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평화와 영광

눅 2:8-14

아현교회 성탄예배(98.12.5) 설교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단순히 역사의 달력을 주전(B.C)과 주후(A.D)로 나눈 데만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인류의 정신사에서 하나의 큰 혁명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가 아기 예수님을 수태하였을 때, "능하신 이가 큰 일을 행하셨다"(눅 1: 49)고 고백한 것처럼, 예수님의 탄생은 인류의 구원사에서 거대한 전환을 가져왔습니다. 예수님이 가져오신 거대한 전환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무엇보다도 인류가 진정한 평화와 영광에 이르기 위해서는 새로운 탄생을 해야 하며, 새롭게 거듭나야 하며, 완전히 뒤집어져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평화와 영광은 인류가 추구하는 최고의 가치입니다. 그런데 평화가 없는 영광은 반쪽 영광이듯이, 영광이 없는 평화도 반쪽 영광입니다. 비록 오늘의 본문("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은, 마치 영광과 평화가 따로따로 떨어져 있는 것처럼 말하는 것 같으나, 하늘의 영광은 또한 인간에게 임하며, 땅의 평화도 하늘로부터 사무치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이 서로 화답하듯이, 평화와 영광은 서로 화답하는 것입니다.

아기 예수님이 태어나실 때, 사실 이스라엘은 그 어느 때보다 평화로웠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주의자들의 무력 저항은 완전히 진압되었으며, 이스라엘의 파괴는 아직도 70년 후를 앞두고 있습니다. 이처럼 평화로운 때는 이전에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왜 이토록 평화스런 때에 하늘의 천사는 새삼 평화를 선포합니까? 그것은 이 평화가 가짜 평화이기 때문입니다. 이 평화는 로마의 철저한 무력 진압에 의한 평화였으며, 이스라엘의 무력한 절망에 의한 평화였습니다.

진정한 평화는 아기 예수님으로부터만 옵니다. 그는 평화의 왕으로 오셨고, 평화의 아들을 부르셨으며, 당신의 몸을 화해의 제물로 찢어서 갈라진 대적들을 하나가 되게 하셨습니다.

무엇으로 그리하셨습니까? 바로 그의 온유함, 낮추심, 비우심으로 그리하셨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왜 무력으로 이 세상을 평정하시지 못하시겠습니까? 하지만 그분은 힘의 길을 택하시지 않고 사랑의 길을 택하셨습니다. 당신의 낮추심을 통하여 온 인류를 드높이셨습니다.

오늘날 세계 각처의 분쟁은 저마다 자기가 더 잘났다고 다투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클린튼과 후세인이 서로 더 잘났다고 다투면서 중동을 불바다로 만들고 있습니다. 비움을 가르치는 불교계에서도 두 세력들이 서로 잘났다고 하면서 불당을 아수라장으로 만듭니다, 가정의 분쟁도 대개가 "자기가 더 잘났고, 자기가 더 잘했다"고 우기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그와는 정반대로 가장 높으신 곳에 계신 하나님은 영광의 자리를 비우시고 낮고 비천한 마구간으로 오셨습니다. 천사의 소식은 콧대높은 바리새인이나 박학한 율법사, 힘있는 로마인에게 먼저 임하지 않고, 들판에서 연약한 양을 치던 비천한 목자들에게 먼저 임했습니다. 이처럼 인류와 사회, 가정의 평화는 힘있는 자들을 통해 오지 않고, 섬기고 희생하고 양보하는 사람들을 통해 온다는 것을 아기 예수님은 몸으로 증거하셨습니다. 마리아가 증거하는 대로, 하나님은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를 내리치시며, 비천한 자를 높이십니다"(눅 1: 51).

오늘 이 자리에 계신 성도님, 아직도 가족과 친구, 성도 간에 평화를 이루지 못한 채로 여기에 오시지는 않았습니까? 설사 여러분이 더 잘났고 더 잘했다고 하더라도, 예수님을 본받아 여러분이 먼저 "잘못했다, 용서해 달라"고 낮추십시오. 설령 상대방이 "그래 니가 더 잘못했어"라고 나오더라도, 이 말을 끝까지 해 보십시오. 그러면 상대방도 언젠가는 고개를 숙일 것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고개를 숙이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영원히 구제받지 못할 사람이며, 하나님이 그 사람을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오늘 당장 평화를 실천하십시오. 이것이 성탄을 맞는 여러분이 실천하여야 할 첫 번째 가는 거룩한 의무입니다. 여러분을 평화의 사도, 하나님의 아들을 만드시기 위해 하나님이 이 비천한 역사의 수렁으로 오셨습니다. 그 크신 하나님도 이 일을 하셨는데, 먼지와 티끌 같은 우리가 왜 그 일을 못한다는 말입니까?

어떤 사람은 이렇게 물으실 것입니다. 세계의 유일 강대국이 어찌 저 졸개 같은 후세인에게 자세를 낮출 수 있겠는가? 숫자와 명분이 더 우세한 중들이 어찌 저 조무래기 중들에게 양보할 수 있겠는가? 사장이 사원에게, 남자가 여자에게, 어른이 자식에게 어찌 비굴하게 자세를 낮출 수 있겠는가? 이것은 치욕적인 일이다. 때로는 체면과 권위와 명예가 목숨보다 더 중할 때가 있지 않은가?

하지만 보십시오. 하나님도 그 일을 하셨습니다. 아니 하나님이 그 일을 하실 때, 하늘에는 영광이 가득하였으며 천사들이 하나님을 크게 찬양하였습니다. 여러분, 세상 영광을 본받지 마십시오. 세상 영광은 솔로몬의 말대로 헛되고 헛되며, 마치 구름을 잡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하늘의 영광은 영원합니다. 거룩합니다. 온 우주에 찬란합니다.

그런데 이 영광은 바로 마구간에서 가장 찬란하게 드러났습니다. 하늘의 별들도 이 영광을 흠모하여 빛을 환하게 비추어 주었습니다. 동방 박사는 이 빛을 따라 하나님의 아들이 누우신 자리를 경배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착각하지 마십시오. 하늘의 영광은 이 땅에서 가장 영광스런 대접을 받는 귀인들, 부자들, 권세가들에게 임하지 않습니다. 하늘의 영광은 자기를 낮추고 비우고 섬기는 자들에게 임합니다.

아기 예수님의 탄생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가장 분명히 드러낸 사건입니다. 그래서 천사는 예수님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은 무엇입니까? 웨슬리는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종종 찬송하시듯이, 임마누엘이신 주 예수보다도 더 귀한 것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이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강하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아기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사 우리 곁으로 너무나 가까이 오신 이 날에 그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지 않습니까? 이 사랑, 이 함께 함이야말로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가장 귀한 것이며, 이 함께 함을 이루기 위해 자신을 낮추고 비우고 희생하는 것보다 더 영광스러운 것은 없습니다. 바로 여기에 하나님께서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위대한 기독교 신비주의자 엑카르트(Eckhart)의 말로 설교를 마칠까 합니다. "인간이 가난하고 겸손해지면, 하나님은 모든 것 안에 모든 것이 된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