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참 자유를 얻는 길

- 해방기념주일 -

요 8:31-36

2003년 8월 10일, 현풍제일교회

 

 

미국 오클라호마 대학의 한 연구팀이 열 다섯 살이 된 침팬지에게 말을 가르치면서, 스스로 생각하여 표현할 수 있도록 유도해 보았습니다. 온갖 방법으로 침팬지의 관심을 끌면서 말을 가르쳤더니 침팬지가 처음으로 표현한 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나를 놓아달라, 자유를 달라!"는 말이었다고 합니다. 아무리 잘 먹이고 아무리 좋은 여건을 준다 해도, 침팬지는 우리 안에 갇혀서 살기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동물도 자유를 가장 귀하게 여기거늘, 하물며 만물의 영장이요, 하나님의 모습대로 창조된 사람은 자유를 얼마나 귀하게 여기겠습니까?

중국의 고전 예기(禮記)라는 책을 보면, 공자가 태산 옆을 지나갈 때에 한 여인이 무덤에서 통곡을 하고 있었습니다. 공자가 그 이유를 묻자 여인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이 산골에서 살고 있는 사람인데, 처음에는 시아버님이 호랑이에게 물려 죽었습니다. 다음으로는 내 남편이 그랬고, 오늘은 내 아들이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어찌 통곡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 말을 들은 공자가 "그렇다면 왜 진작 다른 곳으로 이사가지 않았는가?" 라고 묻자, 그 여인이 뭐라고 대답했는지 아십니까?  "비록 호랑이 때문에 무서운 곳이지만, 가혹한 정치가 없는 곳이기 때문에 여기에 주저앉고 살아갑니다"라고 하였답니다. 그 말에 공자는 "가혹한 정치가 호랑이보다 무섭다"라고 말하였답니다.

만약 사람에게 자유가 없다면, 그것은 죽은 상태와 다름이 없습니다. 일제 치하 36년 동안 우리 백성이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살았다고 할지라도, 그런 삶은 죽은 삶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유를 위해 싸워온 사람들은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외쳤습니다. 오늘 우리는 일제의 지배 아래서 자유를 빼앗기고 살아가던 우리 민족에게 해방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를 드리고, 독립을 위해 몸을 바친 조상들의 고귀한 희생을 기리며, 자유의 소중함을 되새기기 위해 해방기념주일을 지키고 있습니다.

복음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해방의 기쁜 소식입니다. 구원이라는 말도 노예상태로부터 해방되는 삶, 즉 자유로운 삶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억압과 지배가 있는 곳마다 자유와 해방의 종소리를 크게 울렸으며, 독립과 민주와 평화에 크게 이바지하였습니다. 우리가 신앙하는 하나님은 바로 자유로운 분이십니다. 사람은 하나님에 의해 자유로운 존재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억압과 부자유가 있는 곳에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람은 언제나 자유를 외쳤습니다. 예레미야 34장 17절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자유를 선언하노라!" 오늘의 본문에서도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령 안에서 주시는 자유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합니까?

 

