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인생의 결산

- 송년주일 -

마 25:31-46

 2003년 12월 28, 현풍제일교회

 

 

 오늘은 올해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세월이 얼마나 빨리 가는지요! 시편 기자의 말대로 세월이 날아가는 듯합니다. 거북이처럼 더디 가는 것만 같은 시간도, 지나고 보니 마치 화살과 물처럼 빨리 지나가고 말았습니다. 저로서는 낯선 현풍 땅에 내려와서 처녀목회를 시작한 지 꼭 일년이 되었기 때문에 감회가 남다릅니다. "부임한 날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일년이 흘렀는가!"하고 스스로 놀랍니다. 지난 일을 되돌아보니, 보람있고 흡족한 점도 있었지만 부족하고 아쉬운 점도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저를 도우신 신실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어려운 형편에서도 충성하신 여러분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한해의 끝자락이 되면, 누구나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고 반성하기 나름입니다. 사람이 사람다운 것은 바로 이런 반성의 능력 때문입니다. 오직 사람만이 과거를 되돌아보고 반성하고,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잘 살아왔는지 아닌지?"는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무슨 기준으로 우리의 삶을 평가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자기 혼자만의 독단적인 평가보다 다수의 평가를 존중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대개의 사람들은 특히 훌륭한 철학자나 역사가의 평가에 귀를 기울입니다. 대개 한 사람에 대한 최종적인 평가는 장례식에서 내려지게 마련입니다. "그가 어떤 삶을 살았고, 얼마나 훌륭하게 살았는지?"는 장례식장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조객의 수가 얼마나 많은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정승보다는 정승 집의 강아지가 죽을 때에 조객이 더 많기 때문입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고인을 어떻게 평가하는가?"에 있습니다. 그래서 저도 종종 제가 죽어 관 속에 누어 있는 광경을 미리 상상하면서, "과연 어떤 사람이 나의 죽음을 진정으로 애도해 줄까?, 주위 사람이 나를 어떻게 판단할까?" 궁금해하곤 합니다. 궁상맞고 기분이 나쁜 소리처럼 들리지만, 사람은 자주 자기가 죽은 후에 다른 사람이 자신을 어떻게 평가할지를 곰곰이 생각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죽고 난 다음에 다른 사람이 이러쿵저러쿵해야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살아 있을 때에 잘 살아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잠언의 말처럼 지혜로운 사람은 잔치집보다는 초상집에 가는 것을 더 좋아해야 하며, 종종 남의 무덤 앞에 서 보아야 합니다.

이런 우스개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무덤 앞에 지나가는데, 죽은 사람의 비석에 다음과 같이 우스운 글이 새겨져 있더랍니다. "나도 언젠가 당신처럼 남의 비석 앞에 서 있었소." 그래서 그 사람이 비씩 웃었더니, 그 다음의 글이 이렇게 쓰여 있더랍니다. "나도 당신처럼 그렇게 웃었소." 그 사람이 또 웃고 나서 그 다음의 글을 보니 이렇게 쓰여 있었더랍니다. "당신도 나처럼 언젠가는 죽을 때가 올 것이요." 누가 지어낸 말이겠지만, "학생 누구의 묘", "성도 누구의 묘"보다는 나을 것 같습니다. 죽더라도 뭔가 남에게 유익을 주는 것이 더 멋지지 않습니까? 미국의 유명한 극작가 버나드 쇼는 자기가 죽은 후에 비석에 새길 글자를 이렇게 결정해 놓았다고 합니다. "비실비실 하고 살다가, 이렇게 죽을 줄 알았지." 정말 그가 죽었을 때, 이런 비석이 세워졌는지는 잘 모르지만, 아마 버나드 쇼는 결코 비실비실 하며 인생을 살지 않았을 겁니다. 우리도 한번 비석의 글을 미리 써 보면 어떨까요? 아니면 무덤에 눕기가 어려울 테니까, 유언을 미리 써 보면 어떨까요?

