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주님이 오십니다

- 대강절 첫 주일 -

 마 25:1-13

 2003년 11월 30일, 현풍제일교회

 

대개 설교자들은 설교할 때마다 반드시 새로운 본문을 중심으로 새로운 설교를 해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감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설교자의 편에서는 아마도 성도들에게 항상 새로운 영의 양식을 공급해야 한다는 사명감 때문일 것이며, 성도들의 편에서는 늘 신선한 설교를 듣고 싶다는 욕구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성도들은 아무리 좋은 설교라도 몇 주, 아니 단 한 주만 지나가도 설교 내용은 물론 그 제목조차 기억하기 어렵습니다. 물론 성도들이 설교 내용을 정확히 기억하지는 못해도, 설교 말씀이 무의식 속에 깊이 들어가서 큰 힘을 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말씀을 부지런히 연구하여 늘 신선한 설교를 해야 합니다. 설교자는 바쁨과 게으름 때문에 설교 준비를 철저히 하지 못한 궁지를 간단히 해결하려는 궁여지책으로 같은 설교를 반복하려는 유혹에 빠져서는 결코 안 될 것입니다. 설교자가 이런 유혹에 빠지지만 않는다면, 반복 학습이 교육의 효과를 높이듯이 반복 설교도 설교의 효과를 높인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올해 1월 8일부터 7월 9일까지 약 6개월 동안 수요 예배 때마다 '하나님 나라'의 비유를 본문으로 삼아 설교를 하였습니다. 제 나름대로는 열심히 설교를 준비하였지만, 유감스럽게도 많은 분들이 수요 예배에 참석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저의 설교를 듣지 못했던 분들을 위해 기회가 닿는 대로 이 설교를 종종 반복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아무리 자주 읽어도 지나침이 없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설교는 아무리 자주 들어도 지나침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설교를 들었던 분들에게는 지난 설교 내용을 되새김하고 설교대로 살아가려는 결심을 더 굳게 해 주리라고 생각합니다.  

오늘은 교회력 중에서 주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대강절이 시작되는 첫 주일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저는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기다려야 하는가?"에 대해  주님이 설교하신 내용 중에서 여러분이 잘 아시는 '열 처녀의 비유'를 통해 오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려는 말씀을 듣고자 합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주님은 그 당시의 결혼 풍습을 비유로 들어서 하나님의 나라를 설교하십니다. 신부는 예쁘게 단장하고 집에서 신랑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열 처녀는 약혼한 신부라기보다는 아마도 그를 호위하는 들러리 처녀일 것입니다. 신랑이 오면, 한 바탕 잔치를 벌인 후에 신부는 신랑집으로 가는데, 그 때에 열 명의 들러리 처녀들은 신랑과 신부를 호위하여 춤추면서 그들을 따라갑니다. 오늘의 본문은 바로 이와 같은 결혼식 광경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인간이 힘겹게 성취하고 애써 실현해야 할 그 무엇이 아니라 하나님의 순수한 선물이라는 사실을 또 한번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쟁취의 대상이 아니라 기다림과 수용의 대상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주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룩하자"고 제자들을 선동하셨을 것이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나이든 분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죽음 후에 들어갈 영역으로 생각하는 경향에 기운다고 한다면, 특히 젊은이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서 쟁취하고 확장해야 할 임무로 생각하는 경향에 기웁니다.

하지만 실로 두 가지 생각이 모두 잘못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죽은 후에야 비로소 경험할 수 있는 현실이 아니라 이미 여기서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 가운데 왔습니다. 우리는 대개 "죽은 후에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고 말한다면, 주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살아 있는 우리에게 온다"고 말하셨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서 쟁취해야 할 것으로 보는 생각도 잘못입니다. 비록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 안으로 들어오고 있고, 그래서 이 세상에서 이미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현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가 실현하고 확장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잘못입니다.

"세례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천국을 빼앗느니라"(마 11:12)는 말씀을 근거로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적지 않지만, 이 본문은 그렇게 해석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주님의 인격과 활동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다가오는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율법의 실천이나 무장 투쟁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할 수 있다고 착각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억지로 쟁취하려는 유대인들의 잘못된 태도를 주님은 강력하게 나무라시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침노한다"는 말은 "폭력적으로 빼앗는다"는 뜻을 갖고 있고, 오직 강도나 폭도만이 그렇게 행동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신랑을 기다리는 처녀처럼 우리가 언제나 기다려야 할 대상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은 인간의 예상을 빗나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과거에도 있었고, 지금도 우리에게 오고 있지만, 아직 다 오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역사 속에서 부분적으로 실현되지만, 그 완성은 점진적인 진보를 통해 이루어지지 않고 갑자기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인간의 계산을 뛰어넘습니다. 보통 결혼식은 초저녁에 시작되기 때문에 사실 여분의 기름이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다섯 처녀는 상식과 관행대로 조금의 기름만을 준비하였습니다. 하지만 신랑은 예상을 넘어 예정된 시간에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충분한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다섯 처녀는 기름을 다시 사러 나간 사이에 신랑을 맞이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렇지만 혹시 뜻밖의 상황 때문에 신랑이 늦게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지혜로운 다섯 처녀는 충분한 기름을 준비하였기 때문에 신랑을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별안간 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상식과 관행을 뛰어넘어 갑자기 들이닥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결론은 우리에게 경고합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어라.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날과 어느 때에 올지를 너희는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오늘의 본문은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는 우리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말합니다. 우리는 늘 깨어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오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손으로 만들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해서도 안 되지만, 어리석은 시한부 종말론자가 생각한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가 인간이 계산한 특정한 날과 시간에 온다고 착각해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언제 올지 모릅니다. 아니 그것은 예상 밖에 언제든지, 별안간 올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깨어 있어야 합니다.

