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부활 이후

 골 3:1-17

2003년 4월 27일, 현풍제일교회

 

 

지난 주 우리는 부활 주일을 지켰습니다. 미움과 불의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기억하였고, 축하하였으며, 그래서 기뻐하였습니다. 그런데 부활 주일이 지난 지 겨우 한 주일 밖에 되지 않았지만, 대개 우리는 다시금 일상적이고 평범한 삶으로 되돌아 온 듯이 평범하게 살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면, 부활이 까마득한 과거의 일인 듯이, 아니 부활이 전혀 일어나지 않은 듯이, 태연자약하게 살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중요한 이유는 이렇습니다. 부활은 2천년 전에 끝난 사건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2천년 전에 일어난 부활을 오늘 다시 기억하고, 기념합니다. 그리고 부활의 의미를 되새기고, 실천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부활은 어디까지나 과거의 사건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내년에 다시 부활 주일이 돌아올 그 때까지 우리는 부활을 다시금 기억하거나 기념하지 않으며, 부활의 의미를 되새기고 실천하려고 노력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과거에 예수님에게 일어난 단 한번의 사건이 아니라 미래에 모든 사람들에게 일어날 사건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도 마찬가집니다. 비록 그는 미래의 부활을 간절히 소망하기는 하지만, 부활은 까마득히 먼 훗날에 일어날 사건이기 때문에, 아니 도대체 언제 일어날 지도 모를 막연한 사건이기 때문에 부활은 오늘의 생활에 여전히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과거의 부활을 믿는 사람이든, 미래의 부활을 믿는 사람이든, 부활 주일이 끝나자마자 부활이 그에게 아무런 의미를 주지 못하는 것은 부활이 결국 오늘의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기껏해야 올해의 부활 주일을 좀 싱겁게 보냈으니, 내년의 부활 주일은 좀 더 멋있게 보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막연한 기대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교인들에게 부활 주일은 과거를 기억하고 곧장 잊어버리는 기념 주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금 부활 이전의 삶으로 되돌아갑니다

하지만 오늘의 본문에서 바울은 전혀 다르게 생각합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너희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다"(3:1)고 말합니다. 그리고 "너희는 새 사람을 입었다"(3:10)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이미 부활했다는 것이며, 그래서 우리는 이미 새 사람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고 말하였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그리스도인에게 부활은 과거에 한번으로 끝나버린 싱거운 사건이 아니라 지금도 진행되는 사건이요, 매일 일어나는 사건이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미 부활의 사람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지금 이미 부활의 능력 안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부활의 능력을 누리고 있다는 말입니다. 부활은 오늘 우리의 심령과 삶 속에서 재현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은 우리가 실천해야 할 무거운 짐이 아니며, 우리가 동경해야 할 막연한 미래의 꿈이 아닙니다. 부활은 지금 체험될 수 있는 하나님의 생생한 능력이요, 현실을 움직이는 힘입니다.

 감리교 선교사 스탠리 존스가 아프리카 정글에 가서 선교를 하였습니다. 어느 골짜기에 큰 부족이 살고 있었는데, 그곳에는 망나니가 한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 망나니는 보통 망나니가 아니었습니다. 말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이나 거칠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으며, 사람을 때리고 죽이는 일은 아무렇지 않게 여겼습니다. 그렇게 못되게 굴던 망나니가 스탠리 존스에게 전도를 받아서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 망나니가 예수님을 믿고 난 다음에는 그의 말이 달라지고 행동이 달라지고 생활이 달라졌습니다. 그리고 선한 일에도 앞장을 섰습니다. 완전히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망나니에게 스탠리 존스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고 합니다. 무슨 별명을 붙여 주었겠습니까? '뒤에' 혹은 '후에'라는 뜻을 지닌 애프터(After)라는 별명을 지어주었다고 합니다. 그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은 후에 변화되었다는 뜻입니다.

우리 나라에서 애프터(After)라는 말은 주로 2차 행사를 뜻하는 말로 쓰입니다. 식사를 한 후에 차를 마신다거나, 술을 마신 후에 또 다른 술집에 간다는 뜻으로 쓰입니다. 하지만 애프터(After)라는 말은 이제부터 그리스도인을 부르는 별명이 되어야 할 줄로 압니다. 즉 우리는 지금 "부활 이후"를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이미 죽음을 이긴 사람이요, 절망을 이긴 사람이요, 불의를 이긴 사람입니다. 우리는 이미 영생을 얻은 사람입니다.

독립운동가와 정치가, 외교관과 교육가로, 그리고 교회 봉사자로 다양한 일생을 보내신 월남 이상재(李商在,1850-1927) 장로님에게 하루는 일본 신문 기자가 질문하였습니다 "간디는 평소에 100세를 산다고 하였고, 누구는 몇 세를 산다고 하였는데, 선생님은 몇 년이나 사실 작정이십니까?" 이상재 장로님은 그 기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시다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사람이 한번 났으면 영원히 살지, 죽기는 왜 죽어!" 이 말은 한번 태어난 사람은 다시는 죽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태어난 사람은 영원히 산다는 말이요, 그리스도의 부활을 맛본 사람은 다시는 죽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월남 이상재 장로님은 바로 이와 같은 '부활의 신앙'을 지녔기 때문에 일제의 모진 탄압에도 불구하고 민족을 위해 크게 봉사한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하였다는 것이 도무지 실감나지 않을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고, 손에 잡히지도 않으니, 믿어질 리도 없을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부활의 생명이 아직은 사람들의 눈에 드러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있음이니라"(3:4).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3:1). 하지만 영이신 예수님은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십니다"(3:11). 하지만 우리는 그리스도를 아직 볼 수 없습니다. 마치 어머니의 뱃속에 아기가 잉태되었지만, 그 아기는 태어나기 전까지는 감추어져 있는 것과 같습니다. 심지어 어떤 아기는 태어날 때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언젠가 기한이 차면, 즉 해산할 때가 오면, 아기는 어김없이 "응애, 응애" 하고 울며 태어납니다. 그렇게 되면, 가족과 이웃이 모두 이를 알고 기뻐해 줍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3:4) 아직 만천하에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이미 영원한 부활의 생명으로 태어났습니다. 이미 부활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때가 되가 되면, 우리는 홀연히 영화로운 몸으로 만천하에 드러날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활 이후에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합니까?

