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스승은 있는가?

마 23:8-16

 1995. 5, 16. 서울신대 채플설교, 스승의 날 기념예배

 

 


1. 들어가는 말

오늘 스승의 날을 축하하는 이 예배시간에 설교할 수 있게 된 것이 본인에게는 무한한 영광인 동시에 무한한 괴로움입니다. 그러나 영광이라는 말보다는 괴로움이라는 말이 제게 더 실감있게 다가온다는 사실을 이 시간에 솔직하게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 비록 제가 젊은 교수이지만 여러분 앞에서는 스승의 자격으로서 감히 이 자리에 설 수 있다고는 생각되지만, 하나님 앞과 내 자신의 양심 앞에서는 스승으로서 여러분 앞에 서 있을 자격이 전혀 없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저는 며칠 동안 이 설교를 위해 고민하다가 제목을 잡기를 '스승은 없다!'라고 할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게 제가 며칠 동안 고민한 끝에 내린 결론이었습니다. 오죽하면 오늘 하루라도 스승의 날로 잡아 '스승은 있다!'고 떠들어 대겠습니까? 오늘 하루 '스승은 있다!'고 떠들어대는 것은 평소에는 '스승은 없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제가 '스승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이런 유치한 단순한 형식논리의 결론이 아니라 제 자신의 솔직한 결론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나 자신 앞에서, 교회 앞에서나 학생 앞에서 그 어떤 시각에서 보더라도 오늘 날 '스승은 없다'고 말하는 것이 정직한 결론이 아닌가 합니다. 하지만 '스승은 없다'라는 말이 요즘에 유행하는 '일본은 없다, ...는 없다'라는 말을 흉내내는 것 같기도 하고, 또 비관주의에 젖어버린 창백한 학자의 현학적 괴변 같아서 그만 포기하기로 결심했습니다.그래서 저는 오늘의 제목을 '스승은 있는가?'라는 것으로 잡았습니다. 스승은 있습니까?

2. 스승은 있는가?

'스승이 무엇이냐?'라는 질문은 꽤나 어려운 질문입니다. 왜냐하면 스승의 상은 시대와 환경에 따라 수시로 변해 왔기 때문입니다. 현대에 와서는 도덕적, 인격적 모델보다는 한 분야의 전문가, 고도의 지식인의 기능에 더 역점이 주어져 있는 게 사실입니다만, 가치중립적이고 행동과 무관한 지식은 엄밀히 보자면 없기 때문에, 오늘날에 와서도 여전히 스승 혹은 지식인의 모범적, 선구적 삶은 칭송되고 요구됩니다. 신학생들의 설문조사에서도 여전히 교수의 학문적 자질 못지 않게 인격적 자질을 중하게 여긴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대학의 울타리 안에서 스승을 규정해 볼 때, 과연 '스승은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은 상당히 부정적인 답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신학대학 내의 교수의 기능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교수는 모순적 존재입니다. 교수가 경제적, 정치적 독립을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일반적으로 더 자유롭고 창의로울 수 있겠으나, 대개의 교수들은 특정한 단체 즉 교단의 신학대학에서 그 교단의 설립정신에 봉사하고 있기 때문에 자유와 창의에는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습니다. 지식사회학적으로 말해서 교수라는 학자는 특정한 지배 이데올로기 집단에 소속되어 그 이데올로기를 보호, 양산해야 하는 임무를 부여받고 있습니다. 이것은 자발적이고도 책임적인 행위의 일부입니다.

하지만 그 어떤 이데올로기도 그 자체 안에 모순을 안고 있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즉 절대 이데올로기는 없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교단헌법, 교단신학, 아니 복음이라는 말로 특정한 단체의 이념을 표방하더라도, 그 이념은 그 자체의 정신에서부터 그리고 학문의 객관성 혹은 하나님의 진리라는 측면에서부터 늘 비판받고 검증받아야 할 처지에 있습니다.

그런데 신학대학의 교수는 정치적으로 힘이 약하고 자신을 고용한 대학의 이념에 봉사해야 하기 때문에, 늘 보수 이데올로기의 대변자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증세 아래 있습니다. 이것이 나쁘다는 말이 절대 아니라 그 자체 안에 모순을 안고 있다는 말입니다. 즉 교단신학이니 설립이념이니 복음이니 하는 것은 결국 자발적인 믿음과 동의에 기초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틀로써 학자를 강제로 구속하면, 이미 학자의 본질이 파괴되고 그 틀 자체도 정당성을 상실한다는 말입니다. 즉 학자가 어떤 이념에 헌신한다는 것이 정말 순수한 자발적 동의의 결과인지 아니면 경제적, 정치적 구속에 어쩔 수 없이 매이는 것인지 증명할 도리가 도무지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이념 자체도 결국 강제성을 띠어 신앙적 자발성을 희생시킨 대가로 유지되는 것입니다. 신앙에서 강제성은 치명적인 약점입니다. 이 강제성을 공동체의 합의정신이라고 아무리 둘러 말하더라도, 강제성은 특히 신앙공동체의 건강한 생명에는 가장 해로운 것입니다.