하지만 사람에 대한 진정한 평가는 그가 죽은 후에 바로 내려지지 않고 오랜 시간이 흘러야만 제대로 내려지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그래서 세월이 흐르면, 옛적부터 역적이 충신으로 바뀌고 충신이 역적으로 바뀐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죽은 지 오랜 사람의 명예를 높여주거나 그의 시체를 다시 꺼내어 목을 자르는 경우도 종종 있었습니다. 그래서 충신은 다른 사람의 일시적인 평가보다는 역사의 평가를 두려워했습니다. 우리도 실로 주위 사람보다는 역사의 심판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비록 지금의 생활이 고단하더라도, 역사의 심판을 생각하며 떳떳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살았을 때와 죽었을 때에 많은 칭찬을 받았지만, 세월이 흐른 후에 역사의 가차없는 심판을 받은 사람들을 우리는 결코 "잘 살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한 세대와 한 인생을 사는 사람이 아니라, 긴 역사의 삶을 사는 존재라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설령 내가 죽어 없어진다고 하더라도, 나의 후세대가 나의 삶을 이어 계속 살아갈 것이고, 후세대가 역사 속에서 나의 심판을 대신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결코 여러분의 한 인생만을 생각하면서 함부로 살아가지 마십시오. 지금 여러분의 삶이 조상의 은혜와 죄악을 고스란히 물려받고 있듯이, 여러분의 후세대도 역시 여러분이 살았던 삶의 결과를 그대로 물려받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심판과 역사의 심판보다 더 중요한 심판, 취소할 수 없는 심판, 결정적인 심판, 최후의 심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자기 생각대로만 산 사람보다는 다른 사람의 심판을 생각하고 산 사람은 훌륭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심판보다는 역사의 심판을 생각하고 산 사람은 더 훌륭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역사의 심판보다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하고 산 사람은 가장 훌륭한 사람입니다. 올해의 마지막 주일을 지내면서, "한해 동안 과연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잘 살았는지, 우리가 언젠가 하나님 앞에 설 때에 어떤 심판을 받을지?" 한번 깊이 생각해 보기로 합시다. 우리의 지난 삶을 영원한 심판의 거울에 비추어 봅시다. "마지막 심판이 어떻게 내려지는지?"는 오늘 우리가 함께 읽었던 본문 가운데 한편의 드라마처럼 생생하게 우리 눈앞에 펼쳐집니다. 오늘의 말씀은 정말 우리를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미리 서게 해 주며, 그래서 "지금,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분명히 깨닫게 해 줍니다.

