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하나님의 온전하심을 본받자!

 마 5:28-48

2000.4.24, 예닮교회(홍성주 목사) 주일예배(성결집회)

 
이신건


들어가는 말

이 땅에 성결의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받고 태어난 성결 교회가 날이 갈수록 맛과 멋을 잃어가고 있다. 이제는 한국 땅에 성결 교회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조차 희미해져가고 있다. "왜 사느냐?"고 물으면, "그걸 어떻게 아느냐. 태어났으니까 사는 거지"라고 말하는 사람처럼 "성결 교회가 왜 존재하느냐?"고 물으면, "지금껏 존재해 왔으니까 지금도, 또 앞으로도 그렇게 존재해 가는 거지"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되었다.

물론 교회는 오직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에게만 속해 있고, 그래서 교회는 어디에 있든지 하나의 보편적인 교회이다. 그리고 교회는 교파적, 지역적 특성을 드러내기 점점 더 어려워지는 좁은 지구촌에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자기 교파적 사명만을 고집하기보다는 이 세계 전반의 문제를 위해 모든 교회들이 함께 기도하고 논의하고 풀어가는 범세계적인 교회, 에큐메니칼한 교회가 되어야 한다. 교회는 각 교파의 교회이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하고 실현해가는 우주적인 교회이다.

하지만 몸의 머리가 하나이고 몸도 하나지만, 각 지체들이 제 각기 독특한 사명과 은사를 가지고 있듯이, 이 땅에 성결 교회가 존재하고 있고 또 앞으로도 계속 존재해야 한다면, 당연히 성결교회만이 가진 독특한 사명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지구화, 세계화가 반드시 획일화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지구 생명은 하나로서 생명 그 자체이신 하나님에게 속해 있지만, 생명의 현상은 각양각색으로서 무척 다양하고 풍부하다. 생명의 획일화는 생명의 황폐화를 의미한다. 바로 그처럼 교회도 하나이고, 그리스도 안에서 늘 하나됨을 추구해야 하지만, 교회는 그가 부름을 받은 자리와 해야 할 몫이 다를 수 밖에 없고, 그래서 지금도 전체 속에서 서로 다른 사명을 감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결 교회의 특성, 맛과 멋을 잃어 가는 것은 바로 성결 교회의 죽음을 뜻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다행히 성결 교단에서는 이 점을 잘 파악하고 올해부터 전국적으로 성결 세미나를 실시하여, 성결인의 참 모습을 재정립하려고 애쓰는 것은 비록 늦은 감이 있지만 무척 다행스럽고도 감사한 일이다.

여기서 본인은 "우리 선배들의 유산을 앵무새처럼 반복하자"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성결인들도 그들이 선 자리와 시대적 도전이 달랐던 만큼 서로 다른 강조점을 지녔으며, 그래서 성결인 사이에서도 서로 다른 사명을 감당해 왔던 게 사실이다. 성결 신학, 성결 운동에서도 하나의 획일적인 현상은 없었고, 지금도 없으며,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성결 교회의 풍부한 신앙적, 신학적 유산을 무시한다면, 부모가 없는 고아처럼 영적으로 방황하기 쉬울 것이다. 물론 우리의 신앙과 신학의 최고, 최대의 보고는 성경이다. 하지만 이를 각 시대와 장소에 따라 새롭게 보고 실천하려고 애썼던 우리의 선배들이 없었더라면, 오늘의 우리도 없었을 것이 아닌가? 그들에게 진 빚을 감사히 생각하면서, 저는 제가 처한 자리와 확신하는 바에 따라서 오늘 여기서 우리 성결 교회가 성취해야 할 사명을 피력해 볼까 한다.

 

본론

성결 교회는 무엇보다도 "완전한" 혹은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하는 열망에 의해 세워지고 또 세워져 나가는 교회이다. 성결 교회는 감리교회의 창시자인 요한 웨슬리의 신앙과 신학에 그 분명한 뿌리를 두고 있다. 요한 웨슬리의 가장 중요한 글 중의 하나인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읽어보니, 요한 웨슬리는 완전한 혹은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얼마나 열렬하게 갈망하였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 오늘 우리가 봉독한 본문 중에서 요한 웨슬리는 4장 38절의 말씀, 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는 말씀을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명령하는 가장 중요한 취지의 말씀으로 여겼다.

그런데 우리는 흔히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성결" 혹은 "성화"라는 말과 동일시하고 있다. 물론 이것은 바로 요한 웨슬리로부터 유래한다. 그는 "완전"이라는 말을 "성화"와 동일한 의미로 사용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완전"이나 "온전"이라는 말을 거의 쓰지 않고, "성화" 혹은 "성결"이라는 말을 쓰면서 본래의 취지를 살려 나가려고 한다.

