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영광스러운 고난

 눅 9:22-32

  2005년 3월 20일, 현풍제일교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에게 우리 주님의 평화가 가득 넘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지난 주일 설교에서 저는 여러분에게 "잘 사는 비결"을 가르쳐 드렸습니다. 잘 먹고 잘 놀고 성공하는 것이 잘 사는 것이 아니라, 의롭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의롭게 살기 위해서 양심과 도덕과 법도 잘 지켜야 하지만,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믿고 의지해야 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을 믿음으로만 의롭다고 인정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의롭다고 인정을 받은 사람은 당연히 의로운 삶을 살려고 노력하게 됩니다. 오직 의로운 사람만이 잘 사는 사람입니다. 그는 영원히 사는 사람입니다. 그는 이 세상에서 밝은 빛을 발하는 사람입니다. 하늘나라에서 해처럼 밝게 빛나는 사람입니다.

의롭게 사는 것은 좁은 길을 가는 것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넓은 길을 가려고 하고, 넓은 문으로 들어가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넓은 길은 빠르고 편안하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은 빠르고 편안하게 살기 위해 때로는 불의와 타협하기도 하고, 때로는 불의를 서슴없이 행합니다. 하지만 성도는 의롭게 살아야 하기 때문에 때로는 험한 길을 걸어가야 하고, 때로는 고난의 가시밭길도 걸어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삶에는 언제나 고난이 반드시 따라오게 마련입니다. 오늘 우리는 종려주일을 지키는데, 바로 이날부터 예수님의 고난이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영광을 누리시지 않고, 왜 험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셔야 했습니까? 무엇 때문에 예수님은 고난의 길을 가셨고, 고난의 결과로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실현하려고 오셨습니다.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마6:33)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은 의로운 길을 걸으셨기 때문에 처음부터 고난을 예상하셨습니다. 의로운 길에는 항상 핍박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산상설교에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사람은 복이 있다"(마 5:11). 이 말씀은 의로운 사람은 반드시 박해를 받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말해줍니다. 사도 바울도 다음과 같이 말하지 않았습니까?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딤후 3:12). 그러므로 의롭게 살고 경건하게 살려는 사람은 원치 않는 고난을 당할 수 밖에 없습니다. 본문 9장 22절은 예수님이 장차 어떤 고난을 당하실 것인지를 예고하는 말씀입니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리라."

작년에 우리가 "The Passion of the Christ"라는 영화를 통해 생생히 보았듯이, 실로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은 너무나 참혹하고 끔직한 고난이었습니다. 누가 이런 고난을 좋아하겠습니까? 예수님도 이런 고난을 피할 수 있기를 원하셨습니다. 연약한 우리는 고난을 얼마나 싫어합니까? 성도가 아니라 성인이라도 고난을 즐기지는 않을 것입니다. 고통을 즐거워하는 사람을 정신과 의사는 환자로 취급합니다. 자기 몸에 일부러 상처를 내고 일부러 고통을 자초하는 사람은 대개 정신병 환자입니다. 예수님도 고통이 좋아서 고통을 당하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다만 의로운 길을 가신 결과로 따라오는 핍박을 기꺼이 감수하셨습니다.

의롭게 사는 대가로 힘든 고통을 받는다는 것은 참으로 모욕적인 일이요, 그래서 아무나 감수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억울한 고통을 참고 견디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입니다. 그러므로 의롭게 사는 길에는 많은 고통이 따를 것을 뻔히 알면서도, 의로운 길을 꿋꿋이 걸어가고 그로 인한 고난을 잘 감수하는 사람은 참으로 훌륭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런 길을 걸어가셨고, 우리에게도 이런 길을 권하셨습니다. 비록 억울한 박해를 당해도, 비록 의로 인하여 핍박을 받아도, 보복을 하거나 폭력을 가하지 말고 끝까지 잘 견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니 단지 억울한 고난을 잘 견딜 뿐만 아니라, 고난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까지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늘의 상이 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고통은 단지 수동적으로 주어지는 것만은 아닙니다. 괴롭고 힘들어도 어쩔 수 없이 받아야 할 고난이 있는가 하면, 스스로 자초하고 뛰어들어야 할 고난도 있습니다. 본문 9장 23절은 이런 고난을 "십자가"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십자가란 남이 주는 고난이 아니라 스스로 지는 고난을 말합니다. 물론 예수님은 로마인이 강제로 지어주는 십자가를 지셨지만, 이 십자가는 원하지 않았다면 피할 수 있는 십자가였습니다.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는 스스로 지신 십자가입니다. 우리는 괴롭고 힘들 때마다, 습관적으로 "내 십자가, 내 십자가"라고 말하곤 합니다. 하지만 실수와 잘못 때문에 받는 고난은 십자가가 아닙니다. 운명이나 환경에 의해 모든 사람들이 받는 일반적인 고난, 예컨대 수해와 전쟁과 전염병과 같은 것들을 십자가라고 말할 순 없습니다. 수동적으로 받는 고난이든, 능동적으로 받는 고난이든, 오직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의로운 일을 위해 일하다가 받는 고난이 십자가입니다. 오직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기 때문에 받는 박해가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예수님처럼 수동적으로 고난을 받을 뿐 아니라, 능동적으로 고난에 뛰어들기도 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본문이 말하는 진정한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려는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불의하게 사는 세상 사람들 속에서 혼자서 의롭게 살려고 하다가 당한 고난만이 아닙니다. 이렇게 사는 것도 물론 훌륭한 일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고난은 불의한 자가 의로운 자에게 가하는 미움의 매질만이 아니라, 의로운 자가 불의한 자의 불행을 대신 감당하는 사랑의 희생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고난은 한편으로는 거룩한 고난이요, 그래서 영광스러운 고난이기도 합니다. 고난은 고난일 따름이지, 결코 영광이 아닙니다. 하지만 남을 위한 고난, 희생적인 고난은 그 자체로서 이미 영광스럽습니다. 다만 고난 끝에 다가온 승리만이 영광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치욕을 스스로 지는 고난도 이미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본문 9장 26-27절에서 예수님은 고난을 예고하신 다음에 장차 부활하시고 영광 중에 재림하실 것도 예고하십니다.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여기서 "영광"이라는 말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에 세상의 심판자로서 오실 위풍당당한 예수님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다음에 일어난 사건은 이와 좀 다릅니다. 앞의 말씀을 하신 후 팔일 쯤이 되어, 예수님은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시고, 산에 기도하러 올라가셨습니다. 그런데 기도하는 동안 예수님의 모습이 갑자기 놀랍게 변화되었습니다.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났고, 문득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났습니다. 이와 같이 영광스러운 모습은 부활 후에나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엘리야와 모세는 이미 오래 전에 죽었고, 예수님도 부활하시기는커녕 아직 고난도 당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세 사람이 영광 중에 나타났습니까? 이 사건은 무엇을 말합니까? 어떤 학자들은 이 장면이 장차 일어날 미래의 부활의 영광을 미리 나타내 보여준다고 말합니다. 일리가 없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영광 중에 나타난 두 사람은 여기서 영광스러운 부활을 미리 신나게 맛보여주는 게 아니라, 장차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실 거라는 슬픈 소식을 알려줍니다. 이 본문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야 비로소 영광을 받으실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고난을 각오하시고 고난을 준비하시는 예수님이 이미 영광 중에 계신 분임을 장엄하게 보여줍니다.