"천국에 가면, 세 번 놀란다"는 말이 있습니다. 꼭 올 것 같은 사람이 보이지 않으므로 한 번 놀라고, 절대로 오지 못할 것 같은 사람이 보이므로 두 번 놀라고, 마지막으로는 나와 같은 죄인도 천국에 들어올 수 있었으므로 놀라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오늘의 본문을 통해서도 우리는 세 번 놀라게 됩니다. 첫째로 주의 이름으로 많은 일은 한 듯한 사람들은 영원한 형벌을 받고, 주의 이름으로 일을 하지 않았던 듯한 사람들이 영원한 복을 받는 어이없는 심판 앞에서 우리는 놀라게 됩니다. 물론 본문은 오른쪽의 양과 왼쪽의 염소가 누구인지를 분명히 말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의도로 미루어 보면, 왼쪽의 염소는 분명히 그 당시에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한다고 생각한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마지막 심판자에 의해 가혹한 형벌을 받았습니다. 그 반면에 하나님의 일에 전혀 종사하지 않았던 사람들, 즉 세리와 창녀와 같은 죄인들은 양으로 분류되어 구원을 받습니다. 이처럼 어이없는 심판이 내려지는 기준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곧 지극히 작은 자에 대한 사랑 여부입니다. 사도 바울도 말했습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고전 13:1-2). 아무리 신령한 사람도, 아무리 지식에 능한 사람도, 만약 진정한 작은 자들을 향한 사랑이 없었다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비록 제가 한해 동안 하나님에 관한 많은 지식을 전달했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하나님의 일을 많이 하였다고 하더라도, 만약 사랑이 없었다면, 저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마지막 심판 날에 저는 염소로 분류될 것입니다. 제가 본 교회에 취임할 때, "여러분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하였지만, 정말 여러분을 얼마나 사랑하였는지 의심스럽습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의 일을 아무리 많이 하였다고 하더라도, 만약 사랑이 없었다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마지막 심판은 오직 사랑으로만 결정됩니다. 왜냐하면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이지만,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고전 12:13). 이 세상의 화려한 업적과 영광은 마지막 심판 날에 다 떠내려가고 맙니다. 하지만 사랑은 끝까지 떠내려가지 않습니다. 오직 사랑만이 영원합니다. 한 해 동안 여러분이 행하거나 행하지 않았던 사랑을 되돌아보시고, 올해가 다 가기 전에, 여러분의 생명이 다하기 전에, 심판의 날이 오기 전에 속히 사랑을 회복하십시오. 사랑을 실천하십시오. 위대한 업적이 아니라 오직 진정한 사랑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다른 사람들에게 많은 칭찬을 받은 듯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큰 벌을 받고, 다른 사람들에게 전혀 칭찬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큰 칭찬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어릴 적부터 "다른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을 일을 하라. 이 땅에서 다른 사람들의 칭찬을 많이 받도록 노력하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우리는 놀라게 됩니다. 세상의 일을 많이 한 사람들도 그렇지만, 하나님의 일을 한 사람들도 이 땅에서 사람으로부터 많은 칭찬을 받습니다. 실지로 예수님 당시의 지도자들은 백성으로부터 많은 칭찬과 존경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오늘의 본문에서 왼쪽의 염소로 분류됩니다. 그들과 달리 이 세상에서 아무런 칭찬도 받지 못한 사람들은 오른쪽의 양으로 분류됩니다. 아마도 염소에 속한 사람들은 세상과 교회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훌륭한 업적을 많이 쌓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마지막 심판에서 하나님의 가혹한 형벌을 받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그들이 이 세상에서 이미 많은 칭찬과 영광을 누렸기 때문입니다. 남이 보란 듯이, 구제하고 기도하고 금식한 사람들은 이미 이 세상에서 자기 상을 받았기 때문입니다(마 6:18). 그들은 더 이상 하나님의 칭찬과 영광을 누릴 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한해 동안 제가 열심히 일했다면, 여러분의 칭찬을 들어야 마땅합니다. 그리고 제가 여러분의 칭찬을 듣게 되면, 용기를 얻어서 더 열심히 일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여러분의 노고를 크게 칭찬한다면, 여러분도 더욱 더 신이 나서 열심히 일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칭찬을 들으면 들을수록 우리는 교만해질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비판에 대해 점점 더 열린 자세를 갖기 어려워질 것입니다. 그래서 초기 성결교회 지도자 중에 한 분이셨던 이건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칭찬과 환영받는 일에 집착하다 보면, 모든 사람 앞에서 죄악을 담대히 공격하지 못하게 된다. 칭찬하고 환영하여 주는 형제의 죄나 과실에 대하여 책망할 권세가 없어지는 것이다. 또는 더 깊이 기도할 영적 갈망도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타락이 이에서부터 생기며, 멸망이 이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환영이 따라오는 지위나 성공은 다 영적 뇌물이다. 영적인 사람으로 하여금 영력을 잃어버리는 기회가 된다. 칭찬과 환영을 받을 때에 교만한 마음이 생기며, 자고하는 마음이 생기며, 게으름이 생기게 된다. 이러한 경우에 그의 영혼의 생명력을 잃게 된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은 다른 사람의 비난에도 크게 낙담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의 칭찬에도 그리 우쭐해지지 않습니다. 더욱이 우리가 받을 하늘의 큰 영광이 기다리고 있는데, 왜 이 땅에서 굳이 큰 영광을 누려야 하겠으며, 하늘의 영광을 이 땅의 영광으로 바꾸려고 하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최근에 돌아가신 한 목사님의 유언은 참으로 우리를 숙연케 합니다. 암으로 4개월의 시한부 삶을 살다가 2000년 10월에 돌아가신 김치영 목사님은 돌아가시기 2개월 전에 장례절차에 대한 다음과 같이 유언하셨답니다. "너희들은 일절 상복을 입지 마라. 그냥 평상복을 입도록 해라. 깨끗한 정장차림이면 된다. 유족의 표시를 위해 꼭 필요하다면 넥타이 정도는 공동으로 준비해도 괜찮겠지. 그러나 검은 색으로는 하지는 마라. 기독교인들은 죽음을 삶 속에서 그냥 자연스럽게 맞이하는 것이야. 인간적으로 슬프겠지만, 터져 나오듯이 울거나 곡하지는 마라. 믿음도 소망도 없이 모든 것이 끝나는 사람처럼 행동해서는 안 된다. 부조는 받지 않도록 해라. 가족들에게는 다소 경제적인 도움을 줄지는 모르겠구나. 나는 목사로서 평생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으며 살았다. 사람들이 번거롭게 장례에 참석하는 것만도 미안한데, 부조까지 받아 부담을 주고 싶지 않구나. 장례 예배 때에 죽은 자를 위한 일체의 조사나 약력 소개를 하지 마라. 매우 단순하고, 은혜 넘치는 예배 외에는 어떠한 것도 추가하지 않도록 해라. 나는 하나님 앞에서 항상 부족하고 부끄러운 삶을 살았어. 철저하게 죄인으로 살다가 간다. 하나님 앞이나 사람들 앞에서 내세울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언제 태어나서, 무슨 공부를 했고, 어떤 직함을 가졌고, 이런 것들을 너절하게 늘어놓아서는 안 된다. 이런 것이 싫어서 묘비에 목사 칭호도 뺐다. 내가 무슨 내세울 것이 있느냐? 내 시신을 앞에 두고 추모사를 읽고 약력을 나열하며 무슨 대단한 일을 한 것처럼 말한다면,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나를 부끄럽게 만드는 것이다." 만약 이 분이 이 땅에서 사는 동안, 그리고 장례식장에서 사람들로부터 큰 칭찬을 받았다면, 하나님의 칭찬을 빼앗는 셈이 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땅에서 사람들이 우리를 알아주든 말든, 아니 사람들이 우리를 비난하면 하나님의 더 큰 칭찬이 따를 줄 알고 감사하면서,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바라보고, 올해가 다 가기 전에 우리에게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합시다.  

