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하나님은 새 힘을 주신다

 

사 40:27-31

  2004년 2월 29일, 현풍제일교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한 주간 평안하셨습니까? 아니 이렇게 물으면, 제가 세상 물정도 잘 모른다고 타박하시는 분도 있을 것 같습니다. 다시 고쳐 묻겠습니다. 한 주간도 힘든 세상을 사시느라 고생이 얼마나 심하셨습니까? 경제 문제로, 고부간의 문제로, 부부간의 문제로, 자녀 문제로, 직장 문제로 혹은 다른 문제로 고생이 많으셨을 줄 압니다. 저도 솔직히 이번 주간은 마음이 좀 심란했습니다. 해가 바뀌면서 우리 교회도 질적, 양적으로 좀 나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한데, 우리 교회가 오히려 퇴보하는 것만 같아 마음이 좀 우울했습니다. 이 모든 게 저의 부족과 부덕 때문이므로 누구에게 원망할 수 있겠습니까? 단지 하나님께서 저를 이곳에 보내신 특별한 뜻이 있을 텐데, 제가 하나님의 뜻을 잘 분별하고 실천하는지를 되새기면서, 기도하며 반성해 보았습니다.

우리 주변을 둘러보아도, 즐거운 소식보다 우울한 소식이 더 많이 들려옵니다. 심각한 경제난으로 강도와 납치를 일삼는 사람들과 자살하는 사람들이 늘어납니다. 경제는 금방 좋아질 것 같지 않은데, 물가와 교통비는 덩달아 오릅니다. 한창 일해야 할 젊은이들이 직장을 잡지 못해 방황하는데, 이들에게 희망을 주어야 할 기성 세대는 부패 때문에 도리어 지탄을 받고 있습니다. 가는 곳곳마다 사람들은 살기 힘들다고 불평합니다. 국민들은 노무현 정부가 무능하다고 불평하고, 국민들 서로 간에도 진보와 보수로 나뉘어 서로 헐뜯습니다. 정치인들도 부패의 책임과 개혁의 짐은 남에게 떠넘긴 채, 서로 멱살을 잡고 싸웁니다. 이러한 중에도 정치인들은 국회의원의 숫자를 늘리는 등, 자기 밥그릇을 챙기는 데에는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기업가들은 강성노조 때문에 사업을 못하겠다고 불평하고, 노동자들은 악덕 기업가들을 향해 화염병을 던집니다.

주부의 장바구니는 날로 가벼워지는데, 자녀들의 과외비용은 날로 늘어만 갑니다. 과중한 학업에 눌려 사는 불쌍한 자녀들은 설상가상으로 강도와 살해의 표적이 되곤 합니다. 이런 어려움 중에 그나마 가정이 든든하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불행하게도 한국의 이혼율은 이미 선진국 수준을 넘어섰습니다. 이래저래 불평과 불만이 가득한 세상 속에서 살아가노라면, 우리도 점점 불평에 더 길들여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점점 웃음을 잃어가고 있으며, 하나님과 부모와 이웃을 향해 감사보다는 불평을 더 많이 쏟아내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었던 본문도 바로 하나님께 탄식하며 불평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불평의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랫동안 바벨론 포로 생활을 하는 자기들의 어려운 처지와 상황을 하나님께서 돌아보시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의 원통함을 하나님께서 모른 체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것은 그들의 범죄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외하기는커녕, 우상을 섬기고 폭력과 불의를 자행했습니다. 그들을 깨우치려고 보냄을 받은 예언자들의 목소리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을 징계와 교육의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오랫동안의 포로 생활에 지친 나머지 절망 상태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이젠 하나님에게 구원해 달라고 애원하기보다는 불평을 마구 늘어놓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나라도 일본의 침략과 6.25 전쟁을 당할 때, 하나님께서 징계의 채찍을 내리쳤다고 하면서 회개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여러 해가 지나자, 우리는 "언제 그런 일이 있었더냐?"는 듯이 다시 교만해지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기 시작했습니다. 감사보다는 불평이 많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우리의 사정도 옛날 이스라엘 백성의 사정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곳곳마다 불평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의 범죄는 잊어버리고 하나님에게 원망과 불평을 크게 늘어놓기 시작할 때, 이사야 예언자는 동족에게 오늘의 말씀을 전달합니다. 이사야는 백성의 불평에 맞서 두 가지 답변을 내놓습니다. 먼저 이사야는 이스라엘 백성이 지금 눈앞에 닥친 어려운 상황에 대하여 불평하는 것이 잘못임을 꾸짖습니다. "야곱아, 네가 어찌하여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하여 이르기를, 내 사정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원통한 것은 내 하나님에게서 수리하심을 받지 못한다 하느냐?" 이렇게 반문한 후에 이사야는 영원하신 하나님,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위로의 말을 전합니다.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자는 피곤치 아니하시며 곤비치 아니하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 하시나니."

