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새롭게 출발하는 교회

고후 5:17

 2002년 1월 5일, 현풍제일교회 신년예배

 

 

계미년 새해 첫 주일에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 우리 교회에 나오신 성도님, 올해도 여러분에게 주님의 평강이 늘 함께 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작년 12월 20일에 부천에서 내려온 저는 짧은 기간이지만 숨가쁜 나날을 보냈습니다. 피로를 채 풀기도 전에 연이어 다가오는 주일 예배와 성탄주일 예배, 송구영신 예배, 신년주일 예배를 감당해야만 했습니다. 이곳 현풍 마을의 지리와 환경에 조금씩 적응하면서 성도들의 형편도 조금이나마 살펴보았습니다. 부족한 저를 이곳에 보내신 하나님과 저를 따뜻하게 맞이해 주신 여러분에게 다시금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지나간 15여년 동안 저는 주로 신학생들에게 신학을 가르치고 책을 쓰는 일에 정력을 쏟았습니다. 그러나 나이 50세를 넘기는 가운데서 하나님은 저의 생각과 환경을 바꾸시면서 목회의 소명을 주시기 시작하셨습니다. 어떤 이들은 학문도 하나의 실천이라고 말하지만, 실천과 무관한 순수한 학문, 즉 학문을 위한 학문은 제게 점점 더 의미가 없어졌습니다. 더욱이 신학은 바로 교회와 인간을 위한 신학일 수밖에 없는데, 신학이 점점 더 교회와 인간의 현실로부터 멀어진다는 생각 때문에 저는 괴로움과 함께 공허감까지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에게 기도하기를, 남은 인생은 외국에서 선교사로서 봉사할 수 있게 해 주시든지, 작은 시골 마을에서 조용히 교회를 섬기게 해 주시든지, 저의 길을 인도해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작년 가을부터는 하나님이 어디든지 먼저 인도하시는 대로 가겠다고 약속하며, 의심을 버리고 계속 기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동안 게을리 했던 성경 읽기과 묵상, 기도를 시작하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저를 맡겼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완전히 전혀 예상 밖으로 저를 이곳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이곳에 오는 과정에서 저를 위하시는 분들이나 저를 반대하시는 분들은 왜 작은 시골 교회로 가느냐고 반문하였습니다. 어떤 분들은 제가 가는 일을 축하해 주시기도 했지만, 어떤 분들은 그 동안 학자로서 살아온 저의 삶을 포기해야 하는 처지를 동정하거나 아까워했습니다. 솔직히 지나간 세월 동안 제가 꿈꾸었던 학문의 꿈을 접어야 하는 아픔도 없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남들이 뭐하고 생각하든, 제 스스로도 과연 분수를 넘은 일을 하는 것은 아닌지, 신학일념으로 살다가 갑자기 진로를 바꾸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지 고민도 적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순조롭게 인도하신 하나님과 부족한 저를 반기시는 여러분을 대하면서, 과연 하나님이 여기까지 인도하셨음을 저는 확신합니다.

 저에게서 목회는 사실 완전히 새로운 출발을 의미합니다. 그 동안 설교보다는 강의를 주로 해왔으며, 사람보다는 책을 더 가까이 해왔습니다. 학생을 대하더라고 다소 피상적으로 대해 왔습니다. 하지만 이제 저는 매우 구체적인 목회와 삶의 현장으로 들어왔습니다. 정말 이것은 저의 삶에서 탄생 다음으로 가장 큰 전환, 새로운 출발입니다. 저는 이 출발점에 기도하는 마음으로 서 있습니다. 여러분의 기도와 도움을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 인생에는 새로운 출발을 해야 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인생은 순탄한 항해길이 아니므로 때로는 험한 파도와 싸워야 하며, 원치 않는 바다로 떠밀려가거나 암초에 좌초하거나 낯선 해안으로 피해야 할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또 여리고로 내려가던 사람처럼 강도를 만나 피해를 입을 수도 있습니다. 인생의 고비마다 우리는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닥치는가?" 물으면서 하나님에게 원망하거나, 갈 길을 포기하고 주저앉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하지만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한 길을 막으시면, 다른 길을 열어주십니다. 우리의 마지막은 하나님의 시작입니다. 아니 하나님은 때때로 사랑하는 자녀들을 전혀 엉뚱한 곳으로 인도하십니다. 전해 새로운 출발, 아니 완전한 탈출을 요구하십니다.

 구약성경에서 새로운 탈출의 모범은 아브람입니다. 어느 날 하나님은 조용히 살고 있는 아브람에게 하나님은 "네 고향과 친척과 아비의 집을 떠나라"고 명하셨습니다. 출발은 단절의 아픔을 동반합니다. 보장된 편안한 삶, 정든 친구와 고향,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습관과 문화를 떠나는 것은 곧 죽음만큼 가혹한 단절입니다. 그러나 손바닥을 펼쳐서 쥐고 있던 것을 버리지 않으면, 새로운 것을 쥐지 못합니다. 큰 민족을 이루고 그로 인해 세상 사람들을 복되게 하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기 위해 아브람은 미련없이 정든 자리를 박차고 떠납니다. 바로 이로부터 이스라엘의 역사, 아니 온 인류의 역사가 새롭게 펼쳐지기 시작했습니다. 만약 아브람의 새 출발이 없었다면, 하나님의 백성의 위대한 탄생은 없었을 것입니다. 고향을 떠나 방랑하는 나그네의 삶에는 괴로움과 모험이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가끔 하나님의 약속과는 먼 곁길, 즉 애굽으로 빠지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의 신실하신 도움으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또 하나의 새로운 탈출의 모범은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입니다. 노예 생활을 청산하고 약속의 땅으로 가기 위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기적적인 도움으로 애굽을 탈출하였습니다. 오랫동안 애굽에서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은 그곳에서 쌓아온 소중한 재물들과 익숙한 것들을 과감히 버려야 했습니다. 그곳에 대한 미련은 모두 다 버려야 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하나님의 끊임없는 도우심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힘들 때마다 애굽의 고기가마와 노예생활을 그리워하곤 하였습니다. 이처럼 새로운 탈출은 쉽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들은 대개 탈출의 대가를 치르기를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좋든 나쁘든, 사람들은 지금까지의 습관에 길들여 있기 때문입니다.   

