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소망 중에 즐거워하라

롬 12:12

2003년 1월 1일, 현풍제일교회 송구영신예배

 

 

성도 여러분, 드디어 새해가 밝아왔습니다. 새해 복많이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새해에는 우리 주님의 평강과 은혜가 여러분의 가정과 직장에 더욱 풍성히 넘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새해에는 우리 교회가 새로운 도약을 이룰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저는 올해 우리 교회의 표어를 "새롭게 출발하는 교회"로 결정하였습니다. 해가 바뀌면, 사람들은 막연하나마 뭔가 꿈을 꾸게 되고 희망을 품게 됩니다. 마치 어두운 터널을 벗어난 것처럼, 마치 캄캄한 동굴 속으로 밝은 빛이 비치는 것처럼 사람들은 새로운 희망을 품게 됩니다. 인간은 이처럼 자연적이고 환경에 지배를 받는 존재이기 때문에 해가 바뀌는 이 단순한 사실 하나만으로 새로운 희망을 갖게 됩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새로운 희망을 갖게 되는 것은 단지 새 해가 다가오고, 새로운 태양이 떠오르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인간은 동물과 달리 환경과 본능을 무한히 초월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철학자들은 인간을 일컬어, 개방적인 존재, 자유로운 존재라고 불렀습니다. 동물들도 기계는 아니므로 어느 정도 자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물은 일정한 한계를 결코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동물은 환경에 잘 적응할수록 더 잘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결코 환경에 잘 적응한다고 해서 잘 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이 만물을 지배하고 다스릴 수 있는 뛰어난 존재, 만물의 영장이 된 것은 환경에 잘 적응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보다는 환경을 잘 극복했기 때문입니다. 인류의 위대한 발견과 발명은 대개 주위의 조롱과 반대에도 무릅쓰고 감히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을 했기 때문에 이루어졌습니다.       

1969년에 암스트롱이 달에 착륙했을 때, <뉴욕 타임스>는 사과문을 실었습니다. 그 이유는, 49전인 1920년 1월 13일자 신문에 한 로켓 연구가를 어리석은 꿈을 꾸는 황당한 인간으로 비판하였기 때문입니다. 매사추세츠 주에 로버트 고다드(Robert Goddard)란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마을의 골칫거리였습니다. 로켓 실험을 한다고 폭음을 내고 냄새를 풍겼기 때문입니다. 심지어는 개도 이런 그를 싫어했다고 합니다. 동네에서 고다드 씨를 내쫓으려고 소송을 제기했을 때, <뉴욕 타임스>는 그를 '달에 착륙하겠다는 망상을 하는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비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고다드는 로켓에 필요한 액체 연료를 발견하여 로켓 발견에 크게 공헌하였습니다. 그는 산을 넘는 비행기 정도가 아니라 달에 갈 수 있는 꿈을 품었으며, 비난과 조롱 속에서도 이 꿈을 버리지 않은 그는 마침내 이 꿈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작년 우리 나라의 가장 큰 기쁨은 뭐니뭐니 해도 월드컵 대회였습니다. 우리는 세계 16강에 한번 들어갈 수만 있으면 좋겠다는 꿈을 꾸었지만, 히딩크 감독은 그보다 더 깜짝 놀라울 일이 일어날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의 뛰어난 훈련술, 용병술도 분명히 돋보였지만, 그보다 그의 꿈이 더 놀라웠습니다. 마침내 우리 나라의 축구 선수들이 4강(준결승)을 이루었을 때, 온 열도가 열광에 휩싸였습니다. 준결승에서 붉은 악마는 "꿈은 이루어진다"는 표어를 들고 나왔습니다. 이 표어는 지금까지 유행어가 되었습니다. 물론 우리는 4강전에서는 월드컵에서 세번이나 우승한, 전차군단이라고 불리는 막강한 독일 축구팀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월드컵 대회에서 한번도 이겨본 적이 없는 우리는 우리가 바라던 16강을 훨씬 넘는 놀라운 결과를 이루어내었습니다. 이렇게 우리 나라의 축구팀에 세계가 깜짝 놀란 성적을 거둔 것은 히딩크가 한국에 잘 적응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실력보다는 나이, 연줄을 통해 팀을 만들어가던 한국의 잘못된 관행을 히딩크는 과감히 깨뜨렸기 때문입니다.  

최근에 한국 사회에서 출세하려면 여섯 가지의 "쌍 기억으로 된 한 글자"가 있어야 하다는 말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곧 "꿈, 끼, 깡, 꾀, 꼴, 끈"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앞에 있는 것일수록 더 좋고 뒤로 갈수록 더 나빠지는 형국입니다. 우리 그리스인들이 마땅히 늘 꾸어야 할 꿈은 벼락부자가 되는 돼지꿈이 아니라 예수님이 꿈꾸었던 꿈, 즉 위대한 하나님 나라의 꿈입니다.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마 6:33).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서 우리는 끼, 타고난 소질, 하나님이 주신 은사와 재능을 최대로 활용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깡이 필요합니다. 깡은 고집이 아니라 성실, 끈기, 노력, 투지를 말합니다. 물론 좋은 의미에서 꾀, 즉 지혜도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가져야 할 꾀는 세상 사람처럼 남을 속이고 자신만의 유익을 구하는 그런 꾀가 아니라 우리 모두를 유익케 하는 지혜일 것입니다. 꼴은 외모를 뜻합니다. 요즈음 외모를 중시하는 문화 때문에 성형수술이 유행이라고 합니다. 가급적 외형도 좋은 게 좋겠지만, 하나님은 외모보다 내면, 마음을 더 중요하게 보십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한 사람들은 대개 외모가 출중한 사람들이 아니라 다윗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던 사람들입니다.

