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감사 못할 것이 없다

 창 45:1-8

 2000.11.19, 수성교회(김종두 목사) 추수감사 주일예배  



 

가을걷이가 다 끝난 마당에, 그것도 농사를 전혀 짓지 않는 도시 사람이 미국 절기에 맞춰서 추수 감사절 예배를 드린다니, 한국인으로서 자존심도 좀 상하고 어색하지 않으십니까? 하지만 이런 기회를 빌려서라도, 우리가 감사할 줄 아는 법을 배우는 것은 무척 행복한 일입니다. 감사할 줄 아는 법이라고 말씀드렸는데, 이는 감사하는 법을 아는 것도 참으로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답게 사는 중요한 비결이기 때문입니다.

요즘 경제가 말이 아니죠? 또 경제 위기가 온다느니, 100만명 실업자 시대가 온다느니 하면서 모두가 겁을 주고 겁을 먹고 있는데, 여러분도 살기가 꽤 힘드시죠? 그렇게 힘든 인생을 왜 사십니까? 힘들게 사시느니, 차라리 자살하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여러분, 모든 일은 마음먹기에 달렸습니다. 저도 명색이 목사이고, 남들이 박사님, 교수님이라고 불러 주지만, 50을 바라보는 이 나이에 정식으로 직장 생활한 기간은 5년도 채 안됩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빛깔 좋은 얼굴로 당당히 살아가는 비결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은 땡전 한푼도 없고, 거액 복권에 당선된 적도 결코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감사하며 살 수 있는 것은 다 마음을 잘 먹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불평의 눈으로 바라보면 모든 게 불평의 대상입니다. 하지만 세상은 감사의 눈으로 바라보면 모든 게 감사의 조건입니다. 범사에 감사하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비록 우리가 농사지어 감사드린 적이 없더라도, 영적인 추수를 풍성히 하여 언제나 감사하며 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범사에 "감사하지 못할 이유가 없는" 그 이유를 말씀드릴까 합니다.

 첫째는 우리가 공짜로 받은 것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물론 곡식과 과일, 돈은 다 우리가 땀 흘려 얻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공짜로 받은 것과 비교하면, 우리가 땀흘려 거둔 것이 도대체 얼마나 큰 것입니까? 농사에 꼭 필요한 태양과 비, 땅을 우리가 스스로 만든 것입니까? 요즘 물도 사서 먹게 되었습니다만, 물도 어디 우리가 만든 것입니까? 공기도 우리가 만들고 우리가 사 먹습니까? 허긴 앞으로 공짜로 주어진 공기도 비싼 돈을 주고 사서 먹을까 봐 걱정입니다만.

참으로 우리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다 하나님으로부터 공짜로 얻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은혜"라는 말(카리스)도 "공짜"라는 말입니다. 우리의 첫 생명과 둘째 생명, 즉 영생도 은혜로 받은 것입니다. 건강을 위해 온갖 보약을 달여먹고 온갖 운동을 다해도, 하나님이 지켜주시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많은 곡식과 재물을 창고에 가득 채워도, 하나님이 우리의 숨을 거두어 가시면, 그날로 우리는 먼지와 재로 변합니다. 우리가 다 제 힘으로 사는 것 같이 보여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얼굴을 돌리시면, 바로가 다스리던 이집트처럼 하늘과 땅, 강과 바다는 재앙으로 넘치고, 우리의 생명은 덧없이 사라집니다.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지어졌습니다. 그러므로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길을 벗어나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크고 좋은 것들을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에게 꾸어 주었다가 돌려 받았습니까? 우리가 받을 자격이 있어서 받았습니까? 지금 사람이 누리는 자연의 혜택은 다 사람이 이 땅에 태어나기 전부터 준비된 것입니다. 자연을 하나님에게 빌려주었다가 받은 자가 여러분 중에 있습니까? 참으로 우리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대부분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로, 공짜로, 거저 받았습니다. 그러니 이 큰 은혜에 감사하지 않을 사람이 있겠습니까?

하지만 우리가 받은 것으로만 감사한다면, 동물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개도 먹이를 주면 꼬리를 흔들며 고마워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받지 않은 것, 아니 빼앗긴 것을 통해서도 감사할 줄 아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이성봉 목사님은 많은 예화를 남겼습니다. 오늘 그 중에 몇 가지를 소개할까 합니다.