그렇지만 교수는 자신의 학문을 신앙의 자유와 양심 위에서 전개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려고 할수록 위태로워집니다. 즉 그는 감시와 비판 그리고 탄핵과 축출의 대상으로 격하됩니다. 교수를 비판할 수는 있을지언정, 언제든지 감시하고 탄핵하고 축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관행이 늘 존재하는 한, 이것은 결국 교수를 학자나 스승으로 보지 않고 하나의 지배 이데올로기의 하수인으로만 보는 것임을 증명합니다.

우리의 교수들은 늘 이런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교수들의 학문도 신앙처럼 항상 상대적일 수 있고 그래서 늘 비판의 척도 아래 있습니다. '신앙처럼'이라고 방금 말했습니다. 일반 신앙인과 목회자들도 얼마나 많이 신앙판단과 행위에서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까? 물론 이단적이라고 명백히 규정된 틀을 벗어나지만 않는다면, 그들은 보호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성서해석, 설교, 신학판단 그리고 신앙행위들은 수시로 규범을 일탈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학자의 비판의 대상은 될지언정 감시, 탄핵, 축출의 표적이 되진 않습니다.

물론 학자의 한 마디, 한 행동거지가 그들의 것보다 더 무겁고 신중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신앙처럼 학자의 학문도 늘 도상, 과정에 있고 그래서 기도와 자기비판의 정신 속에서 수행됩니다. 그러므로 교수들의 학문탐구의 과정을 길게 지켜보고 유연하게 판단하지 않고 지배 이데올로기를 허무는 자로 의심하고 쉽게 매도한다면, 누가 지배 이데올로기가 하나의 우상이 되고 전통이 죽은 과거가 되는 것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누가 교회의 자기비판적 기능을 담당하겠습니까?

이것보다 더 심각한 것은 진리가 진리의 이름으로 억압되고 복음이 복음의 이름으로 변질되는 일입니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지 말고 그 손가락이 가리키는 달을 보아야 하듯이, 진리를 가르치는 자는 늘 진리를 지시하는 중에 있어야 하고, 그럴 때에만 참 진리를 증언할 수 있습니다. 복음을 증언하는 자는 세례 요한의 손가락처럼 늘 복음을 지시하는 중에 있어야 하고, 그럴 때에만 복음이 오늘에 살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진리를 가르치는 자는 종종 진리를 속박하고, 복음주의자는 종종 복음을 망가뜨립니다. 자유주의자가 종종 자유를 남용하는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그러므로 지식의 전수자, 학자는 항상 치명적인 자기모순에 빠집니다. 바로 이 점을 예수님은 꿰뚫어 보셨습니다.

오늘의 본문에서도 예수님은 스승을 혹독하게 비판하십니다. 랍비, 지도자, 서기관은 예수님의 공격의 주된 목표였습니다. 왜 그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온갖 욕설을 얻어먹었습니까? 그들은 율법에 길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참으로 길이 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율법에 진리가 있다고 확신했지만, 그 율법이 지시한 진리가 예수님임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율법 안에 영생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영생이신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소경임에도 불구하고 소경을 인도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천국 문을 닫고서 남들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게 방해합니다. 그들은 스스로 높이지만 가장 낮은 자들입니다.

이것은 바로 지식인을 강제할 뿐만 아니라 지식인이 스스로 빠져드는 함정입니다. 즉 특정한 지배 이데올로기에 예속시키고 또 예속하는 자들은 그 이데올로기가 지시하는 영원한 진리, 참된 길, 영생을 거부하고 자신 안에 가두고 죽임으로써, 자신의 이데올로기마저 배반하고 파괴하는 자가당착적 일을 행합니다.

그러므로 학자는 이 두 가지 틈새, 즉 이데올로기의 보호와 그 비판의 틈새에서 고민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그 이데올로기의 정신도 살리고 그 목표를 달성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것이 제도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본 것 같습니다. 지배적 제도와 그 이데올로기에 편입되어 있는 학자는 도무지 그 틀을 벗어날 수 없다고 예수님은 보신 것 같습니다. 아니 학자도 그 스스로 학문적 예속성에 아부하고 노예화되는 근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 틀을 깰 수 없다고 생각하신 것 같습니다. 아마 그래서 예수님은 목회자(제사장)도 아니 되셨지만, 신학자(서기관)도 아니되신 것 같습니다. 그분은 세상 사람들이 당신을 랍비라고 부르는 것을 싫어 하셨습니다. 학자로서는 하나님의 온전한 뜻을 드러낼 수 없다고 보셨기 때문이겠지요. 그렇다면, 정말 이 땅에서 학자, 스승은 없다고 해야 하겠습니다.

그럼 누가 스승입니까? 오직 한분 하늘에 계신 하나님일 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시고 행하신 그리스도와 그분의 뜻을 행하는 자라면 '누구든지' 우리의 스승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스스로 스승이 되고 남을 스승으로 모시는 일에 매진하는 것이 저 같은 자를 스승으로 올려놓고는 수시로 깎아 내리는 것보다 훨씬 더 예수님의 뜻에 부합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스승의 날은 모름지기 스승체면을 세워주는 겉치레 행사의 날이 아니라 참으로 만인을 모두 스승으로 삼기 원하시는 하나님을 참 스승으로 믿고 바라는 날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만인이 스스로 스승이 되려고 하지 않으면서도 만인에게 스승의 본을 보여 주는 만인스승의 날로 삼았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