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하나님과 동행한 노아

 창 6:9-22

 

2003년 3월 30일, 현풍제일교회

 

 

이 세상에서 혼자 살아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외로운 인생의 나그네길에서 우리는 늘 동행할 사람을 찾습니다. 그래서 최성수도 "동행"이라는 그의 곡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습니다.  

 

아직도 내겐 슬픔이 우두커니 남아 있어요.
그날을 생각하자니 어느새 흐려진 안개,
빈 밤을 오가는 마음 어디로 가야만 하나.
어둠에 갈 곳 모르고 외로워 헤매는 미로,
누가 나와 같이 함께 울어줄 사람 있나요?
누가 나와 같이 함께 따뜻한 동행이 될까!
사랑하고 싶어요 빈 가슴 채울 때까지,
사랑하고 싶어요 사랑이 있는 날
까지.

 

밤처럼 외롭고 험한 이 세상, 어둠 속에서처럼 방황하는 이 세상에서 여러분과 함께 울어줄 사람, 여러분과 함께 따뜻하게 동행할 사람은 과연 누구입니까? 부모님입니까? 아내와 남편입니까? 스승입니까? 자녀들입니까? 아니면 친구들입니까? 저와 같은 목회자도 여러분의 동행이 될 수 있습니까? 이런 사람들 때문에 우리는 외롭지 않고 힘들지 않으며, 외롭고 힘들지만 그래도 살 만한 힘을 얻게 됩니다. 좋은 동행인, 좋은 동반자, 좋은 부모와 스승을 두고 있는 분은 참으로 복이 많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언제나 우리와 동행할 수는 없습니다. 부모와 스승, 자녀들은 언젠가 우리 곁을 떠나야 하며, 친구도 우리와 항상 동행하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언제나 동행이 필요한 외로운 사람입니다. 일평생, 아니 죽을 때까지 여러분과 동행할 분이 여기 계십니다. 그분은 바로 참 좋으신 하나님입니다. 설령 부모와 친구가 여러분을 버릴지라도, 하나님은 여러분을 버리시지 않습니다. 설령 스승과 자녀가 여러분을 외면할지라도, 하나님은 여러분을 언제나 지켜보고 계십니다. 아니 언제나 여러분과 함께 동행하십니다.

유명한 복음 전도자였던 존 길모어 목사는 어느 날 작은 마을을 지나다가 주방용품을 팔고 있는 어느 노인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안녕하세요? 할아버지, 요즘 장사는 잘 되시는지요?" "예, 그럭저럭 잘 됩니다." "할아버지는 예수님을 믿으십니까?" "물론 믿지요.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는다는 것은 정말 위대한 일인 것 같습니다." "그래요, 그렇지만 그보다 더 위대한 일이 있지요" "그래요? 그게 뭔데요?" "그건 나를 구원해 준 그분과 동행하는 것이지요."

수많은 유대인들이 학살을 당하던 독일의 포로 수용소에서 죽어가던 그 현장 속에서 유대인들은 눈물을 흘리면서 다음과 같이 외쳤습니다. "하나님 지금 어디 계십니까? 하나님, 왜 이런 사건을 허용하셨습니까?" 그러나 연합군이 수용소를 탈환한 후에 벽에 쓰여진 찬송가 가사를 보며 깜짝 놀랐습니다. 어느 그리스도인이 신앙의 고백으로 기록해 놓았던 구절이었습니다.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 다 형용 못하네." 저주와 이 지옥과 같은 이 수용소에서 하나님의 사랑이라니 웬 말입니까? 그러나 또 다른 곳에서는 이런 글자가 선명하게 쓰여져 있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여기에 계십니다(God is here)."

정말 칠흑같이 어둡고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우리도 종종 "하나님은 어디 계신가? 하나님은 도대체 무얼 하시는가? 하나님은 왜 우리를 외면하시는가? 아니 하나님은 왜 우리를 버리시는가?"라고 소리치며 질문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이 고백한 대로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롬 8:39). 그러므로 우리도 언제나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구약성서에서 일평생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 사람은 바로 노아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노아가 하나님과 동행하였다"(창6:9)고 말하고 있습니다. 노아는 어떻게 하나님과 동행하였습니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은 어떤 것입니까? 오늘 우리가 함께 읽었던 본문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비결을 찾아보고, 함께 은혜를 받기를 원합니다.

 

(1) 노아가 하나님과 동행하였다는 사실은 그가 의롭고 흠이 없이 살았다는 사실을  미루어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은 곧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하나님이 지금 여기에 존재하신다고 생각하며 사는 삶은 곧 하나님 앞에서 엄숙하게 사는 삶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며 심판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어찌 함부로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살아간다고 생각하면, 함부로 말하고 행동할 수 없습니다. 어른이나 높은 분 앞에서 우리는 언행을 삼가게 됩니다. 그러나 어른이나 높은 분이 없으면, 사람들은 자세를 흩트리며 마음대로 행동하게 됩니다.        

