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부활의 의미

고전 15:35-58

2003.4.20, 현풍제일교회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확신이 약해서인지는 몰라도,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게 그다지 실감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여러분은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사실이 피부에 와 닿게 느껴지십니까? 요한은 그리스도인을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자"(요 3:5)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이라면 누구나 다시 태어났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니고데모가 아닌 우리도 "거듭난다"는 사실이 구체적인 현실로 느껴지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여러분은 다시 태어났다는 사실이 정말로 사실처럼 여겨지십니까?

그런데 봄이 오니까 정말 창조물들이 새롭게 되고 생명이 다시 태어난다는 사실이 너무나 절실하게 믿어집니다. 꽁꽁 얼었던 땅이 녹자, 그간 다 죽었던 것 같던  온갖 풀꽃들이 굳은 대지를 뚫고 올라옵니다. 훈훈한 훈풍이 차가운 겨울바람을 몰아내자, 어느새 꽃들은 그 어떤 예술품과도 감히 비교할 수 없는 아름다운 꽃망울을 터뜨리고, 그 어떤 인간도 감히 흉내낼 수 없는 황홀한 색깔의 옷을 입으며, 그 어떤 향수와도 감히 비교할 수 없는 순한 향내를 발합니다.  

참으로 봄은 자연이 단지 겉옷만을 갈아입는 계절이 아니라 새롭게 창조되고 또 다시 태어나는 계절입니다. 봄은 새 생명의 계절입니다. 이 봄소식과 함께 4월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부활의 기쁜 소식이 전달되는 달이 됩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그리스도인들은 봄축제를 부활축제와 함께 축하해 왔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봄과 함께 찾아오는 하나님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여러분에게 전달하고자 합니다.

 

1. 생명은 죽음보다 강합니다.

봄이 와서 대지 위로 훈풍이 불어오기 시작하면, 우리는 생명의 끈질김에 놀라게 됩니다. 추운 겨울의 거센 죽음의 힘에 눌려서 완전히 생명력을 잃어버렸다고 생각되는 황량한 땅에서 신기한 생명의 싹이 올라옵니다. 완전히 썩어버렸다고 생각되는 뿌리에서 새 싹이 돋아납니다. 농부들이 뿌리는 낱알이 땅 속으로 들어가 몰래 숨겨놓은 생명의 씨를 터뜨립니다. 그러므로 봄은 참으로 생명의 위대함, 생명의 아름다움, 생명의 소중함을 깨닫게 해주는 반가운 손님입니다. 봄은 생명의 계절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은 죽음보다 강하다는 사실을 봄은 우리에게 속삭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참으로 모든 생명은 언젠가 꼭 죽고 맙니다. 인간도 나서 늙고 병들고 죽습니다. 그러므로 언뜻 보면, 이 세상은 결국 죽음의 힘이 더 강하게 지배하는 듯이 보입니다. 죽음의 법칙이 결국 생명의 법칙을 깨뜨리는 듯이 보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 주위에는 죽음의 힘, 죽임의 세력들이 활개치고 있습니다. 지금도 지구를 주름잡는 테러사건, 무기산업, 정쟁이 고귀한 생명을 죽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을 서서히 죽이는 환경오염, 불량식품, 불량환경, 마약, 살인적 경제시장의 원리, 살인적 입시전쟁도 있습니다. 그리고 소리도 없이 일어나는 대략살상도 있습니다. 지금도 인류의 역사에서 전쟁 때문에 죽임을 당하는 생명보다 더 많은 수의 무고한 생명을 희생시키는 유아낙태가 끊임없이 자행되고 있습니다. 그 밖에도 인간을 죽음의 벼랑으로 내모는 온갖 범죄가 기승을 부립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죽음의 세력 앞에 굴복해야 할까요? 허무주의와 불신앙을 받아들여야 할까요? 결코 그를 순 없습니다. 우리는 죽음의 세력에 단호히 맞서야 합니다. 왜냐하면 생명은 죽음보다 강하기 때문입니다. 보십시오! 생명이 잠시는 죽음의 세력에 항복하는 것 같아도 결국엔 죽음을 이기고 맙니다. 잠시, 정말 잠깐 동안만 죽음이 우세할 뿐입니다. 죽은 땅에서 생명이 올라오고, 썩은 뿌리에서 싹이 나며, 딱딱한 씨알 속에서 연약한 생명이 움터 나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죽음이 결코 생명을 이길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생명의 하나님께서 죽음에서도 생명을 일으키시기 때문입니다. 태초에 성령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써 생명을 지켜 주시고 죽은 생명까지 일으켜 세워주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봄바람이 불면, 죽음의 골짜기에 누운 해골들도 일어납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살리는 영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만물을 거듭나게 하는 영이기 때문입니다. 물이 생명을 거듭나게 하듯이, 성령도 생명을 거듭나게 하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도 우리의 부활을 씨앗의 비유를 들어 설명합니다. "죽을 몸이 어떻게 다시 살아날 수 있느냐?"는 물음에 대해 그는 대답합니다. 씨가 죽지 않으면, 즉 씨가 썩지 않으면, 어떻게 씨에서 생명이 살아 나오겠는가(15:36)?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지만 그 썩을 것에서 썩지 않을 생명이 나온다(15:42).  썩을 몸이 썩지 않을 몸을 입고, 죽을 몸이 죽지 않을 몸을 입는다(15:54).

