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예배

 

사 1:10-20

2003년 10월 5일, 현풍제일교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평강을 기원합니다. 오늘은 이사야 1장 10절-20절 말씀을 중심으로 예배의 진정한 의미와 목적이 무엇인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약속대로 애굽의 노예생활에서 벗어나 가나안 땅을 향해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출애굽 사건은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의 표현이었고,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신실함의 증거였습니다. 하나님의 기적적인 능력과 신실하신 인도를 통해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체험한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하나님에게 진정으로 감격스러운 예배를 드렸습니다. 인간 편에서 보면, 예배는 구원의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자발적인 감사의 표시입니다. 하나님의 편에서 보면, 예배는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의 상태 안에서 늘 보존하시려는 하나님의 배려입니다. 그리하여 모세를 통해 광야의 성전과 예배에 관한 많은 제도와 율법이 제정되었습니다. 예배는 감사와 찬양, 속죄와 기도, 사귐이 이루어지는 거룩하고 은혜로운 사건입니다. 예배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은 지난날의 하나님의 구원 행위를 기억하고 감사했으며, 험한 인생 길에 함께 동행하시는 하나님을 확신하며 용기와 기쁨을 누렸으며, 하나님이 약속하신 소망을 바라보며 하나님에게 영광과찬송을 돌렸습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솔로몬은 당대에 가장 뛰어난 기술과 재료를 사용하여 화려한 성전을 지어 하나님에게 바쳤습니다. 하지만 외양적으로 가장 화려한 성전 건설과 함께 예배의 참된 정신은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솔로몬은 이방 여인과 결혼한 이후로 점차로 이방인의 풍습과 의식을 끌어왔으며, 이스라엘 백성들도 점점 혼합주의에 빠져들었습니다. 하나님 신앙과 바알 신앙의 갈등은 갈멜 산에서 전개된 엘리야와 바알 선지자 간의 격렬한 투쟁에서 최고도에 달했습니다. 여기서 엘리야는 바알 신앙에 대해 놀라운 승리를 거두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수많은 왕들과 우둔한 백성들은 바알 신앙의 유혹을 쉽게 뿌리칠 수 없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여러 예언자들이 등장하여 이스라엘 백성의 가증스러운 신앙 행위를 신랄하게 고발하고 비판하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었던 말씀을 통해서 이사야가 통렬하게 꾸짖었던 잘못된 예배 관행이 무엇인지를 알아봄으로써, 하나님이 원하시는 참된 예배가 무엇인지를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우리가 읽었듯이, 하나님은 당신이 친히 제정하신 제사를 왜 완전히 물리치시는 듯한 심한 말씀을 하십니까? 모세를 통해 예배 제도를 제공해 주신 하나님이 왜 예배를 일절 거절하시는 듯한 과격한 말씀을 하십니까? 하나님은 예배를 완전히 없애기를 원하시고, 그 대신에 올바른 윤리 생활을 원하시는 겁니까? 하나님은 어떤 예배를 싫어하시고, 어떤 예배를 기뻐하십니까?

 

첫째로 하나님은 생활과 무관한 예배를 싫어하시고, 생활 속에서 순종의 열매를 맺는 예배를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수많은 기도와 제사를 드리면서도 실제 생활 속에서는 온갖 악행을 저지르는 이스라엘 백성의 위선을 다음과 같이 고발하십니다.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1:13).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1:15). 하나님은 생활과 무관한 예배, 아니 생활 속에서는 태연하게 악행을 행하면서도 하나님 앞에서는 거룩한 척하며 드리는 예배를 아주 싫어하십니다. 이런 예배는 무익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괴롭게 하고, 분노케 합니다. 생활을 무시한 예배는 참된 예배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생활 속에서 순종의 열매로 드러나지 않은 예배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말입니다.

한국 교회는 세계 사람들이 경탄할 정도로 비약적인 성장을 이룩하였습니다. 세계 10대 교회 중에 한국에 여러 교회가 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한국 교회는 세계 방방곡곡에 많은 선교사들을 보내고 있으며, 그리하여 우리에게 복음을 전해준 외국 교회들이 이젠 거꾸로 우리를 부러워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 교회는 예배와 생활의 일치를 가르치는 데는 실패했습니다. 그 동안 대형교회의 여러 목회자들이 비리에 연루되어 언론에 크게 보도되었을 뿐만 아니라, 많은 평신도들도 수많은 비리와 부패에 연루되었습니다. 물론 그 일차적 책임은 본을 보이지 못한 목회자들에게 있으며, 그래서 며칠 전에 영남지역총회에 속한 성결교회 목회자들이 금식하며 회개의 모임을 가진 적이 있습니다.

한국 교회는 외형적으로는 비약적으로 발전했지만, 내면적으로는 성숙하지 못했습니다. 아직도 100년이 지난 한국 교회에 여전히 기복신앙이 성행하고 있으며,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은 자본주의의 논리에 적극 편승하여 외형적 성장과 성공만을 열렬히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럴수록 교회의 공신력과 사회적 감화력은 오히려 점점 떨어지고 있으니, 하나님에 앞에 참으로 부끄러운 한국 교회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오래 전에 이사야가 고발한 이스라엘 백성의 잘못이 한국 교회에 고스란히 이어져 내려오는 것 같아 슬픔과 우려를 금할 수 없습니다. 생활과 분리된 예배를 하나님은 전혀 받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대단히 역겨워하십니다. 남을 탓할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드리는 예배도 이런 예배가 아닌지 냉정히 되돌아보고, 공의와 사랑의 실천으로 이어지는 참된 예배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형식적인 예배를 싫어하시고,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기뻐하십니다.

