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하나님께 감사하라

추수감사주일

시 100:1-5

2003년 11월 16일, 현풍제일교회

 

가을걷이가 다 끝나고 어느 덧 찬바람이 옷깃을 스치는 계절입니다. 지겹던 비구름으로 검게 가려졌던 하늘도 어느새 청명한 하늘로 변했고, 무섭게 내리치던 폭우도 벌써 아스라한 추억거리가 된 듯합니다. 오랜 비 때문에 농사는 흉작이고 과일의 단맛도 좀 떨어졌지만, 올해의 나뭇잎들은 예사롭지가 않습니다. 혹독한 시련을 잘 견딘 탓인지, 아니면 시련을 잘 이겼다고 하늘이 내린 선물인지, 나뭇잎의 색깔이 참으로 곱고 다채롭습니다. 그리고 그 화려한 자태를 뽐내기가 무섭게 겸허하게 낙엽을 떨어뜨리는 나무들을 보면서, "나도 저렇게 곱게 늙고, 아무 미련도 없이 떨어져야지!" 하는 궁상맞은 생각을 해 봅니다.

올해도 이런 저런 이유로 심한 고난을 당하거나 우리 곁을 떠난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저도 올해 대구 지하철을 자주 이용했습니다. 그런데 왜 어떤 사람들은 갔고, 왜 나는 아직도 살아있는 겁니까? 곰곰이 생각하면, 그들은 우리가 당할 수도 있는 고난을, 어쩌면 우리 대신에 당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삶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그들의 희생 위에 살아가는 삶으로 생각하고 감사해야 할 것이며, 그들의 고난을 헛되지 않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 덕분에 덤으로 살아가는 우리도 언젠가는 남을 위해 떨어져야 할 때가 있음을 분명히 알고, 하루하루를 겸허하고 알차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만물이 소생하는 봄에 부활주일을 맞이하는 것이 뜻이 매우 깊듯이, 만물이 무르익는 가을에 감사주일을 맞이하는 것도 참으로 뜻이 깊습니다. 인고와 희생 끝에 맺히는 풍성한 열매를 보니, 모든 것들이 참으로 은혜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참으로 세상에 은혜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은혜는 무슨 은혜, 내가 얼마나 힘써 노력하고 땀흘려 일을 했는데...!"하며 반문하는 분들이 있습니까? 여러분의 그 힘과 노력도 다 누구의 덕택입니까? 남들의 희생과 기도 덕분이 아닙니까? 지나고 보니, 우리를 매우 아프게 했던 고통도 결국은 우리를 성숙케 한 해산의 고통이었습니다. 그러니 유쾌했던 일만이 아니라 기억하기 싫은 일에 대해서도 지금은 참으로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추수 감사절을 처음 지킨 사람들은 영국의 종교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건너간 청교도들입니다. 1620년 12월 26일, 크리스마스 다음 날에 청교도들은 117일 간의 험한 항해 끝에 미국 동부의 플리머스에 상륙했습니다. 항해 중에도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만, 미국 땅에 도착하고 보니 그들 앞에는 황무지만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신대륙의 기후 조건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농사를 지었으므로, 그들의 농사는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양식이 모자라서 많은 사람이 고통을 겪었습니다. 더욱이 전염병까지 돌아 배에서 내린 146명 가운데 거의 절반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 앞에서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하나님 앞에 매달렸지만, 그 다음 해의 농사도 흉작이었습니다. 그래서 또 금식을 선포하고, 하나님 앞에 매달렸습니다. 이렇게 2,3년을 거듭하는 중인데 여전히 상황이 바뀌지 않자, 그들은 다시 모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베옷을 입고 금식하면서, 좀 더 간절하게 기도하자. 우리가 부르짖으면, 하나님이 반드시 응답해 주실 것이다." 그렇게 서로 격려하면서 금식하려고 하는데, 어떤 농부가 일어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제 이야기를 한번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제 생각에는 어려울 때마다 금식기도를 하는 것은 하나님께 불평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이미 많이 해 보지 않았습니까? 이제 하나님 앞에 불평하지 맙시다. 비록 우리가 경제적으로는 어려움을 당하고 있지만, 이곳에 와서 살기 때문에 이전에 누리지 못하던 자유를 누리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이제 금식은 그만 하고, 하나님 앞에 감사를 드리는 축제를 엽시다."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마음으로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금식하려던 그들은 생각을 바꾸어서 축제를 열었습니다. 야윈 모습들이었지만, 그들은 하나님 앞에 눈물로 감사하며, 감격적인 찬송을 드렸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감사는 조건적으로, 상대적으로 드릴 것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무조건, 전천후로 드려야 할 성도의 신성한 의무와 당당한 권리입니다. 감격적인 감사의 예배를 드리기까지 청교도들은 계속 좋은 수확을 기대했습니다. 좋은 수확을 거둘 때, 아니 하나님께서 좋은 수확을 허락하실 때, 바로 그 때에 비로소 감사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계속 감사의 축제를 미루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노력 끝에 하나님이 복을 내려달라고만 기도했습니다. 온갖 역경 속에서도 지금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수 있었을 텐데, 이전에 누리지 못했던 많은 조건들을 생각하며 크게 감사했어야 할 텐데, 그들은 더 좋은 조건들을 기대하며 계속 감사를 미루었습니다. 그럴수록 그들의 조건은 더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감사할 때, 그들이 가진 것으로 진정으로 감사할 때, 하나님은 더 좋은 것으로 채워주셨습니다. 이리하여 그들은 세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감사의 모범을 보여준 위대한 신앙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시편 100편은 아마도 이스라엘 백성이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면서 하나님께 불렀던 감사의 노래였던 것 같습니다. 