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하나님의 어린양

 요 1:29

 2003년 4월 13일, 현풍제일교회

 

 

교회력에 따라서 오늘 우리는 "종려주일"을 지키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종려주일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에 많은 군중이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들고 "호산나"하며 환영했다는 사실에 근거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그런데 이 날에 군중은 예수님을 대대적으로 환영하였기 때문에, 상식적으로 보면, 예수님에게는 상당히 좋은 날로 생각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은 이스라엘 민족의 새로운 왕으로 등극하시기 위함이 아니라 죽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죽으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자"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은 것은 바로 예루살렘에 올라가 성전을 보고서 "이 성전을 허물라. 내가 삼일만에 짓겠다"라는 성전모독의 발언을 한 것과 성전 입구에서 희생제사를 위한 동물을 팔고 돈을 바꿔주던 상인들을 몰아낸 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굳이 죽지 않으려고 결심하셨다면, 죽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만약 성전 체제를 위협하는 발언과 행동을 하지 않았다면,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이 않았을 겁니다. 물론 십자가는 반란을 일으킨 정치범들에게 로마가 가한 무시무시한 공포의 형틀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처음으로 죽이기로 결심하고 모의한 사람은 분명히 유대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로마인도 유대교의 계략에 동참하여 정치적으로 매우 위험한 인물인 예수님을 십자가 형틀에 매달았습니다.

예수님은 왜 조용히 살다가 조용히 죽지 않으시고, 왜 그렇게 위험한 죽음의 길을 의도적으로 걸어가셨습니까? 무슨 목적으로 예수님은 고난을 스스로 자초하셨습니까? 예수님에게 가장 사랑을 받은 요한은 "세상 죄를 지고 가기 위함"이라고 단호히 말합니다. 요한은 세례 요한의 입을 빌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양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희생 제물로 사용한 동물입니다. 양은 양순하여 말을 잘 듣습니다. 특히 어린양은 더 그렇습니다. 양털은 희기 때문에 순결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양은 희생 제물로 가장 자주 이용되었습니다. 양은 이스라엘의 죄짐을 지기 위해 죽임을 당하는 속죄의 제물이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도 바로 인류의 죄짐을 지기 위해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담당하신 죄짐은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인류 대신에 지신 죄짐은 바로 죄책, 즉 형벌이었습니다. 죄는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죄는 보상과 형벌을 요구합니다. 인류는 하나님에게 배반과 불신앙, 교만과 불순종의 죄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인류는 서로에게 수많은 악행을 지었습니다. 인류의 죄는 땅의 저주를 가져왔습니다. 그러므로 인류는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모습에서 세상의 죄를 대신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이사야 53장이 말하는 "고난받는 하나님의 종"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사야는 말합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5-6). 예수님은 죄인이 우리가 져야 할 죄짐을 대신 지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우리의 형벌을 대신 지셨습니다(롬 4:25).

죄의 가장 무거운 형벌은 죽음입니다. 사람이 죽는 것은 자연적인 이치요, 하나님의 창조 섭리입니다. 그러므로 육체적인 죽음이 곧 죄의 결과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죽음의 본질은 영적인 죽음에 있습니다. 영적인 죽음은 곧 하나님과의 단절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비록 살아 있는 사람이라도, 만약 그가 하나님을 떠나 있다면, 그는 죽은 사람입니다. 그와 달리 그리스도 안에서 죽는 사람은 육체적으로는 죽었지만 하나님과 연합되어 있기 때문에 영생을 얻은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분명히 죄에 대한 형벌로서 채찍과 조롱,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담당하신 가장 큰 형벌은 바로 죽음이었습니다. 아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아버지와 완전히 분리되는 고통을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돌아가시기 직전에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소리치셨습니다. 이것은 성자 예수님이 겪으신 성부와의 완전한 분리, 버림받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에 하나님에게 철저히 버림을 받은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우리에게 죄용서와 기쁨, 영생을 선물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 진 속죄양이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인류를 다시 화해시킨 화목 제물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고난은 단지 우리를 위한 고난,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한 고난에 그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인류의 역사 이래로 고난을 당하는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당하신 고난이기도 합니다. 성자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실 때, 성부 하나님은 하늘에서 우두커니 바라보시지 않았습니다. 성부 하나님은 성령 안에서 성자의 고난을 함께 겪으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도 단지 인류의 죄를 대신 지고 가신 속죄양일 뿐만 아니라 인류의 고난을 함께 지신 진실한 친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 예수님은 우리의 고난을 함께 져주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고난은 우리의 고난이기도 하며, 우리 시대의 고난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 자신이 우리의 고난에 참여하시며 우리의 고통을 친히 담당하신다는 표시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고난을 당하는 사람들의 형제가 되기 위해 친히 고난을 당하는 사람들 속으로 들어오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어떤 고난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고난은 하나님과의 더 깊은 사귐을 가져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고난을 당하는 사람들을 더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가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것이다"(마 5:4)라고 말한 뜻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이 우리 대신에 고난을 받으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와 함께 고난을 받으셨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비록 예수님의 고난과 감히 비교할 수는 없지만, 예수님의 고난과 동일한 고난을 스스로 받으신 한 분을 소개함으로써, 설교를 맺을까 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독일인은 유대인을 학살하기 위해 악명이 높은 수용소를 지었습니다. 거기서 약 6백만 명의 유대인들이 굶주림과 질병, 고문과 처형으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 당시에 실제로 있었던 실화 하나를 소개할까 합니다.