 

어떤 독실한 신자 노인이 있었다. 그가 쌀 한 가마니를 외상 맡아다가 마루에 두었더니 그날 밤에 도적이 와서 홀랑 가져다 버렸다. 그의 마누라는 도적을 욕하면서 야단을 치는데 영감님은 "마누라, 너무 떠들지 마시오. 나는 쌀 한가마니 잃어버렸는데 다섯 가지 감사가 생기는구먼" 한다. "원, 저런 영감두, 무엇이 감사하단 말이요" 하니 "보라구, 우리는 쌀 한 말도 얻기 힘든 집에서 한 가마니나 외상으로 얻게 된 신용을 얻었으니 감사하지 않은가? 또 감사할 것은 남은 도적질하면서 사는데 우리는 도적질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이오. 또한 그것 모두 다 우리가 잘못했지, 그것을 방안에 두었으면 좋았을 것을 마루에 두어 실패하였으나 결국 좋은 경험을 얻었으니 감사하고, 또한 육신의 양식은 잃어버렸어도 영혼의 양식은 잃지 않았으니 감사하고, 또 외상으로 얻어온 쌀이라도 남의 것을 잃어버리지 않고 내 것을 잃었으니 감사하지 않소?" 하며 찬송을 불렀다고 한다. 이처럼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감사 안 할 것이 없고, 감사를 안 하는 사람에게는 감사할 것이 없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보다 잘 나가는 사람을 쳐다보면서 비교하고 산다면, 우리는 늘 불행한 사람이 되고 맙니다. 자신이 이미 받고 누리고 있는 것에 먼저 감사하는 법을 배우지 않고, 바울이 말한 대로 자신이 가진 것으로써 자족하는 법을 배우고, 그리스도 안에서 넉넉히 살아가는 일체의 비결을 터득하지 않으면, 우리는 영원히 불행한 사람이 되고 맙니다. 남이 가진 것을 부러워하면, 사촌이 논을 사는 것을 보고 배가 아픈 사람처럼 우리는 늘 괴로운 인생을 삽니다.

만약 세상에서 가장 잘 나가는 사람만이 행복하다면, 꼭 한 사람만이 행복할 겁니다. 그런데 그 사람도 과연 행복할까요? 세상 제일의 위치로 올라가느라고, 또 그것을 지키느라고 얼마나 마음 고생을 할까요? 아마도 그는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일 겁니다. 부자와 권력자, 인기인이 가장 오래 산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건강하게 가장 오래 사는 사람들은 티벳 사람들처럼 땀흘리며, 나누며, 자족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미국 사람도 아니도 스위스 사람도 아니고, 우리보다 엄청 못사는 방글라데시 사람입니다. 방글라데시 사람은 우리보다 엄청 못 사는 정도가 아니라 거지 같이 사는 사람입니다. 해마다 태풍 때문에 엄청난 인명과 재산 피해를 겪는 그 사람, 하루 한끼도 제대로 못 먹는 사람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하다고 느끼다니, 정말 불가사의할 일이 아닙니까? 그들은 가진 것보다는 가지지 않은 것에 더 행복을 느끼는 비결을 터득한 것 같습니다. 아니 보이는 물질보다는 보이지 않는 것들의 가치를 더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인 것 같습니다. 그들은 채우려고 하다가 늘 불만족한 돼지가 되기보다는 오히려 탐욕을 비웠기에 늘 행복한 소크라테스가 된 것 같습니다. 그들은 정말 돈으로 살 수 없는 것, 계산할 수 없는 것, 비교할 수 없는 것들로써 행복의 탑을 쌓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주노라!" 이 평안은 어디로부터 옵니까? 하늘 아버지에 대한 철저하고 순진한 신뢰, 빵과 권력과 명예라는 세상의 우상으로부터 자유한 마음, 일용할 것만을 구하고 그것으로 만족하는 삶, 남은 것을 이웃과 나누며 서로 사랑하고 위로하는 마음에서 참 평안이 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받은 것으로만 감사할 줄 안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큰 것으로만 기뻐한다면, 우리가 작은 일에 어찌 충성할 수 있겠습니까? 어린이는 작은 선물로도 크게 기뻐하고, 그 선물이 아니라 선물을 준 사람의 사랑의 온기를 느끼기 때문에 평안히 쉬고 기쁘게 뛰어 놀 줄 압니다. 아니 어린이는 아무 선물을 받지 않아도 사랑하는 사람이 그저 껴안아 주기만 해도, 아니 껴안아 주지 않아도 사랑하는 사람이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바로 어린이와 같은 자가 천국에 들어간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천국만큼 더 큰 선물이 어디 있으며, 천국의 삶보다 더 큰 행복한 삶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 천국의 행복은 바로 어린이와 같은 자들의 것입니다. 여러분은 아무 것이 없어도 주님이 함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습니까? 하박국 선지자처럼 외양간에 소가 없고 우리에 양이 없으며, 포도원과 감람나무에 아무 열매가 없어도, 오직 구원의 하나님 한 분만으로 기뻐할 수 있습니까? 오직 이런 자가 천국에 들어갈 자인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만약 우리가 받은 것, 가진 것, 좋은 것으로만 감사할 줄 안다면, 세상 사람과 조금도 차이가 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도 할 줄 아는 감사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제 환난과 고통도 기쁨으로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합니다. 아니 어떤 때는 불의로 세상의 낙을 즐기기보다는 의를 위하여 핍박과 고난을 받는 것을 기뻐할 줄 알아야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도 손과 옆구리에 상처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바울도 예수님의 남은 고난을 채우려고 한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참 그리스도인의 표지는 고난에 있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고난의 흔적을 가지고 살지 않는다면, 아니 예수님 때문에 복만 받기를 원하고 고난을 받기를 싫어한다면, 참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이성봉 목사님의 예화를 몇 개 더 들겠습니다.

