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미완의 혁명

빌 3:10-14

1994.4.29. 서울신대 채플설교

 

 

오늘이 무슨 날입니까? 제가 서울신대의 예배에서 처음으로 설교하는 날입니다. 아니 4,29입니다. 4,29가 무슨 날입니까? 4,19로부터 열흘 지난 날입니다. 4,19가 무슨 날입니까? 혁명일입니까 의거일입니까? 본래는 4,19가 혁명이었는데, 5,16 군사 쿠데타가 그 이름을 빼앗아 간 후에 의거로 바뀌었다가, 올해에는 다시 그 이름을 되찾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름이 시대에 따라 바뀌는 것도 가관이지만, 더욱 더 가관인 것은 4,19혁명 때에 코빼기도 내밀지 않던 여당 인사들이 4,19 혁명의 주역이요 그 혁명의 진정한 계승자라고 스스로 치켜세우면서 자축을 한 일입니다. 물론 그 중에는 4,19 시위에 가담한 자들도 몇이 있었겠죠. 그렇지만 4,19 혁명을 무참히 짓밟고 역사의 진로를 뒤돌려 놓은 5,16 쿠데타의 주역이요 유신본당으로 자처하는 자가 대표로 있는 여당이 갑자기 문민시대를 열었다고 해서 4,19 혁명의 계승자라고 우기는 것은 정말 개라도 웃을 일입니다.

더욱이 오늘 날 개혁적 인사들(한완상,이회창 등)을 부려먹다가 고분고분하지 않는다고 이들을 미친 개 내몰듯 내치는 현정권이 깜짝 쑈의 인기전술을 다 써먹고는, 이제는 국가경쟁력 운운하며 백성들을 기만하면서, 개혁조차 후퇴시켜 나가는 이 마당에, 도대체 갑자기 4,19 혁명 운운하며 떠들어대는 심사가 무엇인지 알고 싶습니다.

유럽에서 학생들의 반체제운동(신좌파운동)이 서서히 내리막길로 접어들던 1968년 어느 날, 독일의 프랑크푸르트 대학교에서는 웃지 못할 희한한 일이 하나 일어났습니다. 어떤 여학생이 일찍이 학생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던 한 노교수 앞에서 젖가슴을 다 드러내 놓고 나체시위를 벌린 일입 니다. 그것은 "혁명에 몸바칠 것을 선동하여 수많은 젊은이들을 희생시켜 놓고, 이제 와서 당신은 왜 혁명을 포기하는 발언을 서슴지 않느냐?"는 항의였으며, "나도 모든 것을 보여줄테니 당신도 그 위선의 탈을 벗고 본래의 정체를 드러내라!"는 도전이었습니다.

저도 요즈음엔, 비록 여학생은 아니지만, 충현교회 앞에서 김영삼 대통령을 기다렸다가 나타나면 알몸을 내어놓고 이렇게 외치고 싶은 심정입니다. 당신은 민주혁명을 이룩하자고 수많은 양심인사들, 학생들을 부추겨 투쟁하더니, 왜 대통령이 되고 나니 백성의 소리는 커녕 개혁인사의 소리도 안 듣고 내치느냐? 민주주의의 기수라고 앞장서던 당신이 왜 문민독재, 신권위주의를 불러들이느냐? 왜 헌법에도 없는, 군사 독재정권이 무자비하게 휘두르던 통치권이라는 칼을 휘두르며 일인독재를 자행하느냐? 왜 장로가 깡패 중의 폭력을 비호하느냐?" 등등 할말이 많을 것 같습니다.

어차피 현 정권이 개혁 아니 혁명의 대상인 옛 인물들을 끌어 앉고 탄생했으니, 현 정권이 내어놓은 구호라는 게 광주의 민중학살을 딛고 정권을 잡은 전두환 전 대통령이 내건 정의사회의 구현의 구호만큼이나 공허하기 짝이 없을 수밖에 없습니다.