바울은 먼저 부활 이후에 살아가는 우리가 반드시 버리고 죽여야 할 일을 말합니다. 이것을 그는 한 마디로 땅의 것이라고 요약합니다.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3:2).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3:5). 이 말은 "땅의 일은 전혀 하지 말고, 하늘만을 생각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만약 그렇게 해석하면, 바울은 현실 도피를 부추기는 사람이 됩니다. 현실이 아무리 괴롭고 힘들어도, 바울은 결코 현실을 도피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땅과 육신 그 자체를 연약하고 허무한 것으로는 생각했을지언정, 이를 악하다고 말하진 않았습니다. 바울이 "생각하지 말고 죽여야 한다"고 생각한 것은 땅과 육신 그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악한 삶을 말합니다. 그것은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입니다(3:5). 분노와 악의와 훼방과 부끄러운 말, 거짓말입니다(3:8-9).

그 다음에 바울은 부활 이후에 살아가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말합니다. 이것은 그는 한 마디로 '위엣 것'이라고 요약합니다(3:2). 그것은 곧 긍휼과 자비, 겸손과 온유, 오래 참음과 용서, 사랑과 평강, 가르침과 권면, 감사와 찬양입니다(3:12-17). '사랑의 찬가'에서 모든 은사들보다 더 뛰어난 '가장 좋은 것'을 사랑이라고 말한 바울은 여기서도 사랑을 가장 강조합니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3:14). 그리고 본문에서 바울은 세 차례 '감사하라'고 말합니다.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3:15). "마음에 감사하는 마음을 하나님을 찬양하고,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3:16-17). 요약하면, 부활 이후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가장 큰 특징은 사랑과 감사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에 정말 사랑과 감사가 넘치십니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여러분은 아직도 부활 이전에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여러분은 부활 이후에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사랑과 감사가 어디 마음대로 되던가요? 항상 사랑하고 감사할 수 있는 비결은 무엇입니까? 바울은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라"고 말합니다(3:17).

예수님의 힘을 입는 비결은 늘 예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매일 나를 비우고, 나를 예수님으로 가득 채우는 것입니다. 매일 내가 죽고, 내 안에서 예수님이 살도록 하는 것입니다. 나의 삶을 통해 예수님에게 영광을 돌리고, 늘 예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나를 전폭적으로 맡기는 것입니다.

미국의 제16대 대통령, 링컨(Abraham Lincoln: 1809∼1865)이 젊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변호사 시절에 주의회 의원에 출마했다가 낙방하고, 하원의원에 출마했다가 낙방했습니다. 이러기를 몇 차례 거듭하자, 그는 철저하게 좌절과 절망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주변 친구들은 그를 염려했습니다. "저러다 링컨이 자살하는 건 아니야?" 친구들은 링컨이 목숨이라도 끊을까봐, 자기들이라도 관심을 가지고 보살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링컨은 친구들의 염려대로 "나는 지금 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인생을 살고 있다. 어떠한 개선이나 향상을 기대할 수 없다. 나는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 있다."라고 자신의 심정을 토로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실의에 빠졌던 링컨이 어떻게 재기하여 미국의 대통령까지 될 수 있었겠습니까? 그는 말했습니다. "나는 성경을 읽고, 그 속에서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이 그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다시 공화당에 입당하였고, 대통령 후보 지명을 받아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오늘 주보에 실은 오스왈드 샌더스의 '모래 위의 발자국'이라는 글을 함께 읽어보십시다. 어느 날 밤 꿈을 꾸었네. 주와 함께 바닷가를 거니는 꿈을 꾸었네. 하늘을 가로질러 빛이 내려 비취는 그 바닷가 모래 위에 두 쌍의 발자국을 보았네. 한 쌍은 내 것이고, 또 한 쌍은 주님의 것이라네. 거기서 내 인생의 장면들을 보았네. 마지막 내 발자국이 멈춘 그곳에서 내 인생의 길을 돌이켜 보았을 때, 내 인생 길에는 자주 오직 한 쌍의 발자국만이 보였네. 그 때는 내 인생이 가장 비참하고 슬펐던 계절이었네. 나는 의아해서 주님께 물었네. "주님, 제가 당신을 따르기로 했을 때, 당신은 저와 항상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보십시오! 제가 주님을 가장 필요로 했던 그 때 거기에는 한 쌍의 발자국 밖에 없었습니다. 주님은 저를 떠나 계셨습니까?" 주님께서 대답하셨다네. "나의 귀하고 소중한 아이여, 나는 너를 사랑하였고, 너를 조금도 떠나지 않았단다. 너의 시련과 고통의 때에 네가 본 오직 한 쌍의 발자국, 그것은 나의 발자국이었느니라. 그 때 내가 너를 등에 업고 걸었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