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외롭지 않은 싸움

- 엘리야 -

평신도주일

 

왕상 18:36-40

2003년 8월 31일, 현풍제일교회

 

 

오늘은 평신도주일입니다. 온 세계에게 불꽃처럼 번지고 있는 평신도 운동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독일교회를 선두로 시작되었습니다. 이 운동의 직접적인 동기는 제2차 세계대전이었습니다. 루터와 같은 종교개혁자가 태어나고 인구의 95%가 세례 교인인 독일에서 악마적인 히틀러가 생겨나서, 오랫동안 기독교 왕국이라고 불려져 오던 유럽이 그에게 무참히 짓밟힌 이유가 무엇인지를 사람들은 반성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로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교회와 신도의 생활을 혁신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평신도 운동이 본격적인 궤도에 오른 것은 1954년 8월 미국 에반스톤에서 열린 제2회 세계교회협의회(WCC)가 평신도부를 상설 기관으로 설치한 후부터였습니다. 그리고 네델란드 신학자 핸드릭 크래머(H. Cramer)가 1958년에 '평신도 신학'이란 책을 저술한 후부터 평신도 운동은 든든한 신학적 토대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한국에서 평신도 운동은 1962년에 한국교회협의회에 평신도국이 설치되고 1963년에 제1차 평신도운동 연구회가 결성된 후로 크게 발전하였습니다. 한국교회는 교역자만이 아니라 평신도의 헌신적인 참여를 통해 크게 성장하고 발전하였습니다. 지금도 곳곳에서 평신도들은 눈부신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처럼 우리가 해마마 한번씩 평신도주일을 기념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평신도의 사명을 격려하기 위함입니다만, 교역자와 평신도의 구분을 넘어서 교회가 다 같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모두가 힘을 합쳐 세상 속에서 교회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 다짐하기 위함입니다.   

평신도는 이 사회에서 직장을 갖고 이 사회와 가장 자주 접촉하고 대화를 나누는 소중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평신도에게 영적인 힘을 공급하고 이 사회 속에서 사명을 다하도록 훈련할 책임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성도가 아무리 은혜로운 말씀을 듣고 아무리 큰 은혜를 받는다고 하더라도, 만약 성도가 세상 속으로 들어가서 세상을 변화시키지 못한다면, 교회가 세상에 존재할 이유와 목표가 없습니다. 평신도는 세상 속에서 세상의 어둠의 세력과 싸우는 최전방에서 싸우는 영적인 전사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평신도를 올바르게 세우고 훈련하여서, 세상 속으로 보내야 할 책임을 갖고 있습니다. 주일마다 저는 인물을 중심으로 설교를 해오고 있습니다만, 이번 주일에 저는 엘리야라는 인물과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이 세상에서 평신도 여러분이 감당해야 할 사명이 무엇이며, 이 세상 속에서 여러분이 승리하기 위해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를 '엘리야'로부터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치 물고기가 물을 떠나 살 수 없듯이, 성도도 세상을 떠나서는 살 수 없습니다. 하지만 성도는 세상 속에서 살아가되, 세상 사람과 똑같이 세상의 풍조를 따라 살아가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성도는 이 세상에서 구별되어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권면합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성도는 세상 속에서 세상 사람과 평화롭게 살아야 하고 세상 사람과 거래도 해야 하지만, 세상 사람과 는 도무지 닮아서는 안 될 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성도는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세상은 하나님을 섬기지도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다른 주인을 섬기며 다른 주인의 뜻을 따릅니다. 바로 여기서 성도는 결코 머뭇거려서는 안 됩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주님으로 섬기는 일에 조금도 주저가 있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성도가 세상 속에서 살아가다 보면, 세상으로부터 받는 유혹과 압력이 한 두 가지가 아닐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영적인 싸움이 일어납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여러 번의 위기가 일어났지만, 아마도 가장 강력한 위기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서 일어난 위기일 것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 정착하면서,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의 이방 문화와 종교에 서서히 동화되기 시작하였습니다. 무엇보다도 가나안 사람들이 섬기는 신들은 가장 강력한 유혹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 탈출과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났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갖가지로 누렸으며,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지켜야 할 계명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제 가나안 땅에 정착하여 농사를 짓다 보니, 해방과 구원의 하나님보다는 풍요와 다산의 신이 더 간절히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마침 가나안 땅에는 바로 그런 신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곳의 신들은 바알, 아스타르테, 아세라, 아낫 등이라고 불리었는데, 이 신들은 대체로 자연의 힘을 대행하고 있었습니다. 이 신들에게 빌면, 농사가 잘 되고 가축이 잘 자라며 자녀를 많이 낳을 수 있다고 가나안 사람들은 믿었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성행위를 신성시하였으며, 그래서 신전 안팎에는 매음하는 창녀들이 우글거렸습니다.