노아가 살던 시대는 인구의 폭발적인 증가와 더불어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사라져 가는 불신앙의 시대였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하나님이 없다는 생각 속에서 제멋대로, 아니 자기 욕망대로 살았습니다. 그리하여 윤리와 도덕이 붕괴하였습니다.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창 6:1-2)는 말씀은 성적 타락이 극도에 달하였음을 말합니다. 그리고 "온 땅이 하나님 앞에 패괴하여 강포가 땅에 충만한지라.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패괴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패괴함이었더라.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강포가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창 6:11-13)는 말씀은 폭력이 만연하였음을 말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물로 땅의 모든 것들을 쓸어버리시는 가혹한 심판을 내리셨습니다.

음란과 폭력의 시대에 노아만은 의롭고 흠이 없이 살았습니다. 음란하고 악한 시대에서 왜 유독 노아만은 의롭고 흠이 없이 살 수 있었습니까? 성경은 한 마디로 압축하여 "하나님과 동행하였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노아가 남달리 의롭게 살려고 노력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설령 그가 의롭게 살려고 발버둥쳤다고 하더라도, 혼자만 의롭게 살기가 얼마나 어려웠겠습니까?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인간의 결심과 의지라는 것이 얼마나 강하던가요? 도도한 시류와 거대한 조직 앞에서 우리의 의지가 얼마나 쉽게 무너지던가요? 그런데 오늘의 시대는 노아 시대보다 더 음란하고 폭력적인 시대입니다. 광고 매체의 발전과 더불어 음란 문화가 얼마나 기승을 부리는지 여러분은 잘 아실 겁니다.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곳곳에 음란 문화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도 한국은 둘째를 가라면 서러울 정도일 겁니다. 그리고 오늘의 시대는 과거와는 이루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폭력이 지배하는 시대입니다. 9.11 테러와 아프칸, 이라크 전쟁을 보십시오. 과거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대량 살상이 대낮에 버젓이 자행되고 있습니다.

이런 험악한 시대에서 우리는 우리의 의지만으로는 의롭게 살아갈 수 없습니다. "나는 언제나 하나님과 동행하며 산다, 나는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살아간다"고 생각할 때에만 비로소 우리는 함부로, 우리 마음대로 살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노아 시대의 생명들을 홍수로 심판하셨듯이, 하나님은 우리도 언젠가 공의로 심판하실 거고 생각할 때에만 비로소 우리는 의롭게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의로운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안 계신다고 생각하면, 인간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모든 언행에 대해 책임을 질 날이 반드시 올 것임을 믿기 때문에 우리는 무엇이든지 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권면하였습니다.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왔음이니라. 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라"(롬 13:11-13).

 

(2) 노아가 하나님과 동행하였다는 사실은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며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였다는 사실을 미루어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은 곧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삶입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존재를 마음으로 믿고 의지했을 뿐만 아니라, 행함으로 순종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을 만드신 하나님에게 모든 일을 의탁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습니다.

젊은 자동차 정비사가 헌 차를 한 대 싸게 샀습니다. 거의 굴러가지도 않을 정도인 고물 차를 열심히 수리해서 타고 달리니 기분도 좋았고 자기의 기술이 자랑스럽기도 했습니다. 하루는 그 차를 운전하여 장거리 여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도중에 엔진이 털털거리더니 딱 멎어 버렸습니다. 젊은이는 차에서 내려서 뚜껑을 열고 고장난 원인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에 마침 지나던 차 한 대가 옆에 정차하더니, 노인 한 사람이 내려와 젊은 정비사 곁에 와서 엔진을 함께 들여다보았습니다. 청년 정비사는 그 노인을 바라보고 "문제없습니다. 그냥 가세요. 나는 정비사입니다."라고 하면서, 자신만만한 태도로 여기 저기를 찾아 만져 보았습니다. 그러나 고장을 고치지 못했고, 시동은 여전히 안 걸렸습니다. 그러자 그 때까지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노인이 말했습니다. "젊은이, 내가 좀 도와주지." 그러면서 손가락 하나로 엔진의 한 부분을 톡 친 후에 "자, 발동을 걸어 보시오" 라고 했습니다. 의심쩍은 얼굴로 청년이 발동을 걸어 보니 엔진이 "붕" 하며 잘 돌아갔습니다. 기가 막힌 정비사 청년은 그 노인을 의아스런 눈으로 쳐다보며 물었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대체 누구십니까? " 그러자 그 노인은 대답했습니다. "아, 나는 이 자동차를 만든 헨리 포드요."