하지만 언어, 즉 말과 글의 선택은 상당히 중요하다. 말은 곧 인격이고 힘이며, 존재의 집이 아닌가? 같은 음식이라도 그것을 담는 그릇에 따라 맛과 멋이 달라지듯이, 같은 내용이라도 그것을 담은 언어에 따라 그 특성이 달라지게 마련이다. 비록 "완전"을 "성화"와 동일시한 것은 요한 웨슬리이지만, 그의 글을 읽어보면, "성화" 혹은 "성결"이라는 말보다는 "완전" 혹은 "온전"이라는 말이 압도적으로 자주 나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짧은 시간에 그의 말을 다 인용할 수는 없지만, 제가 밑줄을 그으면서 요한 웨슬리의 글을 읽어보니까, 그의 마음은 얼마나 온전한 구원을 향한 열망으로 가득 차 있었는지를 생 생히 알 수 있었다. 그의 진정한 의도는 어디에 있었는가?

첫째로, 요한 웨슬리는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완전한 혹은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 경주하고자 노력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이루는 일에 가장 중요한 것은 통일되고 "순수하고 전적인 마음 자세"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표현 속에 자주 나타난다.

 

온전히 하나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겠다.

온전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생활을 하겠다.

온전히 하나님에게 헌신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겠다.

우리의 마음과 생각과 뜻을 다하여 온전히 하나님을 사랑하겠다.

생각과 말, 행동 전체를 순수한 하나님 사랑으로 채우겠다.

이웃을 온전히 사랑하겠다.

모든 더러움과 죄로부터 깨끗해지겠다.

교만과 욕망, 분노로부터 온전히 자유하겠다.

하나님은 육체와 영혼과 마음을 온전히 성화하신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죄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신다.

 

이처럼 온전 혹은 완전을 향한 열망은 하나님의 뜻과 영광, 하나님의 계명에 모든 자신의 모든 것을 다 걸겠다는 마음 자세로 드러난다. 말과 행동, 내면과 외면, 마음과 몸 등으로 분열되고서는 완전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우리가 "완전" 혹은 "온전"을 "성결"로 번역하면서, 중대한 오해 혹은 실수가 생겨나지 않았는가 생각된다. 그래서 요한 웨슬리도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을 남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우리가 "완전"이나 "온전"이라는 말을 제쳐놓고, 자꾸 "성결"만을 놓고 강조하다 보니, "온전" 혹은 "완전"의 뜻과 점점 더 멀어지지 않았나 라는 생각이 든다.  

성결은 히브리어 글자 그대로 "분리하다"는 뜻이다. 특히 구약성경에서 성결은 부정한 제물, 부정한 장소와 시간, 부정한 행동 등으로부터의 분리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물론 이것은 위생적으로나 도덕적으로, 그리고 종교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온전히 유지하는 데 크게 이바지 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예수님 시대의 종교인들에게서 경건 혹은 성결은 점점 더 외형적인 것, 습관적인 것, 제도적인 것이 되어 갔다. 즉 내면과 외면이 분리되고, 몸과 마음도 분리되었다. 이러다 보니, 그 당시에 성결을 이루려고 가장 노력한, 당연히 큰 칭찬까지 받을 만한 유대인들이 오히려 가장 위선적인 존재로 비쳐졌고, 그래서 예수님으로부터 혹독한 비난을 받았다. "위선자"라는 말은 속은 그렇지 않은데 겉으로만 그런 척 "연기하는 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성결의 위험은 바로 인격과 마음의 분열을 가리고 겉으로만 거룩한 척 연기한 것이다. "화 있을진저..."로 시작하는 예수님의 비난은 바로 성결의 신앙이 위선적이고 외형적인 신앙, 형식적이고 제도적인 성결 이데올로기로 변한 것을 집중 공격한 것이다.

오늘 우리 시대에도 성결을 말하는 사람들의 태도를 보면, 거기에는 뭔가 미심쩍은 것이 많은 듯이 보인다. 그들은 성결을 온 몸과 마음, 온 뜻과 정성으로 이루려 하지 않는 듯이 보인다. 성결이 형식적인 교단의 구호가 되고, 형식적인 교회의 간판이 된 듯하며, 성결교인들의 순수하고도 전적인 마음 자세를 잘 드러내 보이지 않는다.