 그렇지만 씨앗의 생명과 몸의 부활은 한 가지 차이점을 갖고 있습니다. 즉 씨는 새 생명을 낳지만 결국에는 또 썩고 맙니다. 물론 생물은 씨앗을 통하여 계속 생명을 이어갑니다. 그러나 개개의 생명체는 수명이 다하면 사라지고 다른 생명체에게 생명을 양보합니다. 생명은 영원하지만 개개의 생명체는 유한합니다. 인간도 생물이기 때문에 자손을 통하여 생명은 이어갈 수 있지만, 똑같은 인간으로 다시 살아나지는 못합니다. 그에 반해 썩을 몸에서 다시 살아나는 부활의 몸은 영의 몸, 신령한 몸이기 때문에(15:44), 다시는 썩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창조된 피조물, 성령으로 거듭난 새 사람은 비록 죽더라도 언젠가는 죽지 않을 몸으로 살아납니다. 이것이 부활입니다.

하지만 부활은 마지막 날에 한꺼번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매일매일 영광의 날을 향한 변화 속에서 지금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활은 우리를 매일매일 거듭나게 하고 살리는 힘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처음 믿었을 때보다도 더 가깝습니다. 우리의 겉사람은 날로 후패하지만, 속사람은 날로 새롭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명의 궁극적 승리를 확신하고, 생명의 힘이 죽음의 힘보다 강하는 것을 전파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15:56-58).

 

2. 사랑은 미움보다 강합니다.

 미움은 죽이지만, 사랑은 살립니다. 미움은 흩트리지만, 사랑은 끌어 모읍니다. 미움은 내치지만, 사랑은 품습니다. 미움은 뺏지만, 사랑은 줍니다. 미움은 자기만 살려다가 모두를 죽이지만, 사랑은 모두를 살립니다. 미움은 허망한 몸부림으로 끝나지만, 사랑은 영원합니다. 사도 요한은 말합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요일 3:14-15). 요한에 의하면 진실한 사랑은 바로 영생 그 자체입니다. 그러므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 즉 영생을 얻은 사람은 마땅히 사랑으로도 거듭난 사람입니다. 그리고 요한은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자칭 성령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이 하나님 즉 사랑의 하나님에게 속하였나 시험하라고 말합니다(3:24). 이들의 영은 미혹의 영입니다(4:6). 그러므로 우리는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해야 하겠습니다(3:18).