여러 신들의 우두머리는 바알인데, 바알 종교는 인간을 동물 이상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가나안 사람들은 동물적인 욕구만을 만족시키려고 했으며, 그래서 도덕과 공동체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서서히 이런 바알 종교에 빠져 들어갔으니, 하나님의 노여움이 이만저만하였겠습니까? 비단 우둔한 백성만이 바알을 섬긴 것이 아닙니다. 솔로몬을 비롯하여 많은 왕들은 바알 종교를 묵과할 뿐만 아니라 공공연하게 조장하였습니다. 엘리야가 활동하던 시절은 바알 숭배가 극도로 성행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열왕기상 16절 30-33절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그 전의 모든 사람보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더욱 행하여,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 행하는 것을 오히려 가볍게 여기며, 시돈 사람의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로 아내를 삼고, 가서 바알을 섬겨 숭배하고, 사마리아에 건축한 바알의 사당 속에 바알을 위하여 단을 쌓으며, 또 아세라 목상을 만들었으니, 저는 그 전의 모든 이스라엘 왕보다 심히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노를 격발하였더라."

이방 여인으로 아합에게 시집온 이세벨은 한술 더 떠서 예언자들을 학살하였습니다. 이런 악한 행위 앞에서 많은 예언자들과 신하들이 침묵하거나 아첨할 때, 엘리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백성에게는 하나님과 바알 사이에서 하나를 선택할 것을 요구하고, 바알을 숭배하는 아합과 이세벨에게 결사항전을 선포합니다. 엘리야는 백성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지니라." 이세벨의 탄압에 숨죽여 지내던 백성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최후의 결전을 준비합니다. 엘리야는 소 두 마리를 가져오게 하여, 한 마리는 바알 예언자들에게 주어서 제단 위에 올려놓고 그들의 신의 이름을 부르게 하고, 한 마리는 엘리야 자신이 만든 제단 위에 올려놓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게 하여, 불을 보내서 응답하는 신이 참 하나님임을 증명하자고 제안하였습니다. 바알의 예언자들은 하루 종일 소리치고 춤을 추고 칼과 창으로 몸을 찔러 피를 흘렸건만, 바알은 전혀 응답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엘리야의 하나님은 그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하늘로부터 불을 내리셔서 제물과 단을 태우셨습니다. 이를 본 백성은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확신하고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로다"라고 외쳤으며, 엘리야의 분부대로 바알의 예언자를 사로잡아 모두 죽였습니다(18:39-40).

다른 일에서는 몰라도, 세상에서 "하나님을 섬기느냐 아니면 다른 신을 섬기느냐?"라는 결단 앞에서 성도는 조금도 머뭇거려서는 안 됩니다. 현대인은 옛날처럼 돌이나 나무에 새긴 우상을 섬기지는 않습니다. 그보다는 세상의 정욕과 쾌락, 특히 재물을 하나님처럼 섬깁니다. 이 점에서 성도는 단호해야 합니다. 옛날이나 오늘이나 재물은 참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지만 재물이 사람을 섬기도록 해야지, 사람이 재물을 섬기도록 해서는 안 됩니다. 아니 재물은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도구로 사용되어야 합니다. 예수님도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엘리야가 살던 까마득한 옛날에 많은 백성들과 심지어는 하나님의 예언자들조차 바알을 섬겼듯이, 오늘날에도 참으로 많은 사람들, 심지어 평신도들만이 아니라 교역자들조차 재물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성도는 세상과 전혀 구분이 되지 않는 짠맛을 잃은 소금이 되며, 교역자는 하나님이 아니라 다른 신을 전하는 거짓 예언자들이 되고 맙니다.

이 점에서 엘리야의 용기는 참으로 돋보입니다. 하나님의 예언자라고는 그 혼자만이 남고 바알의 예언자는 무려 450명이나 될 때, 엘리야가 혈혈단신으로 바알을 섬기던 막강한 세력들을 단숨에 이길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치듯, 오락가락하거나 머뭇머뭇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니 무엇보다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확신하였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대개 대중의 흐름에 휩쓸립니다. 나쁜 일에도 사람은 스스로 결단하기보다는 군중심리에 빠져 행동하기 쉽습니다. 더욱이 소수보다는 다수의 힘을 믿는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정의롭게 사는 소수의 사람들도 죄인으로 낙인을 찍히기 십상입니다. 이런 고독의 순간에도 하나님의 사람은 오직 하나님의 편에 섭니다. 하나님이 그의 편이 되신다는 사실을 굳건히 믿기 때문입니다. 세상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성도 여러분은 오늘 엘리야의 단호한 신앙을 본받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엘리야처럼 세상 속에서 살되, 세상을 이기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굳건히 서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은 여러분을 통해 지금도 큰 일을 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엘리야는 언제나 용기의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큰 일에는 성공했지만, 작은 일에 실패하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큰 전쟁에서는 이겼지만, 작은 전쟁에서는 진 사람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대중 앞에서는 당당히 이겼지만, 혼자서는 참담히 실패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남과의 싸움에서는 악을 물고 이겼지만, 자신과의 싸움에서는 처참하게 지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최근에 우리는 대중 앞에서는 크게 성공했지만, 자신과의 싸움에서는 참패하여 줄줄이 잡혀가는 정치인들을 많이 봅니다. 세계에서 내놓으라고 할 만한 대형교회를 이루었지만, 여자와 돈의 유혹에 걸려 참담하게 넘어지는 목회자들을 많이 봅니다. 남부럽지 않게 출세하였지만, 부패와 불의와 불신에 빠진 평신도들을 많이 봅니다.