우리가 지금 어떠한 상황에 있든, 그리고 그 책임이 누구에게 있든, 하나께서는 우리를 잊지 아니하시고 다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종종 우리를 징계하시거나 억울한 고통에 빠뜨리실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나 몰라라"하고 내버려두시지 않습니다. 장애 자녀를 둔 선진국의 부모들을 보면, 우리의 부모들과 달리 매우 매정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자녀가 거동하기 매우 불편하며 고생을 매우 하는데도, 여간해서는 도와주지 않습니다. 일일이 도와주면 스스로 일어설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최대한 자립능력과 자립정신을 길러주기 위함입니다. 하지만 부모는 항상 자녀를 주시합니다. 잠깐 시선을 돌리더라도, 위급할 때를 감안하여 늘 자녀 주위를 맴돕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니 하나님은 육신의 부모보다 더 신실하신 분입니다. 육신의 부모는 자녀를 외면하고 심지어는 버릴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때로는 우리를 징계하시고 고통 가운데서 교육하시지만, 결코 우리를 내버려두시지 않습니다. 우리의 머리카락을 다 세시는 분께서 우리의 고통과 원통함을 모르시겠습니까? 동물도 자기가 낳은 새끼를 돌보거늘, 우리를 창조하시고 구속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외면하실 까닭이 있겠습니까? 다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언제,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실 지를 모르기 때문에 답답해하고, 그래서 불평하게 됩니다. 하지만 어떤 역경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주무시지도 않고 우리를 보고 계시며, 언젠가는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우리를 구원하실 것입니다. 이를 아는 것은 우리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됩니까? 그래서 옛적에 이름이 없는 한 신앙인도 다음과 같이 노래했나 봅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 너를 지키시는 자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시 121:1-6).

더욱이 하나님께서는 다만 우리를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하시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의뢰하는 자에게 힘을 주신다고 이사야는 말합니다. 영원하신 하나님, 땅 끝까지 창조하신 하나님은 피곤하시도 아니하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 힘을 더 하신다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마치 독수리가 날개를 치며 솟아오르듯 올라갈 것이요, 뛰어도 지치지 않으며, 걸어도 피곤치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앙망한다는 말은 '하나님을 믿고 기다린다', '하나님을 소망으로 삼는다',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말입니다.

윌리엄 카우퍼라고 불리는 성도가 있습니다. 그는 본성적으로 우울에 빠지거나 염려를 잘하는 편이었습니다. 그는 영적인 의심에 사로잡히곤 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버리셨다고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평생 동안 구원의 확신의 부족과 싸우며 살았지만, 카우퍼는 자기의 의심을 올바른 방법으로 다루었습니다. 그는 확신을 얻기 위하여 열심히 싸웠고, 진리를 강화함으로써 의심을 대적했습니다. 이 때문에 확신의 빛 가운데 주님과 동행하며 살았습니다. 그 결과 그는 다음과 같은 불멸의 시를 남겼습니다. "주 하나님 크신 능력 참 신기하도다. 바다의 폭풍 가운데 주 운행하시네. 검은 구름 우리들을 뒤덮을지라도, 그 자비하신 은혜로 우리를 지키네. 연약하여 흔들릴 때, 주 의지하여라. 어두운 구름 너머로 주 얼굴 보이네. 어둠에서 소경같이 헤맬지라도, 주 나를 불쌍히 보사 앞길을 비추리."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를 낙심케 하는 일들이 우리 주위에는 참으로 많습니다. 우리를 넘어지게 하고 자빠지게 하는 일들, 우리를 실망케 하고 좌절케 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이런 답답한  상황 속에서 저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는 새 힘을 얻는다"는 이사야의 말씀에 큰 힘을 얻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피곤한 자에게 새 힘을 주시며, 기운을 잃은 사람에게 기력을 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오로지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의지하고 그에게만 소망을 걸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실패란 없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그런 사람들은 새 힘과 삶의 용기를 가지고 살아 갈 수가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자신의 처지를 지나치게 생각한다면, 이는 우리 자신에게 초점을 맞추고 사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거대한 망원경으로 하늘을 바라보는 대신에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물론 만약 우리가 자신을 바라보지 않는다면, 경거망동하기 쉬울 것입니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자신을 바라보는 데 너무 집중하면, 우리는 항상 실망하기 쉽습니다. 왜냐하면 대개 우리는 자신을 과소평가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환경만을 지나치게 생각한다면, 우리는 거대한 망원경으로 밝은 별을 관찰하는 대신에 어두운 하늘만을 두리번거리는 것과 같습니다. 물론 만약 우리가 환경을 무시한다면, 현실에 적응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환경만을 너무 생각한다면, 우리는 항상 불안합니다. 왜냐하면 환경은 수시로 변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이렇게 자신과 환경에 크게 좌우된다면, 믿음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자신과 환경에 초점을 맞추는 대신에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십시오.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과 앞으로 하실 일에 초점을 맞추십시오.

지금 이사야도 포로가 된 자신의 처지와 환난에 처한 동족의 현실만을 바라보지 않고, 장차 하나님께서 행하실 위대한 구원을 바라봅니다. 가까운 장래에 바벨론이 페르샤에게 멸망을 당해,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의 고향을 돌아갈 것이라는 사실을 아무도 보거나 믿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믿음 가운데서 하나님의 위로의 약속을 듣습니다. "너희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너희는 정다이 예루살렘에 말하며, 그것에게 외쳐 고하라. 그 복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의 사함을 입었느니라. 그 모든 죄를 인하여 여호와의 손에서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사 40:1-2).

영국의 유명한 설교가, 스펄젼 목사님에게 젊은 신학생 한 명이 찾아와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목사님, 목사님도 낙망하신 일이 있습니까?" 그러자 그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놀라운 답변을 했습니다. "적어도 지난 20년 동안은 낙망해 본 적이 없네. 나는 그 동안 하나의 중요한 원리를 내 삶에 적용하고 있었지. 그 원리란 계속해서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라네. 나는 하루에 15분도 주님을 생각하지 않고 지나간 일이 없네. 그때 이래로 나는 낙망을 모르고 살아왔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도 하나님을 바라보는 가운데서 시시각각으로 밀려오는 걱정거리와 불평을 단호히 물리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에 대한 굳건한 믿음 속에서  힘겨운 세상을 능히 이기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