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다

사 9:1-7

2002.12.22, 현풍제일교회 대강절 설교

 


오늘 우리는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면서 대강절 마지막 주일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몸으로 오셔서 친히 인류를 구원하신 이 사건보다 더 귀하고 기쁜 소식은 없습니다. 지금까지 인류에게 굉장히 놀랍고 기쁜 소식은 무엇이었습니까? 여러분의 생애 중에 가장 기쁘고 놀라운 소식은 무엇이었습니까? 인류의 역사에서 참으로 반가운 소식은 무엇이었습니까? 원시 시대에는 불을 발견하고 피울 수 있게 된 것은 매우 기쁜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인류가 오랫동안 벙어리처럼 말을 못하고 글도 못쓰며 손과 발로 신호를 보내다가 글과 말을 쓰게 되고, 종이와 인쇄술을 발명한 것도 참으로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그리고 근대에 와서는 증기기관차와 비행기를 발명하고, 전기와 전화, 라디오와 텔레비전을 발견한 것도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어마어마한 핵의 위력을 발견하고 이를 실험한 사건이었습니다. 히로시마에서 떨어진 핵폭탄의 위력은 화산 폭발과는 가히 비교될 수 없는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그리고 인류가 달에 발을 내딛게 된 사건은 인류의 역사에서 가장 흥분되는 사건이었습니다. 최근에 이르러 인간의 몸의 지도(게놈)를 발견한 것은 참으로 놀라운 소식이었습니다. 인간은 정상적인 출산방법을 떠나 조그만 세포 하나로 자신과 완전히 닮은 자신을 복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런 사건이 아무리 놀랍고 기쁘고 흥분되는 사건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친히 인간으로 오신 사건은 우주의 역사에서 가히 이런 사건들과는 감히 비교될 수 없는, 정말로 인류의 역사와 우주의 역사에서 유래가 없는 일입니다. 더욱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한 아기로 태어나신 사건은 참으로 인간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신비한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으로 오셨다는 것도 기이한 일인데, 그 하나님이 연약한 아기로 태어나셨다니, 평범한 사람으로서는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오래 전에 이런 놀라운 사건을 미리 예언하였습니다. 이사야가 예언활동을 하던 시대는 어떠한 시대였습니까? 수리아(아람)과 에브라임(북이스라엘) 연맹군이 앗수르에 반대하는 계획에 가담하지 않는다는 구실로 유다를 치려고 전쟁을 일으킬 때였습니다. 유다는 진퇴양난의 곤경에 빠졌습니다. 그 당시 가장 강대하였던 앗수르에 저항한다는 것은 감히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애굽을 향해 구원을 요청할 수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 애굽도 에디오피아의 공격을 받아 매우 약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수리아 동맹군이 치러왔다는 소식 앞에 아하스 왕과 유다 백성의 마음은 "삼림이 바람에 흔들림 같이 흔들렸다"(사7:1-2)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광풍 앞의 촛불의 신세였습니다. 여러분은 어려운 시련이 닥쳐올 때, 어떤 상태에 빠집니까? 사시나무처럼 벌벌 떠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뒤로 훌러덩 자빠지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낙담 중에 말을 잃고 식음을 전폐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심지어는 정신이 나가서 헛소리를 하거나, 울다가 웃거나, 심지어는 자살에 이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인간은 강한 척해도, 참으로 약한 존재입니다. 인간의 심지와 믿음은 시련 속에서 가장 잘 드러나는 법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조차 외적의 공격을 당할 때, 마치 거센 바람 앞에서 요동하는 수풀처럼 흔들렸습니다.

이러한 난국의 상황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인간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선포합니다. 이사야는 난국을 풀어가기 위해 "곡예사와 같이 외교를 잘 하자"거나,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는 결사항전의 자세를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구원은 인간의 힘과 정치에 있지 않고,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온다고 선포하였습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실 때에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보이기 위해, 그분이 친히 아기로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아기는 바로 임마누엘(7:14)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 놀라운 소식은 결국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통해 입증되었습니다. 왜 아기 예수님이 오십니까? 왜 예수님의 탄생은 인류에게 기쁜 소식입니까? 예수님의 오심은 고난을 받는 자에게 희망을 주려하심입니다. 이 희망은 어떤 희망입니까? 고통을 당하던 자에게 흑암이 사라지고,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며,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는 희망이었습니다. 이 기쁨을 표현하기 위해 이사야는 여러 가지 기쁨의 때를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이 기쁨은 추수할 때의 기쁨이요, 전리품을 나눌 때의 기쁨이요, 압제자로부터 해방될 때의 기쁨이요, 어지러이 싸우는 군인의 갑옷과 피묻은 복장을 불에 사를 때의 기쁨입니다. 옛날에 가장 큰 기쁨은 이런 종류의 기쁨이었던 같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시던 밤에 하늘의 큰 별이 밝게 빛났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시는 장엄한 사건을 축하하기 위해, 아니 어둠이 지배하던 세상을 밝히 비추기 위해 하늘의 큰 별도 한껏 자신의 빛을 발하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이 땅에 비추신 그 빛은 단지 이런 자연적인 빛만은 아닙니다. 그 빛은 죄악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용서와 화해, 영생과 평화의 나라로 바꾸어놓은 빛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 예수님은 빛 가운데 오셨고, 친히 빛이 되셨습니다. 그분만이 모든 어둠을 물리칠 참된 빛이요, 어두운 인생의 길을 인도한 영원한 빛입니다. 지금까지 세상을 비추는 빛이라고 자처하던 스승들이 많이 나타났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어둠에 속한 사람들에게 "빛을 보라, 진리를 깨달으라"고 가르쳤을 뿐, 친히 빛과 진리가 되어 주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은 죄의 힘을 억제하고 죽음을 잊는 방법은 가르쳐 주었지만, 자신의 죄와 죽음은 해결하지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죄악과 죽음의 수렁에 빠진 죄인들에게 "스스로 방법을 깨닫고 수렁에서 나오라"고만 하지 않으시고, 친히 수렁 속으로 들어가셔서 죄인들을 건져내셨을 뿐만 아니라, 더러운 몸을 자신의 피로 친히 씻으시고, 더러운 몸으로는 감히 상상도 할 수도 없는 천국 초대장을 보내 주셨습니다. 아니 천국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미리 천국의 맛을 보여주셨습니다.

