과 슬픔이 넘치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만약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보고 "교회로 오라"고 말한다면 누가 오겠는가? 그리고 설령 그들이 모르고 교회에 온다고 하더라도, 누가 오래 머물러 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기뻐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교회도 항상 기쁨이 넘치는 곳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 즐거운 잔치 마당으로 오라고 초대할 수 있다.  

 

2) 그런데 오늘의 비유는 기쁜 상황으로부터 출발하였지만, 불행하게도 슬픈 상황으로 끝난다. 초대를 받은 사람들이 이런저런 핑계로 오지 않자, 임금은 노하여 그들에게 엄한 징벌을 내렸다. 초대를 받았지만 잔치에 오지 않았던 사람들은 분명히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과 같은 유대인들이다. 왜 그들은 초대를 받고도 초대에 응하지 않았는가? 그들은 교만하였는가? 그럴 수 있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보고 "나사렛과 같은 시골에서 태어난 시골뜨기가 무슨 큰 일을 하겠는가"?라고 깔보았던 적이 있다. 또 그들은 스스로 부족함을 느끼지 못하였을 수도 있다. "이미 배부르도록 잘 먹었는데, 무엇 때문에 잔치에 가겠는가!"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율법을 잘 지킴으로써 스스로 의로운 사람이 되었고, 그러므로 언제든지 천국에 들어간 자격을 확보해 놓았는데, 또 새삼 무슨 초대를 받겠는가?"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본문은 초대에 응하지 않은 중요한 이유로 밭일, 장사를 말한다. 즉 생업에 바쁘니까 임금의 잔치에 갈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초대에 응하지 않은 가장 중요한 이유는 바쁜 생계를 위해 잔치를 거부한 사실에 있다. 하지만 더 깊은 이유는 우선 삶의 우선 순위를 뒤바꾸었다는 사실에 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보다 율법의 가치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보다 종교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들은 잃어버린 죄인보다 의로운 자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들은 다른 민족보다 자신의 민족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보다는 자신의 영광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하나님 나라의 공의보다 자신의 의로움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자비보다 제사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사람보다 제도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사람의 병을 고치는 것보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위대한 가치와 즐거움보다는 자신의 작은 왕국의 가치와 즐거움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결국 하나님의 버림을 받게 되었다.

 

3) 이리하여 잔치의 초대장은 어이없게도 잔치에 초대를 받지 않았던 사람들, 길거리에 지나다니던 사람들에게 돌아갔다. 복음을 거부하던 유대인들은 천국 잔치에 배제되었고, 우리와 같은 이방인들이 천국 잔치에 초대되었다. 그런데 더욱 어이가 없는 사실은 다시 초대를 받았던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이 예복을 입지 않았다는 이유로 다시 임금의 진노를 사서 쫓겨난 사실이다. 길거리에 다니다가 초대된 사람들이 언제 예복을 입을 경황이 있었단 말인가? 그들은 집으로 돌아가 예복을 차려입고 왔다는 말인가? 아니면 주인이 예복을 준비했다는 말인가? 좌우간 처음 초대를 받은 사람들 대신에 "아무도 와도 좋소!"라는 초대에 응해서 허겁지겁 달려온 사람에게 주인은 어쩌면 이렇게 박정할 수 있는가? 너무 황당하지 않은가? 결혼 잔치에는 지나가던 더러운 거지도 거나하게 한 상을 받을 수 있다던데, 더러운 거지를 보고 당장 새 옷을 갈아입고 오라고 하면, 어떤 거지가 다시 올 수 있겠는가?

그래도 잔치 집에 오는 사람이 최소한의 예의를 차리지 않는다면, 말이 되지 않는다. 예복은 분명히 주인이 준비한 것이다. 길거리에 지나던 사람들이 언제 예복을 준비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므로 예복의 요구는 다시 한번 더 구원을 위한 인간의 조건들,  즉 인간의 공로를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잔치처럼 예복도 하나님이 이미 준비하신 은혜의 선물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것을 감사히 받을 따름이다. 내 멋대로 남의 집 잔치에 들어갈 수는 없다. 집집마다 가풍과 예의가 있다. 하물며 하나님 나라의 예의가 없겠는가? 아무리 거지와 같이 더러운 사람이라고 하더라고, 잔치 집에는 깨끗한 옷차림이 어울린다. 그러므로 주인이 준비한 깨끗한 옷을 입는 것이 손님의 최소한의 예의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최소한의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그것은 바로 회개하는 일이다. 회개하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겠다는 것은, 더러운 옷과 신발 그대로 깨끗한 남의 안방에 들어가겠다는 것과 같이 예의가 없는 짓이다. 하지만 교만한 바리새인들은 자신의 더러움을 보고 스스로 씻지 않았다. 그러나 죄인들은 열린 은혜 앞에 자발적으로 회개했다. 배고픈 사람이 맛있는 음식을 거부할 리가 있겠는가? 교만하고 배부른 사람에게는 음식 앞에 대단한 용기가 필요하겠지만, 겸손하고 배고픈 사람에게는 음식을 향하여 손을 내미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이다. 이 단순한 수용, 이 단순한 믿음, 이 단순한 돌이킴, 이 단순한 회개마저 거부한다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물며 이 단순한 회개도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다. 회개는 이미 준비된 옷을 갈아입는 것처럼 너무 쉬운 일이다. 길을 가던 방향을 돌이키기만 하면 그만이다. 만약 목적지를 바라보고 가던 사람이 완전히 정반대의 길을 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방향을 돌이키는 것이 뭐 그리 어려운 일이겠는가? 어떻게 보면, 이럴 경우에 우리는 거의 자동적으로, 거의 무의식적으로 방향을 바꾼다. 이런 일은 거의 본능적인 일이다. 본능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 앞에서 누가 자랑할 수 있겠는가? 오직 감사만 있을 따름이다. 오직 하나님이 준비하신 구원의 잔치에 기쁨으로, 감사함으로 들어갈 따름이다.

문제는 우리가 더러운 옷을 입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데 있다. 문제는 우리가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데 있다. 잔치의 주인이 거지에게 "더러운 옷을 입고 있으니 갈아 입으라"고 말할 때, 거지는 그 말에 순종하면 아무 일도 없을 텐데, 만약 거지가 자기는 더럽지 않다고 끝까지 우긴다면, 어떤 주인이 좋아하겠는가? 거지도 자기가 더럽다는 것을 안다. 이처럼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은 하나님도 아시고 나도 아는데, 우리가 이 사실을 끝까지 부인한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리가 없다. 천국은 오직 회개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만 준비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처지가 어떠하든, 아니 우리의 처지가 더럽고 어려울수록,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의지하여 담대하게 하나님의 집으로 들어가자. 단지 우리의 거짓된 교만을 꺾을 수만 있다면, 단지 우리의 연약한 처지를 솔직히 바라볼 수만 있다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이토록 쉬운 일이다. 우리 중에 그 어떤 사람도 회개의 예복을 입지 않았다는 이유로 천국 문 앞에서 쫓겨나는 일이 없도록 기도하자. 오직 겸손히 하나님의 나라를 선물로 받을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은 이미 준비되어 있다. 회개하면서, 감사하면서, 기뻐하면서, 담대히 천국 문으로 들어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