여러분을 만드신 하나님은 여러분을 여러분 자신보다 더 잘 알고 계십니다. 영이신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여러분보다 더 가까이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십시다. 잠언은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 3:6)고 말합니다. 베이커는 순종이란 "주님께서 돌담을 뛰어 넘어가라 명령하신다면 그대로 하는 것이다. 뛰는 것은 내가 할 일이고, 넘게 해주시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순종이란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맡기고 따르는 것입니다. 파스칼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길은 나의 모든 것 몸, 마음, 물질, 시간, 명예, 그리고 영혼까지도 주님이 주장하시도록 맡기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뢰와 순종은 말처럼 그렇게 쉽지가 않습니다. 중세의 한 성자가 어느 날 아침에 새들에게 먹을 것을 주려고 하였습니다. 그 날은 찌푸린 하늘에 몹시 추운 날씨였고, 땅 위에는 하얀 눈이 덮여 있었습니다. 그는 문 밖에 나가 곡식을 한 움큼 뿌린 후에 새들이 와서 주워 먹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새들은 눈을 멀뚱멀뚱 뜨고 멀리 앉아서, 추위와 배고픔에 떨면서도 두려워 가까이 오지 않았습니다. 새들이 그를 신뢰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거기 앉아서 새들을 쳐다보며 기다리는 동안 차츰 하나님의 마음을 이전보다 더 분명히 깨달을 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여러 가지 계획을 세우시고, 기다리시며, 우리들이 하나님의 놀라운 뜻과 계획과 사랑들을 받아들이기를 기다리고 계시다는 것을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과 사랑을 믿지 못하여, 먹이를 눈앞에 두고도 먹지 못하는 추위에 떠는 새처럼 하나님의 계획과 사랑을 신뢰하지 못하여, 이를 우리의 것으로 삼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리석은 새와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노아도 평범한 사람인지라, 다른 사람들처럼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을 수도 있었으며,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도무지 이해될 수 없었습니다. 사람도 자신이 만든 물건이나 자신이 낳은 자식들을 애지중지합니다. 아무리 물건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이를 송두리째 버리지는 않습니다. 아무리 자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자식을 완전히 없애버리지는 않습니다. 하물며 사랑의 하나님이 정성스러이 만드신 천지만물을,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을 모두 물로 쓸어버리시겠다니,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는 일입니까? 더욱이 노아는 거의 백년 동안 방주를 만든 셈입니다. 일년 이년도 아니고, 거의 백년 동안 방주를 만들어야 한다니, 도대체 말이 되는 겁니까? 다른 사람들의 조롱도 조롱이지만,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참으로 한심했을 겁니다. 백년 후에 과연 홍수가 일어날 수 있을까? 그 때가서 어떻게 되든지, 차라리 지금은 조금 편하게 사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백년 후에 일어날 일을 위해 미리 귀한 시간과 정력과 재산을 탕진하느니, 차라리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늙어지면 못 노나니" 하면서 즐겁게 노는 것이 더 현명한 일이 아닐까? 노아에게 왜 이런 저런 생각이 들지 않았을까요?

그런데도 노아는 거의 백년 세월을 아무런 불평도 없이 묵묵히 방주를 지었습니다. 참으로 순종의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만약 하나님과 늘 동행하는 삶을 살지 않았더라면, 이런 순종은 불가능했을 겁니다. 하나님이 언제나 내 앞에 계신다. 하나님이 언제나 나와 함께 계신다. 더욱이 하나님의 생각은 나의 생각보다 더 뛰어나다. 인간으로서는 하나님의 계획을 다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먼저 우리의 신뢰와 순종을 요구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언제나 신실하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이렇게 확고히 믿는 믿음 속에서 우리는 모든 것을 하나님에게 맡길 수 있습니다.

오늘의 시대는 음란과 폭력의 시대요, 불신앙의 시대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믿지 않겠다고 결심한 이후로 인간은 더 행복해지지도 않았고, 더 평안해지지도 않았습니다. 인간이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있고 실천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행동할수록 인간은 더욱 불안해졌고, 그래서 더욱 폭력적인 존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없을 때에야 비로소 인간은 자유로울 수 있다고 생각하며, "하나님은 안 계신다, 하나님은 죽었다, 아니 우리가 하나님을 죽였다"고 말하는 인간은 그후로부터 더 많은 인간을 죽였고, 더 많은 자연을 파괴했으며, 더 많은 자유를 잃었습니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사는 것이 진정한 자유가 아닙니다. 하나님 안에서 우리는 진정한 자유를 누립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 앞에, 하나님 안에, 하나님과 함께 살도록 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도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남은 길은 오직 한 가지 뿐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고 신뢰하는 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시대가 어려울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나고 부인할수록 여러분은 하나님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준비할 방주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교회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조롱해도, 세상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하나님은 교회를 위한 여러분의 땀과 수고를 다 기억하시고, 심판의 날에 갚아주십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하나님과 동행하심으로써 이 세상을 이기고, 심판을 이기고, 영원히 승리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