천국의 소망은 평화와 생명이 넘치는 곳입니다. 하지만 세상 사람은 평화를 외치면서 전쟁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오늘의 미국이 그렇지 않습니까? 세상 사람은 건강한 생명을 약속하면서 건강을 해치는 온갖 것들을 만들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이 내려주는 처방은 미봉책에 불과하며, 아픔을 잠시 달래주는 최면제와 같습니다.

죄악과 죽음의 세력을 해결하지 않고서는, 이 땅에 진정한 정의와 평화는 절대로 오지 않습니다. 제 아무리 무기를 만들고, 제 아무리 외교와 정치를 잘해도 분쟁과 전쟁은 그치지 않습니다. 최고의 강대국 미국이 9.11 사건처럼 어이없이 당한 것을 보십시오. 설령 아프카니스탄과 이라크를 공격하고 적들을 무참히 제압한다고 하더라도, 미국 땅은 절대로 안전하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칼은 칼로 막을 수 없고, 힘은 힘으로 제압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미국은 자신이 수출했던 그 무기로 공격을 종종 당하곤 합니다. 그러므로 미국은 지금 전쟁할 구실을 찾고 적을 죽일 궁리를 할 것이 아니라, 적을 용서하고 적의 분노를 풀어주며 서로 화해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럴 때에만, 미국 땅과 세계는 평화로울 수 있습니다.

평화는 힘의 논리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지금 우리는 또 한번 뼈저리게 느끼고 있습니다. 참 평화는 임마누엘 하나님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이 평화는 세상이 줄 수 있는 평화가 아닙니다. 세상은 죄악을 이기지 못했기 때문에 끊임없이 전쟁에 빠져듭니다. 세상은 죽음을 이기지 못했기 때문에 끊임없이 죽음을 퍼뜨립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친히 죄악과 죽음을 해결하실 수 있습니다. 죄악의 힘에서 벗어난 사람은 더 이상 악한 전쟁을 일으키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원수까지 사랑하고 원수를 친구로 만들지언정, 원수를 죽이려 하지 않습니다. 죽음의 힘을 이긴 사람은 더 이상 죽음을 퍼뜨리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오히려 죽음의 밭에 영원한 소망의 씨앗을 심을지언정, 죽음의 벌레들을 퍼뜨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오십니다. 아기로 오십니다. 용서와 화해, 평화와 영생의 주인으로 오십니다. "기묘자, 모사"라는 말은 바로 "신비한 중재자, 신비한 화해자"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인간이 이해하기 어려운, 아기와 같은 모습으로 오시는 신비한 화해자이십니다. 아기는 결코 힘으로 어른을 제압하지 않습니다. 막 탯줄을 끊고 태어난 아기는 생명의 증인입니다. 방긋방긋 웃는 아기는 화해의 증인입니다. 이 화해는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받아들이고 실현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시는 여러분, 예수님이 여러분에 주실 가장 큰 선물인 평화와 영생의 선물을 받으려고 어서 달려나갑시다. 아니 예수님은 이미 2000 여년 전에 태어났으므로 다시금 그곳으로 달려갈 필요가 없으며, 다시금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릴 필요는 없습니다. 오직 우리의 마음 속에, 우리의 가정 속에, 우리의 사회와 국가, 세계 속에 예수님이 더 깊이 태어나시기를, 더 가까이 오시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반가운 손님을 기다리는 사람은 그저 멍청히 기다리지만 않습니다. "오늘 오시나, 내일 오시나?" 마음을 졸이며, 발을 동동 구릅니다. 아니 오시는 손님을 맞으려고 맛있는 음식을 장만하고 집안 청소를 하며, 새 옷으로 갈아입습니다. 아니 좀 더디 오신다고 생각되면, 멀리 동구 밖까지 마중을 나갑니다. 그런 점에서 기다리는 사람은 동시에 서두르는 사람입니다(블룸하르트). 2000여년 전에 태어나신 예수님은 점점 더 가까이 오십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등불을 밝게 켜고, 소망의 찬양을 힘차게 부르며, 정성스런 사랑의 선물을 준비합시다. 예수님은 점점 더 가까이 오십니다. 세상에서 가장 반가운 손님이 오십니다. 어서 맞이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