1) 먼저 하나님이 주시는 자유는 온갖 속박 상태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자유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먼저 죄와 그 결과인 죄책감, 두려움, 죽음으로부터 벗어나는 자유가 있습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22-23). 예수님 안에서 있는 사람에게는 더 이상 정죄(定罪)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은 염려로부터 자유합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은 모든 염려를 하나님에게 맡깁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마 6:31-32). 베드로 사도는 말합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벧전 5:7).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또한 질병으로부터 벗어나는 삶도 얻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수많은 병자들을 고치셨습니다. 귀신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고쳐주셨으며,  온갖 질병 때문에 부자유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건강하고 자유로운 삶은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의약적인 치료와 자연 요법에 의한 치료와 함께 하나님의 치료를 믿습니다. 그러므로 성결교회가 믿는 사중복음 가운데는 신유(神癒)가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치료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우리는 질병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채찍을 받아 상처를 당하심으로써, 우리가 나음을 입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자유는 단지 개인적인 자유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또한 정치적 압박, 경제적 빈곤, 사회적 차별로부터도 우리를 해방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의 압제 아래 신음하시는 광경을 보시고, 이를 불쌍히 여기셔서 모세를 보내셔서 온갖 기적으로써 그들을 해방하셨습니다. 출애굽 사건은 정치적, 사회적인 해방의 가장 중요한 근거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일제 시대의 기독교인들도 출애굽 사건을 통해 위로와 소망을 얻었으며, 온갖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처럼 우리 민족도 구원해 주실 것을 굳건히 믿고, 기도하고, 행동했습니다. 누가복음 4장18-19절에서 예수님도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서 포로가 된 자, 눌린 자는 - 순복음교회(조용기 목사)가 주장하는 것처럼 - 단지 귀신에게 눌린 자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선포하신 해방의 소식은 비단 영혼의 구원과 질병의 치유만이 아니라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억압과 고통 아래 신음하던 모든 사람들, 심지어 동물에게까지 미치는 해방의 소식, 즉 희년(禧年)의 소식이었습니다.  

 

2) 다음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자유는 단지 속박 상태로부터 벗어나는 것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현대인은 옛날 사람들에 비하여 엄청난 자유를 얻었지만, 옛날 사람들만큼 행복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무엇으로부터 자유를 얻기는 했지만, 이제는 자유가 그 무엇을 위한 자유인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유, 자유" 하고 외치면서, 자유를 얻으면 마치 모든 것을 얻을 것처럼 생각하였으나, 막상 자유를 얻고 나니 "자유가 무엇에 쓰이는 물건인지?"를 전혀 모르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맺어오던 모든 연대감, 소속감을 마치 자신을 구속하는 악한 쇠사슬인 양 모두 끊고 나니, 현대인은 자유의 현기증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공허함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삶의 목표를 잃어버렸습니다. 자유가 최고의 목표일 수 없습니다. 자유는 그 무엇으로 채워야 할 빈 공간일 따름이지, 그 자체가 목표가 될 수는 없습니다. 컵 안에 가득 찬 차 물을 마시거나 버린다면, 컵 안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까? 아닙니다. 물 대신에 어느 사이에 공기가 꽉 들어찼습니다. 이처럼 마음도, 사회도 그 무엇을 비웠다고, 그 무엇으로부터 벗어났다고 다 끝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 나쁜 것, 더 악한 귀신이 들어올 수 있습니다.

어떤 탐험가가 외국 여행 중에 새 몇 마리를 선물로 받아서, 배를 타고 집으로 오는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새들을 새장에 가두어 놓았는데, 이 새들이 이 새장이 얼마나 답답한지 자꾸만 나가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머리를 문에 박기도 하고, 몸부림을 치고, 열광을 하는 겁니다. 날개 짓을 하는 것입니다. 이 탐험가가 이것을 보다가 너무나 애처로워서 놓아주었습니다. 그랬더니 하늘을 향해서 날아가고 있습니다. "너희들은 참 자유롭겠다. 얼마나 답답했냐!" 하고는 그 새를 잊어버렸습니다. 그런데 몇 시간 후에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 새들이 다시 돌아온 것입니다. 얼마나 이 새들이 지쳤는지, 사방을 다니다 온 것 같습니다. 힘이 지쳐 가지고 몸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쓰러져서 이 새들이 있는 것입니다. 가만히 보니까, 이 새들이 자유를 얻기는 얻었는데, 그리고 어디론가 가기는 갔는데, 앉을 데가 없었습니다. 자유를 누릴 만한 데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배로 돌아왔고, 이 탐험가는 새들을 다시 새장 안에 가둘 수밖에 없었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20세기의 독일의 유명한 심리학자 에릭 프롬(E. Fromm)은 자유를 쟁취한 현대인이 이제는 도리어 자유로부터 도피하려는 심리를 탁월하게 분석하였습니다. 자유에 현기증을 느끼고 자유가 부담스러워진 현대인은 나치즘과 같은 권위주의로 도피하거나,  테러와 폭력과 같은 파괴적인 삶으로 치닫거나, 세상의 유행에 순응하는 자동인형이 된다는 것입니다. 바울도 일찍이 이런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 자유는 목숨보다 소중합니다. 하지만 자유 의지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소중한 자유를 방종과 방탕에 악용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그러므로 자유는 이제 '그 무엇으로부터의 자유'에서 그쳐서는 안 되고, '그 무엇을 위한 자유'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자유는 무엇을 위해 쓰이는 물건입니까?