이 비유에서 '기름'이 무슨 의미를 갖고 있는지 분명하지는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기름을 성령으로 생각합니다. 기름은 사람에게 능력을 줌으로써 신랑을 맞이할 힘을 갖게 한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성령은 자유로운 영이기 때문에 인간이 임의로 준비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기름을 회개로 생각합니다. 회개하는 사람만이 주님을 영접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성령과는 달리 회개는 분명히 인간이 준비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회개는 믿음을 기초로 합니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기름을 믿음으로 봅니다.

물론 여기서 믿음이란 단지 입술만의 믿음, 형식적이고 가식적인 믿음이 아니라 행함의 열매를 맺는 신실한 믿음을 말합니다. 환경이 어떠하든, 남이야 어떠하든, 끝까지 참고 믿고 행한 사람만이 주님을 영접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늘 믿음의 등불을 켜서 신랑이 오는 길을 훤히 밝혀야 합니다. 물론 등불을 밝힌다고 해서, 신랑이 더 빨리 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만약 등불이 꺼져 있으면, 신랑은 처녀를 알아보지 못하며, 그래서 처녀들은 신랑의 환대를 받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이 우리 생애의 마지막 날, 인류의 마지막 날, 우주의 마지막 날, 주님이 재림하는 날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늘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어느 마을에 비가 너무 오래 동안 내리지 않아 농작물이 다 말라죽고, 목이 바짝 타들어 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이 교회당으로 몰려가, 매일마다 하나님에게 빨리 비를 내려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하늘에는 구름 한 점이 없었고, 당분간 비가 올 가능성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오랜 가뭄 때문에 사람들은 너무나 절망한 나머지 지금 당장 비를 내려달라고 탄식하며 애걸복걸하였습니다. "주님, 당장 비를 내려 주십시오. 아니 당장 비를 내려주실 것을 확실히 믿습니다." 몇 시간 동안 기도한 끝에 바깥은 어둑어둑해지고 있었습니다. 이제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교회당 문을 나서자마자 기적적으로 하늘에서 소낙비가 쏟아지지 시작했습니다. 오랫동안 비가 오지 않아 절망하던 동네 사람들은 이제는 갑작스러운 비 때문에 당황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도 우산을 준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 한 어린이가 우산을 피는 게 아닙니까? 어른들은 그 어린이가 하도 신기하고 기특해서 물었습니다. "얘야, 너는 무슨 생각으로 이 가뭄에 우산을 들고 교회당에 왔니?" 어린이가 어른들에게 무슨 대답을 하였겠습니까? "어른들은 정직하지 않아요. 비를 내려달라고 간절히 기도하고, 비를 내려줄 것을 확실히 믿는다고 말은 하면서도, 비가 올 것을 위해 전혀 준비하지 않았잖아요!"

여기서 어린이는 슬기로운 다섯 처녀와 같지만, 어른들은 어리석은 다섯 처녀와 같습니다. 종말을 믿고 산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이미 여기서, 지금이 종말인 줄로 알고 산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오기를 기다린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이미 여기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다 온 것처럼 그런 자세로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이미 여기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가뭄 속에서도 언제 비가 올지 몰라 우산을 들고 온 어린이처럼 항상 소망을 품고 산다는 뜻입니다. 슬기로운 그리스도인은 항상 깨어서 살아갑니다. 바로 오늘이 종말인 것처럼 믿으면서, 최선을 다해 살아갑니다.

주님은 이천 년 전에 이미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는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첫 성탄절을 다시 기다리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달력을 거꾸로 돌릴 수 없듯이, 마치 주님이 이 땅에 아직 태어나지 않은 것처럼, 주님 탄생 이전의 시대로 되돌아가서 주님의 탄생을 기다릴 순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이천 년 전의 주님의 탄생을 회고하면서 단지 그 뜻을 되새기려고 성탄절을 기다리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은 이미 역사 속으로 들어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승천하셨다고 해서, 우주 어느 저편, 까마득한 곳으로 떠나신 게 아니라 성령 안에서 실로 우리에게 더 가까이 와 계십니다. 그분은 이 천년 전의 탄생 때만이 아니라 바로 지금도 임마누엘의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분을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보듯이 그렇게 보지 못하며, 주님의 나타나심은 완전히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완전한 드러남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에서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시간은 무의미한 시간, 텅 빈 시간이 아닙니다. 이 시간은 약속으로 가득 찬 시간입니다. 아니 이 시간은 약속의 성취가 점점 실현되어 가는 시간입니다. 이 시간은 주님이 우리에게 이전보다 더 가까이 오시는 시간입니다. 주님은 옛적에 이미 오셨고, 지금은 점점 더 가까이 오시며, 언젠가 완전히 오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슬기로운 다섯 처녀처럼, 우산을 준비한 슬기로운 어린이처럼 늘 깨어 주님의 오심을 기다려야 합니다. 소망 중에서 늘 즐거워해야 합니다. 주님이 오실 때에 주님을 영접하는, 아니 주님의 영접을 받는 슬기롭고 복된 성도가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