마지막은 끈이라고 합니다. 물론 좋은 의미에서 인연과 배경은 필요할 것입니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이것은 너무나 부정적으로 나타났습니다. 패거리주의, 지역주의, 연고주의가 판을 치는 한국 사회에서 이 끈은 곧 부정부패의 주범이 되었습니다. 심지어 교계에서도 이 끈, 즉 빽이 큰 힘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직자들 중에도 "성골, 진골, 무골"이 있다는 말이 돌고 있으며, 목사들은 죽을 때에 "꽥"하고 죽지 않고 "빽"하고 죽는다는 우스개 소리도 있습니다. 지금까지 불행하게도 한국에서는 꿈과 끼, 깡보다는 꾀와 꼴, 특히 끈이 더 큰 힘을 발휘했습니다. 만약 우리 나라의 축구팀이 여전히 끈을 중심으로 만들어졌다면, 4강은커녕 16강에도 들어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히딩크는 꿈과 끼, 깡을 길렀고, 그래서 우리는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에서 많은 사람들이 독일이 만든 악명높은 포로 수용소에서 죽어갔습니다. 6백만명의 유대인들이 독가스실에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런 비참한 환경 가운데서도 끝까지 살아남은 사람들은 끝까지 꿈을 버리지 않았던 사람이라고 합니다. 베를린 대학 피아노 교수였던 유명한 헤르만(Herrmann) 씨도 나치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수용소에 갇혔다고 나중에 살아남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루 종일 고된 노동을 마치고 지친 몸으로 수용소에 들어왔을 때, 자기 전에 매일 한 시간 나무 침대를 건반으로 삼아 연습했다고 합니다. "나는 반드시 다시 피아노를 연주할 것이다"라는 불굴의 희망을 품었기 때문에 그는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내가 기억하던 곡들은 한없이 반복되며 수용소 연주장에서 밤마다 공연되었다. 소리는 나지 않았으나 나의 소망의 귀에는 그 아름다운 곡들이 쟁쟁히 울리고 있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지금 어떤 환경에 처해 있든지 간에 꿈, 희망을 버리지 마십시오. 아브라함, 야곱, 요셉, 모세를 위시한 성경 속의 위대한 믿음의 용사들은 바로 소망의 사람이었습니다. 기독교의 믿음은 그저 그 무엇을 인정하고 수긍하는 지적인 행위가 아니라, 보이지 않은 것을 바라고 앞으로 나아가는 소망의 행위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말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으니라(히11:1-17). 그러므로 소망을 버리는 것은 믿음을 버리는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산 소망을 버리는 행위는 유랑하는 하나님의 백성에서 떨어져 나가는 일이요, 소망하는 자들의 앞길을 가로막는 죄가 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고대 교회의 교부였던 요한 크리소스톰(J. Chrisostomos)도 "우리를 멸망에 빠뜨리는 것은 죄라기보다는 차라리 절망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희망을 품는 것은 단지 해가 바뀌거나, 단지 우리가 무한함 꿈을 꿈으로써 환경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만도 아닙니다. 우리가 끝끝내 절망 가운데서도 결코 소망을 포기할 수 없는 것은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하나님이 바로 "죽은 사람들을 살리시며 없는 것들을 불러내어 있는 것이 되게 하시는"(롬 4:17)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이름, 야훼(여호와)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는 뜻보다는 "나는 내가 되고자 하는 대로 될 자다."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은 광야에서 우리와 동행하시는 하나님, 아니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약속의 하나님, 현재로부터 미래로 탈출하시는 하나님, 미래와 새로움을 공급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20세기의 위대한 신학자요 저의 스승이기도 하신 위르겐 몰트만(J. Moltmann) 교수님은 "희망의 신학"이라는 책을 써서 일약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 책은 한국에도 1971년에 번역이 되었는데, 번역이 너무나 잘못되었기 때문에 제가 다시 번역하여 작년에 내어놓았습니다. 몰트만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에 독일군으로서 전쟁터에 끌려갔습니다. 바로 옆에서 친구들이 폭격에 맞아 온 몸이 산산조각으로 찢어지는 것을 보았을 때, 그는 몸서리를 쳤습니다. 그는 3년 수용소에 갇혔을 때, 절망과 수치로 몸을 떨었습니다. 그 때에 그는 미군 군목이 건네준 성경을 읽게 되었고, 고난 중에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고 믿음, 즉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신앙을 고백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어떠한 환경에 처해 계시더라도 소망을 버리지 마십시오. 아니 절망적인 환경 속에 있더라도, 바로 그렇기 때문에 결코 소망의 닻줄을 놓아버리지 마십시오. 소망의 닻줄은 환경도 아니고 인간의 능력도 아니고 살아 계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잊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이 언젠가 여러분의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고, 여러분의 근심을 기쁨으로 바꾸어 놓으실 것입니다. 절망 가운데서도 항상 즐거워하십시오. 소망 중에 즐거워하십시오. 부족한 여러분을 소망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