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사랑의 종이 되라

 갈 5:13

2005년 5월 29일, 현풍제일교회

 

 

주님 앞에 나와 경건하게 예배를 드리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에게 주님의 평화가 가득 넘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우리 성결교단에서는 오늘을 성결교회주일로 지키도록 권하지만, 가정의 달 5월의 마지막 주일을 위해 저는 오늘도 다시금 가정에 관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오늘은 갈라디아서 5장 13절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시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발견하고자 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 보낸 편지의 한 구절입니다. 5장 1절에서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을 향하여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다."고 말합니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롬 1:16). 그래서 우리는 기독교를 구원의 종교라고 말합니다. 구원이 무엇입니까? 사람들은 흔히 구원을 "죽으면 천국에 가는 것"이라고 말합니다만, 이 말은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지만, 상당히 잘못된 생각이 들어가 있습니다. 복음이 약속하는 구원은 다만 죽은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복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도 우리는 천국을 맛볼 수 있고, 천국의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구원은 이 땅에서 이미 시작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예수님이 편하게 우리를 천국을 데려가시지 않고 무엇 때문에 고생이 많은 이 세상으로 내려오셨겠습니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예수님이 금방 죽을 병자들이나 노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시지 않고, 무엇 때문에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셨겠습니까? 구원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해방 혹은 자유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복음은 이미 여기서, 이 땅에서 우리를 해방합니다.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그래서 5장 1절에서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말합니다.

복음은 우리를 그 무엇으로부터 자유롭게 합니까?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특별히 강조하는 것은 율법으로부터의 자유, 특히 할례로부터의 자유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은 더 이상 율법에 매여 살 필요가 없습니다. 그는 율법으로부터 자유롭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구약성서의 백성들이 행하던 할례로부터도 자유롭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가 아무런 효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거듭났고,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율법의 멍에를 질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우리를 율법으로부터 해방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율법의 마지막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모든 율법을 폐하고 모든 율법을 초월하고, 마음대로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믿음은 율법을 완성함으로써 율법으로부터 자유롭게 합니다. 율법의 근본 정신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믿음은 사랑으로 드러나고, 사랑으로 완성됩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은 자연히 사랑의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율법의 모든 조문을 다 외우지 못하더라도, 율법의 조문대로 일일이 행하지 않더라도, 믿음의 사람은 사랑을 통해 율법을 완성하는 사람이 됩니다.

우리는 자유인입니다. 율법의 종살이로부터 해방된 자유인입니다. 하지만 우리를 얽어매고 구속하는 것은 다만 율법만은 아닙니다. 복음이 약속하는 자유는 다만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만이 아닙니다. 복음은 모든 멍에, 모든 구속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능력입니다. 복음은 총체적이고 완전한 해방의 능력입니다. 우리는 아직도 수많은 멍에를 지고 살아갑니다. 가장 큰 멍에는 바로 세상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환경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환경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합니다. 지구를 떠나지 않는 한, 우리는 환경의 지배를 받아야 합니다. 추위와 더위, 배고픔과 무서움 등 환경의 지배를 받아야 합니다. 설령 지구를 떠난다고 해도, 환경의 지배를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설령 달나라에 간다고 하더라도, 달의 지배를 받아야 합니다. 죽을 때까지 우리는 세상의 지배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를 얽어매는 멍에와 사슬은 그밖에도 무수히 많습니다. 우리는 전통과 제도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육신을 지니고 있는 한, 우리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육신을 쓰고 있는 한, 우리는 욕망과 걱정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습니다. 결정적으로 우리는 죽음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정신적으로도 우리는 자유롭지 못합니다. 우리는 사상과 이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리고 마음의 상처와 미움으로부터도 자유롭지 못합니다. 결정적으로 우리는 죄책감, 죄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이래저래 우리는 불쌍한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모든 사람들이 불쌍합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우리 인간을 불쌍히 여기셨고, 우리더러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더욱이 바울은 인간만이 종살이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도 종살이를 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롬8:20-23).

하지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은 주님으로 말미암아 이미 자유로운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이런저런 것들에게 매여 종살이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를 다스릴 분은 오직 주님뿐입니다. 세상은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할 수 없고, 우리를 종살이시킬 수 없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세상과 육신과 죄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게 되었다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는 여전히 히 세상의 법칙과 지배를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광신자 혹은 미치광이가 아니라면, 이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오직 죽을 때, 아니 주님이 재림하셔서 이 세상을 완전히 통치하실 때, 우리도 주님과 함께 왕노릇을 할 때, 비로소 우리는 완전한 자유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피조물과 함께 완전한 몸의 구원, 완전한 구원을 위해 지금 탄식하고 있습니다(롬 8:23).