 셋째로 마지막 심판자는 큰 일을 기준으로 심판하시지 않고 작은 일로 심판하십니다. 그러므로 어릴 적부터 "오직 큰 일을 많이 한 사람이 위대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큰 꿈을 꾸고, 큰 일을 하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우리는 놀라게 됩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하나님의 큰 형벌을 받은 사람들은 큰 악행을 행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큰 복을 받은 사람들도 큰 선행을 행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비행기를 타고 하늘 높이 올라가면, 높고 크고 낮고 작은 것이 별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는 세상적으로 크고 작은 것은 큰 차이가 없습니다. 모든 것이 작은 것일 따름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기의 작은 눈을 기준으로 삼아서 크게 보이는 일은 크게 칭찬하고, 작게 보이는 일은 작게 칭찬합니다. 위대한 일을 한 사람은 존경하고, 사소한 일을 한 사람은 무시합니다.

하지만 마지막 심판은 "우리가 얼마나 큰 일을 하였는가?"에 따라 이루어지지 않고, "우리가 작은 자들에게 작은 선행이마나 얼마나 진심으로 잘 하였는가?"에 따라 이루어집니다. 너무나 작을 일에 불과한 생수 한 그릇, 밥 한 그릇, 옷 한 벌이 위대한 심판이 이루어지는 놀라운 잣대가 되는 것을 보고 정말 우리는 놀라게 됩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일도 겨자씨와 같이 작은 믿음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작은 빵도 작은 누룩으로 크게 부풀어오릅니다. 작은 소금이 빵을 맛있게 만듭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작은 일에 충성한 자를 귀하게 여기십니다. 왜냐하면 작은 일에 충성한 자만이 큰 일에도 충성하기 때문입니다(눅 16:10). 한해를 되돌아보면서, 우리가 얼마나 큰 일을 하였는가를 생각하지 말고, 작은 일에 얼마나 정성을 다해 충성했는가를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의 일, 교회의 일과 같은 큰 일을 한답시고, 작은 일에는 소홀하지는 않았습니까? 한해가 다 지나가고 보니, 제가 잘 했다고 생각되는 큰 일보다는 제가 잘 하지 못했다고 생각되는 작은 격려, 작은 위로, 작은 사랑이 저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여러분도 올해가 다 가기 전에 작은 일, 작은 사람들을 다시 되돌아보시기를 바랍니다.

다시 결론적으로 말씀을 드립니다. 마지막 심판의 기준은 큰 업적이나 높은 명예가 아니라 작은 이웃을 향한 작은 사랑입니다. 한해를 결산하는 이 시간, 여러분을 사랑의 무게로 달아보십시오. 무거운 사랑은 여러분을 시련과 심판에서 건질 것입니다. 하지만 만약 여러분의 사랑이 가볍다면, 그 어떤 것도 아무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한해가 다 가기 전에, 아니 여러분의 삶이 다 끝나기 전에, 아니 마지막 심판이 오기 전에 아직 다 하지 못한 작은 사랑을 실천하시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