예배의 근본 정신은 하나님과의 살아 있는 관계를 늘 유지하고, 하나님의 뜻을 새롭게 발견하고 실현하려는 데 있습니다. 애굽에서 해방되어 광야에서 하나님의 생생한 도움을 받던 시절의 이스라엘 백성은 참으로 이런 예배 정신을 가지고 하나님을 공경했습니다. 그러나 가나안 땅에 정착한 후 시간이 흐를수록 예배는 점차로 형식적인 예배로 변질되고 말았습니다. 신령한 예배는 습관적인 행위로 굳어져 갔고, 감격적인 신앙은 반복적인 의무로 무디어져 갔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과의 살아 있는 관계가 율법적인 관계로 변질되었고, 그래서 이제는 예배의 정신보다는 예배의 형식을 강조하는 데 치중하게 되었습니다.

오늘의 본문을 다시 한번 자세히 읽어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은 일종의 예배광, 광신적인 예배주의자가 된 듯한 느낌입니다. 외형적으로 보면, 그들만큼 그렇게 열렬히 하나님을 섬긴 백성도 없을 것입니다. 그들은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을 비롯한 많은 제물을 하나님에게 드렸고, 수송아지와 어린 양, 수염소의 피를 하나님 앞에 뿌렸습니다. 하나님에게 수많은 분향을 올렸고,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를 비롯한 수많은 절기를 지켰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하나님은 이처럼 많은 예배를 드리는 이스라엘 백성을 참으로 기쁘게 여기셔야 옳으며, 이스라엘을 한없이 축복하였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향해 분노의 감정을 숨기지 않으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들은 하나님에게 많은 예배를 드려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줄로 착각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칭찬과 예배에 목마른 분이 아닙니다. 참된 예배는 물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만, 예배의 진정한 유익은 하나님에게 있기보다는 사람에게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착각합니다. 하나님이 마치 예배에 굶주린 분이라고 되는 듯이, 그리고 많은 예배를 드리면 드릴수록 하나님을 더 기쁘시게 하실 수 있는 듯이, 아니 많은 예배를 드리면 드릴수록 더 많은 축복을 받을 수 있는 듯이 착각합니다. 그럴수록 사람은 진정한 예배를 드리는 데 실패합니다. 너무 자주 드리는 예배로 인해 사람들은 늘 부산하고 산만합니다. 그래서 그는 단 한번의 예배 속에서도 하나님과의 생생한 관계를 맺지 못합니다. "오늘이 아니면, 내일 드리지." "한번이 아니면, 두 번, 세 번, 아니 자꾸 자꾸 예배를 드리다 보면, 언젠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겠지" 하고 미루며, 습관적인 예배에 중독이 되어갑니다. 그럴수록 예배는 점점 감격을 잃어가고, 그저 습관적으로, 혹은 남에게 보라는 듯이 예배를 드립니다.

한국 교회가 비약적으로 성장한 것은 분명히 부지런히 모이기에 힘썼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실로 한국 교회만큼 자주 모이는 교회는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대개의 서구 교회는 일주일에 단 한번, 주일 오전에만 예배를 드립니다. 하지만 한국의 교인들은 주일 오전예배만이 아니라 주일 오후예배 혹은 저녁예배, 수요예배, 금요예배, 구역예배, 새벽예배, 심방예배 등을 드리며, 갖가지 명목으로 헌금을 드립니다. 그 모든 예배와 헌금이 정말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지는 것이라면, 하나님을 얼마나 기쁘시게 하겠으며, 사람에게 얼마나 큰 유익이 되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한국 교회는 이전보다 훨씬 더 자주 예배를 드리지만, 이전보다 훨씬 더 감격이 없는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이전보다 더 많은 헌금을 드리지만, 이전보다 훨씬 더 정성이 부족합니다. 그럴수록 더욱 더 초조해져서, 자꾸 새로운 예배를 만들어 내고, 새로운 헌금 명목을 만들어 냅니다.

이런 형식적이고 습관적인 예배를 하나님이 기쁘시게 받으시겠습니까? 부모님에게 정성이 없는 많은 돈을 드리기보다는 적은 돈이라도, 아니 돈을 전혀 드리지 않더라도 자주 문안을 드리고 찾아 뵙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하나님에게도 마찬가집니다. 형식적이고 외형적인 많은 예배보다는 진지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드리는 단 한번의 예배를 하나님은 더 기뻐하십니다. 한국 교회는 많은 예배로 참된 예배를 망가뜨리는 것 같고, 많은 헌금으로 참된 헌금을 망가뜨리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평소부터 한국 교회의 예배와 헌금 명목을 좀 줄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왜냐하면 한국의 교인들보다 훨씬 덜 예배와 헌금을 드리는 서구의 교인들이 한국교인들보다 훨씬 더 경건하게 예배를 드리고, 말많은 한국 교인들보다 훨씬 더 묵묵히 인류의 발전을 위해 크게 헌신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모든 원인을 많은 예배와 많은 헌금에 돌릴 수는 없지만, 정말 하나님에게 중요한 것은 양이나 외형이 아니라 질과 내용이라는 사실을 명심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겉모습보다 속마음을 보시며, 외형적인 예배보다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예배를 기쁘게 받으십니다. 오늘 우리의 예배도 형식적이고 습관적인 예배가 아닌지, 우리가 드리는 헌금이 의무적인 헌금이 아닌지 진지하게 반성함으로써, 앞으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참된 예배와 헌금을 드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