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세월을 아끼라

엡 5:15-21

  2002년 12월 29일, 현풍제일교회 송년주일

 

 또 다시 한해가 서서히 저물어갑니다. 미래의 꿈이 이루어질 날을 생각할 때는 시간이 더디 가는 것 같기도 하지만, 지나간 날을 되돌아보면 시간은 참으로 빨리도 흐른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됩니다. 20살에는 20킬로미터 속도로, 30살에는 30킬로미터 속도로, 40살에는 40킬로미터 속도로, 50살에는 50킬로미터 속도로, 60살에는 킬로미터 속도로 시간이 달려간다는 말이 있듯이, 오래 살수록 세월이 더 빨리 달아나는 것 같이 느껴지는 것은 무슨 탓일까요? 나이가 들수록 바쁘게 살아서 그럴까요, 아니면 나이가 들수록 세월이 더 소중하게 느껴져서 그럴까요? 좌우간 그 무엇으로도 붙잡을 수 없는 소중한 시간을 생각할 때마다 우리는 세월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각오가 생겨납니다. 왜 세월을 아껴야 합니까?

 

1. 세월은 너무나 빠르기 때문입니다.

롱펠로우는 "인생찬가"에서 다시금 다음과 같이 읊고 있습니다.

"지붕 위의 바이올린"이라는 영화의 주제곡도 인생의 빠름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시편의 저자는 아침 잎사귀 위에 잠깐 앉았다가 해가 뜨면 사라지는 이슬, 아침 안개, 지나가는 그림자, 잠깐 동안의 수면,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베이는 풀에 빗대어 세월의 빠름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년수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간다"(시 90:S-10, 103; 15, 144:4). 그러므로 전도서의 저자는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12:I-2)고 권고합니다. 공동 번역은 "세월을 아끼라"는 개역 본문을 "여러분에게 주어진 기회를 잘 살리십시오"라고 번역합니다. 세상사가 모두 불공평해도, 세월 앞에서 모든 인간은 공평합니다. 그 누구도 시간을 임의로 늘리고 줄일 순 없습니다.

하루 24시간은 그 누구에게나 공평히 선사됩니다. 성서에서 시간의 뜻을 갖는 카이로스(Kairos)라는 단어는 원래 고대 희랍의 전설적인 동물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이 동물은 하루에 새끼를 한 마리씩 낳아 이 새끼를 잡아먹고 사는 동물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우리 인간은 하루하루 똑같은 세월을 받아 소비합니다. 그렇지만 똑같은 시간이라도 사람에 따라 전혀 다르게 사용될 수 있습니다. 시간은 탕진될 수도 있고, 최대한 선용될 수도 있습니다.

감리교의 창시자인 요한 웨슬리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는 시간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보다 더 시간을 낭비하는 것은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쓰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쓰는 것은 사실 시간을 도둑맞는 것과 같습니다.

뉴욕 주에 사는 스미스 씨는 출근하러 나가보니, 자동차 배터리가 없어진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이튿날 새벽 집 앞에 편지와 함께 새 배터리가 놓여 있었습니다. "그제께 밤에 위급한 환자가 생겼는데, 내 차 배터리가 고장나서 선생님의 배터리를 빼갔습니다. 사죄의 뜻으로 새 배터리와 뮤지컬 표 두 장을 드립니다." 스미스 씨는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세 배터리가 생겼고, 마침 그 뮤지컬은 평소에 보고 싶었던 것이었습니다. 그 날 밤에 그들 내외는 즐겁게 맨해튼에 나가 저녁을 사먹고 뮤지컬을 보고 열두 시쯤에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가전도구와 패물 등이 깨끗이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리고 편지를 쓰기 좋아하는 도둑인지 이런 내용의 쪽지가 시계에 붙어있었습니다. "남의 시간까지는 가져갈 수는 없어서 이 큰 시계만은 손을 안 댔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귀중한 시간을 많이 도둑맞습니다. 술과 도박을 즐기거나 게으르거나 남의 일에 지나치게 간섭하는 등으로 우리의 귀중한 시간을 도둑맞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주어진 시간을 아끼고 선용해야 합니다.

2. 마지막 날이 언제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죽음 앞에서 만인은 평등합니다. 그리고 죽음은 누구에게나 예측 없이 오고, 출생순서와는 다르게 불현듯 닥쳐옵니다. 죽음은 멀리 있지 않고 항상 우리 주위를 배회하며 기회를 노리고 있습니다. 스페인의 한 지주의 하인이 정원 일을 보다가 죽음의 신을 만나 깜짝 놀라서 리스본으로 도망을 갔다고 합니다. 이를 궁금히 여기던 주인이 죽음의 신을 만나 "왜 나의 하인이 그처럼 놀라서 도망갔느냐?"고 물었더니, 죽음의 신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고 합니다. "깜짝 놀란 사람은 바로 나입니다. 오늘 내가 하인을 데려가기로 예정한 곳은 바로 리스본이었는데, 여기(마드리드)에 있는 것을 보고 내가 정말 놀랐습니다." 이 이야기는 죽음의 숙명을 적나라하게 폭로합니다.