대중의 갈채를 받는 싸움이든 홀로 싸우는 싸움이든, 큰 싸움이든 작은 싸움이든, 결국 모든 싸움은 자기와의 고독한 싸움입니다. 인간은 결국 혼자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결코 혼자서만 싸우지 않으며, 자기 힘만으로 싸우지 않습니다. 엘리야가 대중 앞의 싸움은 이겼지만, 고독한 싸움에서는 점점 패배자가 되어 갔습니다. 하나님이 늘 함께 하시건만, 그는 지나치게 자신 속으로 물러갑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그와 함께 하건만, 그는 지나치게 고독 속으로 빠져들어 갑니다. 오직 자기 혼자만 남아 있는 듯이, 오직 자기 혼자서만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는 듯이, 자꾸 혼자만 되어 갑니다. 바로 여기에 실패의 원인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언제나 하나님과 함께 있고, 언제나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가건만, 자기 혼자서만 외로운 싸움을 싸우는 듯이, 자기 연민, 아니 소영웅주의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바알의 예언자들이 살육을 당한 후에 이세벨이 "나도 너를 죽이겠다. 내가 너를 죽이지 못한다면, 신들에게서 천벌을 받겠다"고 장담을 하자, 엘리야는 죽음이 두려워서 급히 도망을 갑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아무 일도 하지 못하는 벙어리와 같은 신, 돌과 나무처럼 우두커니 서 있는 바알 신이 무슨 천벌을 내리겠습니까? 이세벨의 호언장담은 다 허풍일 따름입니다. 더욱이 엘리야는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목도하였고, 바알 신은 헛것이라는 사실을 몸소 체험했습니다. 그는 백성의 뜨거운 지지와 환호를 받았습니다. 승리의 순간까지 그는 외롭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엘리야는 홀로 역사의 현장을 도피해 버립니다. 마치 자기 목숨이 하나님의 손에 있지 않고 바알 신에 있기라도 하듯이, 홀몸으로 비겁하게 광야로 도망쳐 버립니다. 더욱이 그는 로뎀 나무 아래 지친 듯이 쓰러져서 하나님에게 이렇게 외칩니다: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19:4). 그토록 용감하던 엘리야가 왜 이처럼 유약하게 변해버렸습니다.

바알의 예언자들과 싸울 때, 엘리야는 "나만 홀로 남았습니다"(18:22)라고 말하였는데, 지금도 그는 또 그렇게 말합니다: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19:10, 19:14). 그는 말끝마다 "나만 홀로 남았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언제나 그와 함께 계셨고, 19장 18절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고 바알에게 입을 맞추지 아니한 사람 칠천 명을 하나님이 남겨 놓으셨다고 합니다. 비록 하나님이 보이지 않더라도,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신실하게 보살피십니다. 비록 보이지 않더라도, 이 세상에는 신실한 성도들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의 동행이 있기에,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의 기도와 위로가 있기에 성도는 언제나 외롭지 않습니다. 그는 죽을 때에도 결코 혼자 죽지 않습니다. 하물며 살아 있을 때,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성도의 손길이 얼마나 가까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 속에서 살아가실 때, 비록 외롭고 힘들더라도, 결코 낙담하지 마십시오. 좌절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을 위해 기도하는 분들이 항상 계십니다. 엘리야처럼 홀로 있는 듯이 착각하지 마십시오. 다행히 하나님은 엘리야를 위로하셨고, 새로운 시대를 이끌어갈 사람들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비록 하나님의 사람은 쓰러지고 사라지더라도, 하나님은 당신의 일을 계속하십니다. 설령 유약하고 비겁한 성도들이 여러분을 떠나고 배반하는 한이 있더라도, 하나님은 끝까지 여러분 곁에 계십니다.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살아간다는 생각, 언제나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생각, 언제나 하나님의 품안에 있다는 생각 속에서 세상을 넉넉히 이기시기를 바랍니다. 아니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변화시키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나라의 미래는 평신도 여러분에게 달려 있습니다. 평신도 여러분, 파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