도대체 인간이 떠벌린 온갖 혁명, 개혁, 새 창조라는 것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것이었습니까? 도대체 해 아래 새롭다는 것이 얼마나 새롭겠습니까? 인간의 혁명, 개혁이라는 것이 항상 일시적이고 제한적인 결과만을 가져왔습니다. 그것은 항상 새로운 지배 이데올로기가 되었고, 새로운 모순과 더 큰 반동을 가져 왔습니다. 물론 역사에 상대적인 진보가 있다는 것을 저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런 상대적인 진보에 우리의 모든 것을 걸고 웃고 울 까닭이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온 몸으로 신앙하고 희망하는 혁명은 되돌릴 수 없는 절대적인 혁명, 영원한 혁명, 진정한 혁명이어야 합니다. 그 혁명은 누가 일으켰습니까? 그리고 어떻게 일어났고, 지금은 어떻게 진행되어가고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던진 혁명의 불이며, 지금도 지구상 곳곳에 번지면서 불타고 있습니다.

저는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이 혁명적이라고 믿습니다. 만약 그분이 진정한 혁명가가 아니라고 한다면, 저는 역사상 그 많은 위인들 중에서 굳이 그분을 믿고 따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저만의 생각이 아니라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가 탄생을 앞두고 힘차게 선언한 것입니다(눅 1:46-55의 마리아의 혁명찬가 참조). 그분의 '하나님의 나라'의 선포는 기존관념, 기존체제를 전복시킨 것이었고, 그분의 삶도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초대교회가 케리그마의 중심으로 선포한 십자가와 부활은 그 어떤 것보다 더 혁명적이고 혁신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고난절과 부활절은 보낸 지 채 한 달도 안 되어서 우리는 마치 그것이 전혀 일어나지 않은 듯이, 마치 그것이 우리의 삶과 역사의 운명과는 전혀 상관없는 듯이 살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올해의 고난절과 부활절을 맞이한 후에, 우리는 정말 얼마나 변화되었고, 역사는 얼마나 변혁되었습니까?

만약 우리와 역사가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다면, 그 이유는 우리가 십자가와 부활을 바라보기만 했을 뿐이지, 그것에 참여하고 그것을 영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가 십자가를 우리의 죄를 사해주는 면죄부 정도로 생각하고 까마득한 옛 사건으로만 바라보았기 때문이며, 부활을 까마득한 옛 날에 한번 예고편으로 상영되었다가 언제 다시 상영될 지 모르는 막연한 미래의 한 편의 영화로만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닙니다! 십자가는 매일매일 세상을 못박는 못이며, 부활은 매일매일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입니다. 십자가를 믿는다는 것은 이 세상의 그 어떤 권력도 종교도 하나님 앞에서 의로울 수 없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권력과 종교가 결탁하여 예수님을 매단 십자가는 오히려 그것을 심판하는 하나님의 의의 계시였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비판 앞에서 견딜 수 있는 그 어떤 권력, 종교, 신학도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십자가는 기존상황을 전복시키는 역설적 사건입니다. 이 십자가를 믿고 그 고난에 참여하는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의 모든 것, 자기 자신까지도 철저히 전복시키는, 아니 죽이는 혁명가일 수밖에 없습니다.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죽음 너머의 생명, 내세의 소망만을 믿는 것이 아니라, 모든 죽음, 죽음의 문화, 죽음의 법을 역전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소동은 죽음을 모르는, 아니 죽음 이전의 소동입니다. 세상의 모든 개혁, 혁명은 죽음 앞에서 죽지 않으려는, 아니 기껏해야 화려한 무덤을 남기고 죽으려는 영웅들의 발버둥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모든 활동은 죽음의 법 아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역사의 바퀴는 죽음의 망령들, 아니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치지만 결국엔 남도 죽이고 자신도 죽는 죽음의 망령들의 힘에 의해 굴러갑니다.

그러나 부활은 이 죽음의 법을 생명의 법으로 되돌려 놓은, 아니 죽음조차 생명으로 거듭나게 하는 힘입니다. 이 보다 더 큰 혁명의 힘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것을 믿고 이에 참여하는 그리스도인보다 더 혁명적인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만약 우리가 십자가와 부활을 그냥 쳐다보지만 않고 이에 참여한다면, 우리는 이미 온 이 혁명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이 혁명은 아직 얻은 것도 아니요 온전히 이룬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 혁명을 우리는 오늘도 잡으려고 좇아가야 합니다. 이 미완의 혁명에 참여하는 전사가 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