 

십자가가 없으면 면류관도 없고 죽음이 없으면 부활도 없는 것이다. 꽃이 떨어지면 열매를 맺고, 엄동 설한 지나가면 양춘가절이 오고요, 어두운 밤 지나면 빛난 아침이 오는 법이다. 비가 올 때는 늘 올 것 같으나 해 나는 날 있고요, 바람이 불 때는 늘 불 것 같으나 잔잔한 날이 올 것이다. 인자의 날은 해산하는 수고와 같다고 하였다. 애기 어머니가 해산할 때는 죽을 고생을 하며 애를 썼으나 응애응애 하고 애기가 태어나 자랄 때에는 둥실둥실 내둥실 금자동아 옥자동아 하면서 좋아한다. 애기 날 때에는 다시는 안 낳는다고 하더니 낳은 후에는 좋아서 하나 더 낳으면 좋겠다고 한다. 우리 나라 민족이 왜정시대에 당했던 그 고통, 더욱이 대동아 전쟁 구년에 당한 환난은 잊어버리지 못할 것이다. 수저도 내라, 밥그릇도 내라, 아들도 내라, 딸도 내라, 머리를 깎아라, 성을 갈아라, 몸뻬를 입어라, 콩깻묵 먹어라 할 때에 나는 얼마나 외쳤는가? 조금만 참으시오, 아기를 낳습니다 하였다. 과연 1945년 8월 15일에 해방이 되어 대한 독립 만세, 대한 독립 만세, 천지가 진동하게 부를 때에 얼마나 기뻐했던가? 9년간의 전쟁고통은 결국 대한 민국 하나 나오느라고 야단을 친 것이다. 대한 민국이 나와야 또한 그 턱이지 요사이는 애기 낳고 훗배앓이를 이렇게 오랫동안 앓는가? 아니다, 적은 고통이 있으면 적은 기쁨이 있고 큰 고통이 있으면 큰 기쁨도 있으니, 이것은 우리 나라만 그런 것이 아니고 전세계적이다. 세계적인 고통이 있으니 앞으로 세계적 기쁨이 있을 것이다. 소망 중에 즐거워할 것이다.

가시밭이 백합화에게 불행이 아니다. 가시밭이 없으면 장난꾼 아이들이 와서 그 꽃을 꺾어갈 것이다. 가시밭이 있으므로 장난꾼들이 만지지도 못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성도들의 사면에 있는 환난 고통의 울타리가 결단코 불행이 아니라 우리를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울타리라는 것을 아는 자는 참으로 행복하다. 그런고로 너희가 여러 가지 환난 시험을 당하거든 기쁘게 여기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셨다.