20세기의 위대한 실존철학자 하이데거(M. Heidegger)는 죽음에 대해 특히 예리하게 분석하였습니다. 그는 죽음의 근본성격을 다섯 가지로 설명했습니다. 1) 사람은 다만 혼자서 죽는다. 그 누구도 다른 사람 대신 죽어줄 수 없다. 2) 죽음은 남에 관한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에 관한 것이다. 3) 우리는 죽음을 넘겨잡을 수 없다. 즉 죽음보다 앞설 수 없다. 4) 죽음은 가장 확실한 것이다. 5) 죽음은 언제 찾아올는지 모른다. 하이데거는 죽음에 대한 불안을 죽음에 대한 각오로 바꿈으로써, 죽음에 대한 불안을 이길 수 있고 죽음에서 자유할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서 죽음은 영생(부활)에 대한 신앙 속에서 극복됩니다. 그러므로 죽음은 인생의 마지막 해답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죽음을 통하여 우리가 살았던 삶을 결실로서 마감 짓고, 우리가 살아가고자 하는 방향을 향해 죽음 저 너머로 넘어갑니다.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 확실한 설명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도, 가장 확실한 것은 죽음은 우리의 삶의 총결산이요, 우리의 삶의 방향을 최종적으로 확정하는 분기점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의 문제는 죽음이 아니라 삶, 즉 "어떻게 사느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실한 그리스도인은 항상 죽음을 염두에 두고 살았습니다. 아니 매일매일 죽는다는 각오로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종말론적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즉 죽음을 항상 냉철히 꿰뚫어 보고 살아야 합니다. 죽음에 대한 불안을 억압하거나 죽음을 의식 밖으로 내몬다고 해서 죽음의 문제가 해결되진 않습니다. 오직 죽음 앞에서 고독하게 결단하며 사는 삶이야말로 하루하루를 소중히 아끼고, 영원을 위해 심으며, 영생을 준비하는 삶일 것입니다.

3. 때(시대)가 악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악한 시대에서 어리석은 자처럼 음란, 방탕하지 말고, 성령 충만 가운데서 시와 찬미와 영가로 화답하며, 범사에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하면서 서로 섬기라고 권면합니다.

과학이 발달할수록 인간의 삶이 편리해졌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과 자연을 파괴하는 힘도 더욱 막강해졌습니다. 예컨대, 원자력은 동력과 에너지를 얻는 유용한 힘이 되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엄청난 살상 무기가 되었습니다. 컴퓨터는 빠른 속도로 계산하고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게 만들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컴퓨터를 이용함 범죄도 증가하고 있습니다. 물질이 풍요해지면서 삶이 훨씬 더 윤택해졌지만, 인간성은 더 황폐해졌습니다. 가난했던 옛날보다 더 많은 어린이들은 버려지며, 가정이 점점 더 해체되어가며, 자연도 신음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과학 문명이 인간을 구원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더 분명해졌습니다. 그러면 누가 인간을 구원할 수 있습니까? 누가 인간을 행복하게 합니까? 돈도 아니고, 과학도 아니고, 컴퓨터도 아니고, 나도 너도 아니고 오직 그리스도만이 인간을 구원하고 행복하게 할 수 있습니다.

"세월을 아끼라"는 말은 세월(시대)을 구원하라(Redeem the time!)라는 말로 번역될 수도 있습니다. 누가 세월을 구원할 수 있습니까? 바로 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옛날이나 오늘이나 제자들을 통해 구원의 일을 하십니다. 그의 제자들에게 귀신을 쫓아낼 수 있는 능력을 주셨으며,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고 분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바울도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그리스도인에게 다음과 같이 권면합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1-3).

옛날에 잠수함을 타는 사람들은 잠수함 속에 토끼 한 마리를 넣어 두었다고 합니다. 기관이 고장이 나서 잠수한 속에 산소가 모자라면 토끼가 제일 먼저 알아챈다고 합니다. 이처럼 우리 그리스도인은 악한 세상 속에서 살면서도 악에 물들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악을 제일 민감하게 알아채고 사람들에게 경고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세월은 빠릅니다. 그러므로 세월을 아낍시다. 우리는 언제 죽을 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세월을 아낍시다. 세월은 악합니다. 그러므로 세월을 아낍시다. 이것이 오늘 2002년 마지막 주일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에게 드리는 저의 진심으로 권고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