어느 날 포로 수용소에서 한 사람이 탈출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러자 독일군인은 탈출한 사람과 같은 방에 있던 사람들을 마당 밖으로 불러놓고, 열 명의 사람을 골라 죽이기로 하였습니다. 열 명의 사람이 차례대로 불려 앞으로 나왔습니다. 그러자 그 중에 한 젊은이가 살려달라고 애걸하였습니다. 고향에는 자기를 기다리는 노모와 아내와 어린 자식이 있으니, 제발 살려달라고 싹싹 빌었습니다. 잔인하기로 유명하였던 독일군인이 그의 부탁을 들어주었을 리가 없습니다. 그러자 무리 속에서 나이가 지긋한 한 노인이 터벅터벅 앞으로 걸어나오더니, "젊은이 대신에 내가 죽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게 아닙니까! 모두가 놀라 눈이 휘둥그래 해졌지만, 독일군인은 그의 제안을 냉정하게 거부했습니다. 그래도 그 노인은 끝까지 죽음을 자청했습니다. "나는 신부이므로 아내도 자식도 없습니다. 제발, 나를 젊은이를 대신에 죽게 해주십시오." 결국 그의 완강한 제안을 독일군인도 물리칠 수 없었습니다.

불행하게도 아무런 죄도 없이 죽도록 뽑힌 10명의 사람들은 지하실에서 알몸으로 벗겨진 채로 굶주림과 추위로 죽었는데, 그 중에서 가장 늦게까지 죽지 않았던 사람은 누군지 아십니까? 바로 가장 나이가 많은 신부였습니다. 이 신부는 9명의 사람이 죽을 때까지 그들을 위로했습니다. "죽음은 그렇게 두려운 것만은 아닙니다. 여러분의 억울한 고통을 하나님은 알고 계시며, 반드시 갚아주실 것입니다." 이렇게 신부는 나머지 9명의 고통과 함께 고통을 당하면서 끝까지 그들을 위로하였습니다. "사명이 있는 자는 결코 죽지 않는다"는 말이 정말 이 경우에 해당하는 말인 것 같습니다. 마지막까지 살아남았던 신부는 결국 독일군인이 주입한 공기 주사기를 맞고 죽었다고 합니다. 프랑스 사람이었던 바로 이 신부의 이름은 "꼬르베"이며, 나중에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성자 시호를 받았다고 합니다.

꼬르베 신부는 한 젊은이 대신 고통을 받고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고통을 받는 사람의 곁에서 함께 고통을 당했습니다. 이로써 그는 한 젊은이를 살려주었을 뿐만 아니라, 9명의 사람들의 형제가 되어 그들과 같이 고통을 당하고 죽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도 바로 이런 죽음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짐을 지시고 고난과 죽음을 당하신 어린양이시며, 우리의 고난 속으로 들어오시는 진실한 친구이십니다. 예수님의 크신 사랑에 감사합시다. 그리고  예수님처럼, 그리고 꼬르베와 같은 예수님의 진실한 친구들처럼 우리도 그렇게 살아가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