이 시편도 경건한 한 개인의 독창적인 노래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 다 함께 불렀던 노래인 것 같습니다. 이 시편이 쓰여지고 불렸던 연대와 환경을 정확히 알기는 어렵습니다. 단지 이 시편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정착한 후에 부르기 시작한 노래임은 분명합니다.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이 부를지어다.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 앞에 나아갈지어다." 여기서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은 먼저 하나님에 대한 감격적인 감사와 찬송으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갑니다. 더욱이 여기서는 이스라엘 백성만이 아니라 온 땅도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초대합니다. 그러므로 이 시편은 장엄한 우주적인 찬양으로 들려오고 있습니다. 이 시편은 하나님을 즐거이 찾고 노래하는 이유를 구태여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생각하면, 감사가 입술에 저절로 흘러나오는 사람들의 노래로 들립니다. 하나님이 주신 그 무엇 때문이 아니라, 좋은 결과와 승리 때문이 아니라, 그저 오직 하나님 한 분 때문에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감사하는 사람들의 노래로 들려옵니다. 오늘 우리도 이런 노래를 부르고 싶습니다.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데 그 무슨 까다로운 조건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하고 부르면, 그저 "감사"하는 노래가 저절로 나올 따름입니다. 만약 감사의 조건이 있다면, 단 하나일 뿐입니다.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이로써도 우리는 무한한 감사를 올릴 수 있습니다. 만물이 자기 힘으로, 자기 수고로, 아니 저절로 생겨날 순 없습니다. 만물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지금 우리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참으로 감사하지 않습니까? 왜 우리는 존재합니까? 왜 우리는 아직 죽지 않고 살아 있습니까?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참으로 신비하고 감사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보다 더 놀랍고 감격적인 감사의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분의 것, 그분의 백성, 그분의 양으로 삼아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요한 웨슬리는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이다"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 아니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분의 소유, 그분의 백성, 아니 그분이 친히 기르시는 양으로 삼아주셨다는 사실보다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 이보다 더 감격적인 소식은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성공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없는 사람은 실패한 사람이요,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히 사는 사람처럼 보여도,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 아니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 사랑하시는 사람은 영원히 승리한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성대한 기쁜 잔치는 모름지기 남녀가 한 몸이 되는 결혼식입니다. 잠깐 살다가 죽으면 헤어질, 아니 요즘 세태로는 언제 헤어질지도 모를 결혼식을 놓고도 사람들이 떠들썩하게 기뻐하고 즐거워하거늘, 하물며 하나님께서 우리와 영원히 변치 않고 영원히 헤어지지 않을 가약을 맺으셨다는 사실은 얼마나 기쁘고 즐거운 일입니까? 백년가약을 맺은 부부도 서로 등을 돌릴 수 있고, 부모도 자신이 낳은 자식을 버릴 수 있지만, 하나님은 결코 당신의 백성을 버리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선하시고, 그분의 인자하심은 영원하며, 그분의 신실하심은 대대에 미치기 때문입니다. "대저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 성실하심이 대대에 미치리로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진노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시련도 허락하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진노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시련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랑입니다. 진노는 잠깐이요, 사랑은 영원합니다. 우리가 지금 이 세상에서 당하는 시련은 장차 우리가 누릴 하나님의 영광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더욱이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하나님의 진노와 시련조차도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지선아, 사랑해"라는 책으로 유명해진 한 자매가 있습니다. 그는 심한 화상으로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졌습니다. 다른 사람 같으면, 두문불출하고 비관할 수 있었을 텐데, 그 자매는 신앙으로 시련을 이겼습니다. 아니 그 자매는 자신에게 임한 시련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여기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 그 자매는 자신의 흉터를 보고 '하나님의 사랑의 자국'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자매의 신앙의 깊이 앞에서 저는 참으로 부끄러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저는 아직 그 정도까지 감사할 줄 모릅니다. 아마도 그 자매가 고통 속에서도 감사할 줄 안 것, 아니 고통조차 하나님의 선물로 받을 줄 알았던 것은 바로 하나님이 선하시고 신실하신 분임을 확실히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 흉한 흉터를 어찌 하나님의 사랑의 자국이라고 만인 앞에서 자랑처럼 고백할 수 있었겠습니까?    