 자유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이라면, 결국 자유는 하나님을 위해 쓰이는 자유,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는 자유가 되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만큼 자유로운 사람은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만큼 죄책감과 두려움, 죽음과 염려, 질병으로부터 해방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만큼 남을 존중하고 사랑하고 아껴주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은 왕과 같이 존귀하고 자유로운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만큼 큰 종도 없습니다.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고전 9:19). 위대한 신학자요 성자였던 어거스틴(St. Augustine)도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복종이 최고의 자유이다." 스위스 신학자 에밀 부르너(E. Brunner)도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께 얽매일 때 비로소 자유롭다."

아브라함 링컨이 대통령이 되기 전에 한번은 노예시장 옆을 지나가는데, 노예 상인들이 노예를 경매에 붙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링컨의 눈에 한 소녀의 모습이 눈에 띄었습니다. 링컨은 제일 높은 가격으로 그 흑인을 사서, "너에게 자유를 준다. 네 마음대로 가서 살아라" 하며 말하자, 그 소녀가 눈물을 글썽이며, "정말, 이제 자유입니까?" 말하면서, "아저씨, 저는 이제 자유롭지만, 특별히 갈 곳이 없습니다. 저는 아저씨를 따라가겠어요. 아저씨를 섬기며 살겠습니다."고 했답니다.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진정한 자유는 바로 이런 것입니다. 내게 자유를 주신 분, 나를 죄와 두려움과 사망에서 해방하신 분! 그분이 너무 고마워서, 그분을 너무 사랑하기에 이제 우리는 스스로 그분에게 매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자유가 진리로부터 주어지는 것임과 동시에 자유가 진리를 위함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자유케 한 그 진리 안에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진정한 자유를 느낍니다.

엊그제 대구에서 또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열차가 추돌하여 많은 사상자들이 생겨났습니다. 왜 대구에서 연달아 사고가 일어나는 지는 잘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열차가 운행의 법칙, 즉 진리를 어겼다는 사실입니다. 하나의 기찻길에 두 열차가 동시에 달릴 수는 없습니다. 이런 단순한 진리를 어김으로써, 자유롭게 달리던 기차는 흉기로 변했습니다. 열차가 무슨 잘못이 있겠습니까? 지난 번 대구 지하철 대형 참사 때처럼 이번에도 승무원이 자신의 임무에 충실하지 않았습니다. 열차를 통제할 수 있는 자유를 자기 마음대로 열차를 움직일 수 있는 자유로 오해했던 승무원 때문에 또 다시 불행이 닥쳐왔습니다. 진리에 순종하지 않는 자유는 방종과 무책임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요, 그래서 그리스도에게 매인 사람이요,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전혀 부자유스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뜻이 곧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처럼 하나님에게 죽기까지 복종합니다. 여기에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아무 사람에게도 매이지 않지만, 그리스도에게 매임으로써 모든 사람의 종이 되는 자유를 누립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참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자유의 투사와 자유의 증인으로 살아가십시다. 다시는 어리석은 종이 되는 일이 없도록 늘 깨어 기도합시다. 우리에게 참 자유를 주시는 하나님에게 감사와 영광을 드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