   예수님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자신을 미워한 나머지 죽음에 내어준 자들마저 용서하시는 위대한 원수사랑의 모범을 친히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자신의 사랑을 통하여 자신을 미워한 자들까지도 용서하시는 사랑의 죽음을 죽으셨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놀라운 구원과 화해의 능력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의 복음을 거절하여 자신을 죽음에 내어준 자들까지도 살리시는 위대한 생명사랑의 모범을 친히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통하여 자신을 죽인 자들까지도 살리시는 부활을 가져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생명이 죽음보다 강하다고 확신하는 그리스도인은 마땅히 사랑이 미움보다 강하다는 사실을 믿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아직도 미움의 논리를 조장하고 미움의 세력을 키우는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아니 때로는 사랑의 핑계로 미움을 강조하는 자들도 많이 있습니다. 피부와 인종, 종교와 이념, 성과 문화, 습관과 계급이 다르다는 이유로 오늘날 지구는 온통 분쟁과 전쟁으로 상처투성입니다. 궁극적으로는 사람을 미워하게 종교는, 겉으로는 제 아무리 고상한 종교로 표방하더라고, 결국 사이비 종교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미움보다 강하고 미움은 짧지만 사랑은 영원하다는 사실을 믿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미움의 권세에 단호히 저항해야 합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사랑스러운 꽃들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사랑의 소중함을 찬양합시다. 예쁜 꽃들을 주고받는 사랑의 연인들에게서 사랑의 아름다움을 느끼듯이, 예쁘게 피어나는 생명들, 곱게 늙어가는 생명들 아니 병들고 약해져가는 생명들까지도 사랑합시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든 아니든, 오늘날 우리는 찬란한 생명의 봄에 사랑의 노래를 불러야 하겠습니다. 사랑만이 영원하다고, 사랑만이 이긴다고, 아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요일 4:8). 저는 고린도전서 15장 55-58장을 이렇게 고쳐 부르고 싶습니다. "미움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미움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사랑의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힘쓰는 자들이 되라..."

 

3. 정의는 불의보다 강합니다.

불의는 사람을 미워하고 죽이고 매장합니다. 그러나 정의는 사람을 사랑하고 세우고 살립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와 부활 사이에서 일어난 사건이었습니다. 불의한 자들은 예수님을 미워하고, 죽이고, 매장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죽임을 당한 예수님을 다시 살리심으로써 예수님이 정당했음을 입증하셨습니다. 이로써 불의는 정의를 이기지 못한다는 진리가 드러났습니다. 불의의 세력은 예수님을 죽이고 매장함으로써 그의 정의를 영원히 죽이고 매장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굉장한 착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정의를 외치는 자는 죽일 수 있으나, 정의의 하나님은 죽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정의의 하나님께서 결국엔 당신의 정의를 이 땅에 드러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류는 아직까지도 불의의 달콤한 유혹에 빠져 있습니다. 도처에 불의의 세력들이 기승을 부립니다. 그러나 죽임과 미움의 세력이 생명과 사랑의 세력을 이길 수 없듯이, 불의가 정의를 영원히 잠재울 순 없습니다. 땅 속에 묻힌 정의는 그 땅을 깨고 기어코 진리를 드러내고 마는 법입니다. 이처럼 굳게 봉한 무덤도 예수님의 정의를 완전히 봉할 수 없었습니다. 썩어빠진 쓰레기에도 장미가 피듯이, 불의의 늪에서도 정의의 꽃은 피는 법입니다. 고난의 가시밭에도 백합화는 피어납니다. 그러므로 불의가 횡행할수록 정의도 더욱 더 살아 있다는 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밤이 깊을수록 낮은 가까운 법입니다.

 그러므로  정의의 승리를 믿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럴수록 더욱더 정의를 세우고 불의를 배격해야 하겠습니다. 정의의 부활을 믿는 바울은 말합니다: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고전 15:34). 생명과 사랑이 약동하는 계절은 정의가 꽃피는 계절입니다. 기이하게도 한국의 봄 사월은 정의가 불의를 이긴 달입니다. 즉 이승만 정권의 불의세력이 학생들과 양심적인 시민들의 정의 앞에 굴복한 달입니다. 이 의로운 4,19 혁명은 비록 불의가 잠시 동안은 이기는 것 같지만 결국엔 정의가 승리한다는 영원한 교훈을 한국인의 가슴 속에 심어 주었습니다. 부활의 혁명은 비록 하나님의 정의가 이 세상의 불의 앞에 침묵하는 것 같이 보이지만 언젠가는 그 힘을 드러낸다는 영원한 진리를 온 인류의 가슴 속에 심어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참고 기다리면 때가 이르매 거둘 것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