인천에 방직공장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한 어머니가 남편을 여의고 아기 하나를 키웁니다. 그 아이를 숙직실에 맡겨놓고 공장에 들어가 일하다가 나와서 젖을 먹이고 또 들어가서 일하고 했습니다. 어느 날 숙직실에 불이 났습니다. 사람이 그 안에 있는데, 모두가 들어가지 못한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자기 아기가 거기에 있으니, 소방대원들이 말려도 막무가내로 불 속에 뛰어 들어가 아기를 안고 뛰어 나왔습니다. 아기는 살았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머리칼에서부터 온 얼굴이 홀랑 다 타 버렸습니다. 그래서 얼굴이 흉하게 일그러지게 되었습니다. 아이가 자라났습니다. 어렸을 때는 제 엄마가 제일 예쁜 줄 알았는데, 조금 커서 보니 내 엄마가 다른 엄마하고 모습이 좀 색다르거든요. "우리 엄마는 왜 얼굴이 저 모양인가?" 하고 회의하기 시작합니다. 또 아이들이란 서로 싸우다 보면, 남의 약점을 들추기 마련입니다. 이 아이가 "너희 엄마는 곰보다" 하는 소리를 듣습니다. 이래서 이 아이가 속이 상한 나머지 집에 돌아와서는 "왜 엄마는 곰보야?" "왜 다른 엄마들처럼 예쁘지 못한 거야?" 하면서 우는 것입니다. 철없는 아이니 어떻게 하겠습니까? 어머니는 내버려두었습니다. 그냥 달래고 넘어갔는데, 아이가 좀 더 큰 다음에도 또 그런 불평을 합니다. 그제야 어머니는 얼굴이 일그러진 사연을 털어놓았습니다. "사실은 이렇게 되어 내가 곰보가 됐다. 만약 내가 곰보가 안 됐으면 너는 죽었다. 이래도 어머니 얼굴이 보기 싫으냐?" 이 아이는 아직도 철부지였지만,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후로 어머니에 대한 아이의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다른 아이들이 "너희 엄마는 곰보다" 하면 "시끄럽다! 우리 어머니가 최고다" 라고 했답니다. 그리고 어머니의 얼굴을 쳐다볼 때마다 아이는 "우리 어머니가 최고다!" 라고 말하면서, 감사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도 그저 말로만의 사랑, 감상적인 사랑, 로맨틱하고 즐겁기만 한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당신의 백성 죄 때문에 괴로워하시는 사랑입니다. 당신이 백성을 때리시고 달래시다가, 마음이 너무나 악하고 부패하여 도저히 돌이킬 줄을 모르자, 스스로 고난 속으로 뛰어드신 사랑입니다. 우리 대신에 고통과 죽음의 고난마저도 스스로 감당하신 사랑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 후에도 옆구리와 손자국에 흉터를 지니고 계셨습니다. 이처럼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도 우리 때문에 일그러진 흉터를 지니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위해 고난까지 마다하신 하나님을 멸시하시겠습니까? 우리의 기도가 속히 응답되지 않는다고 하여, 하나님을 귀머거리라고 욕하시겠습니까? 만약 하나님께서 귀머거리가 되셨다면, 아마도 우리의 시끄러운 기도 소리를 일일이 다 들으시려고 하다가 하나님의 귀가 먹게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우리가 곤경에 처할 때, 금방 도와주시지 않는다고 하여, 하나님을 무능한 분이라고 욕하시겠습니까? 만약 하나님이 당신의 손을 펴지 못하신다면, 아마도 우리를 도우시려다가 손이 짤려 나갔을 지도 모릅니다. 설마 그럴 리야 없겠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충분히 그러고도 남습니다. 설령 그렇다고 해도,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인자하시며, 그래서 선택하신 백성을 영원히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잘 될 때만이 아니라 실패할 때도, 아니 고난 속에서도, 아니 죽어갈 때도 하나님께 진정으로 감사의 노래를 부릅시다. 절대적인 감사, 전천후 감사, 영원한 감사의 노래를 부릅시다. 온 몸과 마음을 다하여, 모두 다 함께, 하늘과 땅과 함께, 우리를 지으시고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는 신실하신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합시다.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이 부를지어다.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 앞에 나아갈지어다.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자시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대저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 성실하심이 대대에 미치리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