물고기 실험을 해보면, 신기한 일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큰 수조를 만들고 물을 채웁니다. 그리고 그 수조의 한 가운데를 유리로 막은 뒤 한쪽 편에만 물고기들을 넣습니다. 물고기들은 번번이 중간에 막힌 유리에 머리가 부딪칩니다. 분명히 그 너머에도 물이 있는 것이 보이고 중간에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은데, 계속 부딪치기만 합니다. 마침내 물고기는 중간을 넘어가기를 포기해 버립니다. 유리 칸막이가 있는 바로 앞에서 방향을 바꾸어 버립니다. 조금만 더 가면 또 다시 머리가 부딪칠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칸막이 유리를 치워버려도 물고기들은 계속 수족관 중간을 넘어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물고기가 과거의 생각에 사로잡혀 버리면, 새로운 기회를 전혀 붙잡지 못합니다.  

불과 2-30년 전만 하더라도, 우리는 시장에서는 산 닭을 사서 목을 비틀고 털을 뽑아서 조리를 하였습니다. 그 당시 살아 있는 닭을 집으로 가져가기 위해 대개 닭의 두 다리를 새끼줄로 묶었습니다. 그러면 닭을 산 사람은 그 새끼줄의 한 쪽 끝을 잡고는 집으로 돌아갑니다. 이렇게 집으로 옮겨간 닭을 당일로 잡지 않고 하루 밤을 넘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만약 닭을 풀어주면 어디로 가버릴지 알 수가 없으므로 두 발을 새끼줄에 묶어둔 채로 닭을 부엌 한 구석이나 광속에 놓아둡니다. 그리고 다음날 닭을 잡기 전에 닭의 발을 묶고 있던 새끼줄을 풀어 줍니다. 이때 새끼줄을 치우지 않고 그 새끼줄로 닭다리 주위에 둥그렇게 원을 그려 놓으면, 신기하게도 닭은 움직이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손으로 모는 시늉을 해도, 닭은 새끼줄 너머로 나아갈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밤새도록 새끼줄에 묶여 있었던 닭은 눈에 보이는 새끼줄을 보고서 여전히 자신이 새끼줄에 묶여 있는 것으로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닭도 자신의 습관에 갇혀 버리게 됩니다.  

우리 인간은 분명히 물고기와 닭보다는 뛰어난 존재입니다. 하지만 우리 인간은 생각보다 동물과 가깝습니다. 침팬지와 유전자가 95% 이상 닮아 있으며, 심지어는 돼지와 쥐와도 아주 가깝기 때문에 이런 동물로 실험을 합니다. 우리 자신들도 지금까지 익숙하게 살아온 습관과 세계를 잘 벗어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생각과 다른 견해를 잘 수용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세계가 얼마나 넓은지를 알지 못하며, 한 평생 자신의 좁은 우물 속에 갇혀 살다가 죽고 맙니다.

 하지만 신앙의 백성, 이스라엘의 역사는 아브람의 탈출, 애굽의 탈출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사야는 제2의 탈출, 바벨론 탈출을 앞두고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적 일을 생각하지 말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사 43:18-21). 하나님의 나라도 탈출로부터 시작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다가왔으니, 회개하라"(마 4:17)고 하셨습니다. 회개란 단지 마음의 돌이킴, 죄의 청산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완전한 방향전환, 즉 새로운 출발을 의미합니다. 사울도 예수님을 만난 후에는 완전히 새로운 사람, 바울로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그래서 그는 지나간 것들을 모두 분뇨처럼 여겼으며, 오직 앞을 향해서만 달려갔습니다.  

 새로운 출발이 없으면, 발전도 없고, 구원도 없습니다. 이처럼 기독교는 좋았던 과거를 그리워하거나 과거로 퇴보하는 신앙, 익숙한 현재에 안주하는 신앙이 아니라, 미래를 향해 출발하는 종교입니다. 신앙이란 경계선을 뛰어넘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앙이란 우리를 구속하던 줄을 끊어버리고 넓은 곳으로 뛰쳐나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분"(계 21:5) 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마 9:17)고 하셨습니다.

 새해가 되었습니다. 이 세상도 날로 새로워지고 있습니다. 아니 이 세상의 일은 언젠가 의복처럼 낡아지고 헤어지더라도, 하나님의 일은 날마다 새롭습니다. 이제 여러분의 목회자도 바뀌었습니다. 여러분은 고우나 미우나 저와 더불어 함께 가야 합니다. 뒤를 돌아보고 후회하거나 아쉬워 해봐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지난 시절이 아무리 좋았더라도, 이제 되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저와 더불어 날로 좋아지는 교회, 날로 아름다워지는 교회, 날로 은혜로운 교회를 만들어 갑시다. 아니 믿음도 소망도 언젠가는 사라지지만, 사랑만은 언제든지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우리 모두 함께 날로 사랑스러워지는 교회를 일구어 갑시다. 사랑의 하나님이 올해도 여러분의 가정과 교회, 여러분의 심정에 날로 새로운 은혜를 더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