사도 요한도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고난을 받으시는 것을 "치욕을 당한다"고  말하지 않고, "영광을 받는다"고 말합니다(요 7:39, 12:16, 23). 그리고 예수님이 죽어서 "아래(지하 세계, 음부)로 내려간다"고 말하지 않고, "위로 들려 올려진다"고 말합니다(12:32, 18:32).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비록 승리의 부활이 아직 오지 않아도, 예수님의 고난은 이미 그 자체로서 영광스러운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만약 성도가 이 세상에서 의롭게 살다가 고난을 받는다면, 물론 장차 큰 영광을 누릴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이 세상에서 이미, 세상이 알 수도 없고 줄 수도 없는 큰 영광을 누린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난은 엄연히 괴로운 고난이지, 어떻게 영광이 될 수 있단 말입니까?  

용광로 불에 들어간 쇠를 비유로 들어봅시다. 뜨거운 용광로 불에서 지글지글 녹아 내리는 쇠는 나중에 튼튼한 강철로 단련이 된 후에야 비로소 세상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뜨거운 불 속에 있는 쇠도 이미 그 자체로서 맑고 밝은 광채를 발합니다. 못난 쇳덩어리가 참으로 놀라운 모습으로 변하기 시작합니다. 불처럼 변화된 쇠는 그 자체로서도 이미 아름답습니다. 물론 쇠는 아무리 큰 고통이라도 느끼지 못합니다. 하지만 사람은 아무리 작은 고통이라도 예민하게 느낍니다. 고통은 사람을 비참하게 하고, 병들게 하고, 죽게 만듭니다. 하지만 희생적인 고통은 사람을 아름답게 하고, 강하게 하고, 위대하고 만듭니다. 모진 고난을 당한 욥의 말처럼 불같은 시련에서 단련된 사람은 정금과 같이 아름답고 고귀하게 변합니다(욥 23:10).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세상에서 무고한 오해와 억울한 고통을 당하십니까? 의로운 일을 하다가 도리어 미움을 받으십니까?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려다가 억울한 손해를 당하십니까? 그렇다면 기뻐하시고, 즐거워하십시오. 하늘의 상이 클 것입니다. 이웃을 위해, 교회와 하나님을 위해 희생하시고 고난을 감수하십니까? 그렇다면 더욱 기뻐하시고, 더욱 즐거워하십시오. 하늘에서만이 아니라 이 땅에서 이미 하늘의 영광을 누릴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높이 들어 세우실 것입니다. 천사도 부러워할 높은 영광으로 여러분을 둘러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감당하기 어려운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그 십자가를 원망하거나 벗어버리려고 애쓰지 마십시오. 그 십자가를 기꺼이, 기쁘게 지십시오. 잘못 때문에 받는 고난이 아니라면, 고난 속에서 오히려 당당하십시오. 영광의 십자가를 당당히 지십시오. 고난 속에서도 영광을 누리신 예수님이 여러분의 고난을 가볍게 하실 것입니다. 아니 여러분의 고난을 영광스럽게 만드실 것입니다. 모세와 엘리아처럼 여러분도 영광의 주님 곁에 당당히 설 수 있게 하실 것입니다.

오늘부터 예수님의 고난을 묵상하고 적용하는 고난주간이 시작됩니다. 한 주간 동안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치욕을 당하신 예수님의 거룩한 희생을 깊이 묵상하십시다. 우리를 살리려고 죽으신 예수님의 고귀한 희생에 깊이 감사하십시다. 그리고 예수님의 죽으심의 뜻을 우리 몸과 마음에 깊이 새기십시다. 아니 예수님의 죽으신 몸을 우리도 짊어지십시다. 그리하여 예수의 생명이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합시다(고후 :6-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