신앙에서는 소프라노도 잘해야 하지만 베이스를 잘해야 하는 것이다. 하늘 나라에는 올라도 잘 가야 하지만 내려도 잘 가야 한다. 자, 보시라. 히브리서 11:17-35 상반절까지는 모든 성도들이 믿음으로 모든 난관을 물리치고 승승장구(乘勝長驅)로 올라가며 모든 난관이 추풍낙엽(秋風落葉)과 같았다. 소프라노를 잘하였다. 그러나 35절 하반절부터는 모든 환난을 다 그대로 받아서 형편없이 내려갔다. 희롱과 채찍을 받고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을 받았고 돌로 매맞고 톱에 키고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궁핍과 환난 고생 당하였고 광야와 산중의 암혈과 토굴에서도 잘 참고 견디고 베이스를 잘하여 내려가면서도 찬송과 감사로 승리한 것이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었던 요셉의 이야기는 여러분이 너무나 잘 아시므로, 다시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어릴 적부터 남달리 꿈이 크다는 이유로, 요셉은 형제들로부터 미움을 사서 먼 타국에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동서고금부터 사람이란 것이 이렇게 남들이 잘 되는 것, 아니 남의 큰 꿈조차 시기하고 짓밟는 못된 죄인입니다. 그래서 이성봉 목사님도 "사람의 마음속은 돼지 구정물과 같다. 겉은 번지르르 해도 속은 온갖 더러움으로 가득 차 있다"고 하였습니다. 더욱이 요셉을 시기한 사람은 남이 아니라 형제였습니다. 가장 독한 원수는 가장 가까이 있는 법입니다. 부모의 품을 한번도 떠난 본 적이 없는 그 어린 나이에, 그것도 자기를 지켜 주어야 할 형제로부터 배반을 당했으니, 요셉의 마음은 얼마나 큰 상처를 받았겠습니까? 더욱이 그가 낯선 외국에서 노예살이와 감옥살이 등을 하며 얼마나 모진 육신의 고통을 받았겠습니까? 성경은 이를 자세히 기록하지 않고 있지만, 요셉의 고난은 이루 짐작할 수 없는 고통이었을 겁니다. 웬만하면 불평하고 절망할 법도 한데, 신앙의 의인 욥도 한 때는 험한 불평을 늘어놓고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였는데, 그 어린 요셉이 불평 한번 하지 않았다니, 이것도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 아닙니까?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오늘의 본문이 이를 잘 말해 줍니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창 45:7-8). 요셉은 하나님이 좋은 일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고난을 통해서도, 아니 고통을 통해서만이 큰 일을 행하신다는 것을 터득한 신앙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를 굳게 믿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섭리는 인간의 눈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이 어떻게 연약한 사람에게 큰 고통을 허락하실 수가 있습니까? 공의의 하나님이 어떻게 큰 죄도 없는 사람에게 가혹한 시련을 내리실 수 있습니까? 이럴 때는 욥처럼 자신을 저주하고 하나님에게 불평하는 것이 더 솔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조차도 "왜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아버지 하나님에게 항의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게 항의하는 것이 나쁜 일은 아닙니다. 불의를 참는 것도 불의입니다. 불의를 참으라는 말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이 불의와 고난, 심지어는 사탄의 일을 통하여서라도 당신의 선한 일을 이루신다는 것을 우리는 굳게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섭리의 하나님에 대한 굳건한 신앙 속에서 고난을 굳건히 견딜 뿐만 아니라, 고난이 도리어 영광으로 변할 것을 믿고 미리 기뻐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은 이런 성도들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세상은 이런 성도들을 이기지 못합니다. 세상은 바울과 실라를 감옥 속에 넣을 수는 있어도, 감옥 속에서도 찬송하고 기뻐하는 바울과 실라를 불행하다고 낙인찍을 수는 없습니다. 십자가에 죽어가면서도 자신을 못박은 죄인을 용서하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고난을 통하여 원수마저 구원하시고 원수 간의 담을 허물고 만물을 화해시키신 예수님을 세상은 도저히 감당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너희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말씀하실 뿐만 아니라 "너희가 내 이름으로, 의를 위하여 고난과 핍박을 받으면 기뻐하라. 이는 하늘의 상이 큼이니라."고 말하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여러분이 감당하지 못할 시험은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억울하고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이 올 때 오히려 하나님에게 감사하시고, 영광을 돌리시고, 남이 보란 듯이 감사 헌금을 내십시오. "하나님이 고난을 통하여 내게 더 큰 일을 행하신다"고 동네방네 떠들고 자랑하십시오. 일부러 힘들어 전도할 것도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 전도입니다. 사람들이 이런 여러분을 보고 "고난 중에서도 기뻐하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저절로 물어올 것입니다. 이때에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과 기쁨의 소식을 담대히 전하십시오. 고난을 통해서도 효과적으로 전도할 수 있다니, 세상에 성도가 감사하지 못할 때가 어디 있겠습니까? 이런 신앙 자세로 살아가는 여러분은 범사에 감사하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저도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