성결인들은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의지해야 하는데, 종종 권력과 물질, 이 세상에 더 강하게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성결인들은 모든 사람들을 순수히 사랑해야 하는데, 자기 편만을 사랑하는 듯이 보이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성결인들은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하는데, 원수 같지도 않은 사람을 원수로 만들어 놓고 차갑게 복수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더욱이 예수님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처럼, 성결이 하나의 지배 이데올로기, 권력 쟁취와 권력 유지의 수단으로 변질되기 쉬웠다. 성결을 이루려는 사람에게 남을 지배하려는 조그만 욕심이라도 있다면, 그 즉시 성결은 (불교 용어를 써서 죄송하지만) "도로아미타불"이 될 것이며, 순수하고 지고한 성결은 냄새나고 불결한 성결로 변질되고 말 것이다.

그런데 우리 성결 교회에서도 성결을 외치지 않으면, 마치 한 식구가 아닌 듯이 대하면서 외면하는 현상이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성결을 외치는 사람이 높은 자리를 탐하고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종종 거짓말까지 서슴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성결 교회의 지도자들이 진심으로, 전적으로 회개하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들은 그야말로 완전한 사람, 성결한 사람이 다 되었다는 말인가? 회개와 냉철한 자기 비판이 없이 어떻게 성결한 사람, 온전한 사람이 되겠는가? 성결인의 모순, 아니 성결인의 비극을 가장 잘 보여주는 현상이 아닐 수 없다.

둘째로 요한 웨슬리가 온전 혹은 성결을 이루려고 할 때, 그는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지배하시고 구원하시고자 하는 모든 영역, 모든 대상을 염두에 두었다. 그에게서 성결 혹은 온전에서 배제되어야 할 그런 영역, 그런 대상이 있을 수 없었다. 그는 온 세상, 온 우주가 하나님의 나라가 될 것을 열망하였고, 하나님의 나라가 마음만이 아니라 사회와 국가, 지구와 우주에 온통 이루어지기를 열망하였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회적 성결이 아닌 성결은 없다.

여러분은 세상의 소금이다.

우리가 사랑해야 할 이웃은 공기를 호흡하며 살고 있는 모든 사람이다.

당신은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빚지고 있다.

 

요한 웨슬리가 개인적인 경건과 종교 행위만을 실천하지 않고, 옥에 갇히고 헐벗고 고독하고 가난하고 병들고 억눌린 사람들을 향한 광범위한 사회적 실천을 전개하였다는 사실은 너무나 잘 알려져 있어서, 여기서 새삼 장황하게 언급할 필요도 없다. 미국의 초기 성결 운동에서도 이런 관심은 폭넓게 반영되었다. 성결 운동가들은 특히 빈민 선교와 빈민 구제에도 앞장을 섰다고 한다. 성결 운동의 한 지류인 구세군의 자선 냄비가 바로 이를 잘 보여 준다.

하지만 여기서도 "성결"이라는 말에 대한 치명적인 오해가 드러났다. 시간이 흐르면서, 성결이라는 말의 어원 그대로 교회가 사회로부터 분리하려는 현상이 점점 드러났다. 물론 이러한 분리는 성결이라는 단어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고, 그 신학적, 사회적 이유를 충분히 가지고 있다. 그리고 여기서 이 문제를 거론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역사적 현상은 어느덧 까마득한 과거로 흘러갔고, 우리는 "성결"이라는 단어를 통해서나마 불가피하게 전통을 더듬을 수 밖에 없게 되었다. 특히 이럴 때, 성결의 오해는 또 한번 극명하게 드러난다.

영국의 요한 웨슬리와 미국의 초기 성결 운동가들의 정신을 올바르게 본받는다면, 성결 교회가 다른 교회보다 더 일찍, 더 열렬히 사회개혁 운동에 앞장섰어야 한다. 성결 교회가 다른 교회보다 더 선도적으로 교육 선교와 의료 선교를 실천했어야 한다. 물론 성결 교회가 거의 자생적인 교회로 출발하였다는 것과 외국의 지원이 미약하였다는 것이 그렇게 하지 못한 중요한 이유가 된다. 하지만 정신조차 무장되어 있지 못했다. 초기 성결교 회의 문헌을 대충 살펴보면, 우리 선배들은 온통 "세대주의적 종말론"의 비관적 역사관에 사로잡혀 있었으며, 사회 참여를 하지 않는 것을 "순복음"의 정신이라고까지 미화하였다.

"순복음"으로 잘못 번역된 원어는 원래 "온전한 복음", "전체 복음"을 뜻하는 "Full Gospel"이었다. "사중복음", 즉 중생과 성결, 신유와 재림의 기본 정신도 원래 온전한 구원, 총체적 복음을 담으려고 한 것이었다. 죄에서 의롭게 될 뿐만 아니라(중생=칭의), 죄의 힘과 뿌리로부터도 의롭게 되어 거룩한 생활을 하여야 한다(성결). 그리고 개인만이 아니라 사회도 거룩하게 되어야 한다(사회적 성결). 그리고 마음만이 아니라 몸도 구원의 대상이 되어 야 한다(신유). 그리고 온 우주의 구원은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통해서 이루어진다(재림).

이처럼 복음의 내용을 포괄적으로 요약한 사중복음이 어느새 "순복음"이라는 옷을 걸치더니 몸과 사회, 세상과 분리된 고고한 이기적인 복음, 내적인 성결로 퇴조하고 말았다. 이제는 이 "순복음"이라는 말과 내용도 순복음 교회에게 뺏기고, 우리는 교리적 표현과 내용이 엉성한 사중복음을 옛날 그대로 붙들고 있다. 때로는 사중복음 중에서도 성결만을 우리의 간판(교회 간판?)인 양 내세우다 보니, 마음 자세와 영역, 대상이 매우 좁아져 버린 성결 신앙만이 앙상히 남게 되었다.

어떻게 우리의 순수한 복음적 전통을 되찾고, 오늘 여기서 효과적으로 실천할 것인가? 이것은 비단 신학자나 교단 지도자만의 숙제가 아니라 성결인 모두의 숙제다.

 

본문 풀이

오늘 다함께 읽은 본문은 예수님이 가르치신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잘 말해 주고 있다. 예수님의 당시에 원수, 즉 로마인이나 이방인, 타락한 사마리아인은 정죄와 타도의 대상, 아니 지옥의 불쏘시개 감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부터 분리되었고, 구원으로부터 분리되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로부터 분리되어야만, 자신의 정체성을 보존하고 온전한 구원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이 그들의 성결 신앙, 아니 성결 이데올로기였다. 그러다 보니 개인의 성결, 이스라엘의 성결조차도 외형적, 제도적으로 고착되어 구원의 힘을 잃고 말았다.

하지만 이 땅, 아니 온 우주에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가져오신 예수님은 그들과 달랐다. 예수님은 "마음과 몸, 정성과 뜻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이웃을 우리의 몸(전 체 인간을 말함)과 같이 사랑하라"고 가르치시고 실천하셨다. 그분은 원수까지 사랑하시고 품으셨다. 죄를 미워하실지언정, 죄인까지 미워하시지 않았다. 아니 예수님은 바로 죄인과 병자를 위해 오셨고, 그들의 고통과 짐을 자신에게 지우셨다. 그래서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회복시키셨고, 하나님 나라의 우선적인 백성으로 삼으셨다.

예수님에게서 몸과 마음의 분리와 이스라엘 백성과 이방인의 분리가 없었던 것처럼 시간과 공간, 대상과 영역의 분리도 없었다. 모든 존재가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영역, 대상이었다. 온 땅에 임할 기쁜 소식,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셨다.

오늘 우리 성결 교회가 예수님의 이런 정신을 온전히 실천하려고 한다면, "성결"을 더 이상 "분리"의 개념으로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더욱이 "사중복음"에서 "성결"만을 분리해서도 안 될 것이다. 굳이 "성결"을 우리의 상징적인 용어로 사용하려고 한다면, 지금까지 설명한 오해와 오류를 막기 위해서 통전적, 총체적인 구원을 담는 옷으로 바꿔 입혀야 한다. 성결을 뜻하는 영어 단어 Holy는 음성학적으로만이 아니라 내용적으로 총체적, 전체적이라는 뜻을 가진 Holistic, Whole이라는 단어와 같은 뿌리를 가진다. 그러므로 "성결"이라는 단어가 "온전한", "완전한", "총체적"이라는 뜻을 강하게 풍기도록 강조해야 한다. 그래도 성결이라는 단어가 갖는 숙명적 오해 때문에 그것이 쉽지 않다고 한다면, 그저 "성결"이라고 하지 말고 "온전한 성결"이라고 부르는 궁색한 방편도 있겠다. 이것도 "진짜, 순, 참 기름"이라는 말처럼 괜히 사족을 붙이는 유치한 행위처럼 들리면, "성결"이라는 용어를 뒤로 물리고 "사중복음"이라는 말로 앞세우는 것이 어떨까? 내친 김에 우리 교회를 성결 교회라고 부를 것이 아니라, 사중복음 교회라고 부르면 어떨까?

바울이 고백한 말을 인용하고 간단히 설명하면서 설교를 마치고자 한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께 잡힌 바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이 상을 위하여 좇아가느니라(빌 3: 12-14). 하나님은 온전한 구원을 이루도록 옛날의 바울과 오늘의 우리를 부르셨다. 바울과 요한 웨슬리, 우리의 신앙 선배들처럼 하나님의 온전하심을 본받는 자가 되기 위해 애쓰고 힘쓰자. 이것이 성결 교회가 하나님에게 부름받은 소명과 이 땅에 보냄받은 사명의 본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