그렇지만 우리는 주님에 의해 자유인으로 부름을 받았기 때문에 더 이상 세상에 질질 끌려 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비록 이 세상 속에서 살지만, 우리는 더 이상 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의 뜻에 따라, 세상에 끌려 다니면서, 세상의 종으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오직 주님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환경의 지배를 전혀 받지 않고 살 수는 없지만, 환경에 이리저리 끌려 다녀서는 안 됩니다. 인간은 동식물과 달리 환경의 지배를 받고 환경에 적응해야만 살아가는 존재가 아닙니다. 인간은 환경을 이용하고 극복하고 때로는 환경을 초월할 수 있기 때문에 위대한 존재입니다. 더욱이 성도는 환경을 이기는 존재입니다. 성도는 환경보다 주님의 뜻을 따라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에는 환경을 완전히 벗어날 각오도 해야 합니다. 왕따를 당하고, 미움을 당할 각오를 해야 합니다. 죽을 각오도 해야 합니다. 순교할 각오도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영생과 부활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 성도 예수쟁이는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그래서 성도가 가는 곳곳마다 자유가 선포되었고, 자유가 성취되었습니다. 기독교가 널리 전파된 곳마다 자유와 해방이 선포되고 실현되었습니다. 교회가 세워지는 곳마다 미신과 악습, 독재와 폭력, 가난과 질병, 차별과 멸시로부터 자유롭게 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제멋대로 살아가도 좋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자유롭게 된 것은 주님에게 속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멍에로부터 벗어간 것은 주님의 멍에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세상과 육신과 죄의 종살이로부터 벗어난 것은 주님의 종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님의 멍에, 주님의 종살이는 무겁지 않고 참으로 가볍습니다. 아니 즐겁고 기쁩니다. 주님의 멍에는 우리를 아프게 하고 괴롭게 하고 죽이는 멍에가 아니라, 우리를 살리고 기쁘게 하고 복되게 하는 멍에입니다. 주님의 멍에는 억지로 메는 멍에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메는 멍에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멍에를 기쁘게 메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사랑의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친히 우리의 모든 멍에를 대신 지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사랑에 감동이 되어, 주님의 은혜에 감격하여, 주님처럼 사랑의 멍에를 기꺼이 져야 합니다. 주님이 주신 자유를 다시금 육체 욕망을 채우는 기회로 악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도는 더 이상 세상과 육체의 종살이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종살이를 해야 한다면, 주님의 종살이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자녀들끼리 사랑으로 서로 종살이를 해야 합니다.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왕과 같은 백성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 앞에서 왕처럼 당당해야 하지만,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는 자신을 종으로 여길 줄도 알아야 하고, 자신을 종으로 부릴 줄도 알아야 합니다.

이와 같은 원리는 가정과 같은 교회에 먼저 적용되어야 하지만, 교회와 같은 가정에도 반드시 적용되어야 합니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도 세상의 관습과 육신의 본능대로, 더 이상 지배와 복종의 관계가 아니라 서로 종노릇을 하는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자식이 부모에게 순종하고 부모의 말씀에 공경하는 것은 단지 부모가 어른이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부모가 힘이 더 세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부모의 사랑에 감사하기 때문입니다. 부모의 기쁨이 되기 원하기 때문입니다. 부모도 자식에게 종노릇을 해야 합니다. 아니 대개 한국의 부모는 자식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자식의 종노릇을 하기를 좋아합니다. 부모이기 때문에 종종 나무라고 때리기는 하지만, 사실 부모는 허리가 휘고 등이 굽을 때까지, 죽을 때까지 자식의 종으로 살아갑니다. 부모라고 해서, 자식을 함부로 다루어서는 안 됩니다. 더욱이 요즘 막 나가는 부모처럼 자식을 함부로 버려서는 안 됩니다. 부모라고 해서 자식을 마음대로 기르고, 마음대로 조종해서도 안 됩니다. 자녀는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에 따라 길러야 합니다. 부모의 뜻대로 길러서는 안 됩니다.

부부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편이 아내를 지배하거나, 아내가 남편을 지배하는 낡은 세상은 이미 지나갔습니다. 남편은 하늘이 아니고, 아내는 땅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남편이 호령하고 아내가 굽실거리는 것은 잘못된 유교의 악습이지, 복음의 정신이 아닙니다. 영화와 드라마를 보니까, 제대로 된 유교 집안, 양반 집안은 부부 사이에도 서로 예우하고, 서로 존경합디다. 이런 유교가 천민 유교로 타락하고, 일제 시대와 독재 시대를 거치면서 완전히 부패되었기 때문에 가정에서 남자가 호령하고 폭력을 행하는 악습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그 악습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곳이 유감스럽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경상도와 대구입니다. 통계적으로 보면, 아직도 유교가 제일 강하게 남아 있는 경상도와 대구에 남자의 폭력이 가장 심하다고 합니다. 여아 낙태가 가장 심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배하고 폭력을 휘두르는 남자도 악습의 불쌍한 희생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구 남자들의 암 사망률이 전국에서 가장 높다고 하니까, 대구 남자들의 고생도 전국에서 가장 크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대구 남성들을 불쌍히 여기고, 더욱 잘 섬깁시다.

이래저래 우리는 불쌍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 사랑하고 섬겨야 합니다. 아니 우리가 불쌍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참으로 귀한 존재이기 때문에 서로 섬겨야 합니다.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부모와 자식이기 때문에 섬기고, 남편과 아내이기 때문에 섬겨야 합니다. 성도이기 때문에 섬겨야 합니다. 서로 먼저 섬기고, 서로 먼저 종노릇해야 합니다.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는 가장 좋은 비결은 좋은 일도 내가 먼저 하고, 굳은 일도 내가 먼저 하는 것입니다. 내가 먼저 감사하고, 내가 먼저 위로하고, 내가 먼저 인사하고, 내가 먼저 용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 잘못, 내 눈의 들보부터 먼저 보는 것입니다.

어느 마을에 상당히 대조적인 두 가정이 있었습니다. 한 집은 부부 싸움이 그칠 날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집은 부부 싸움이 한 번도 없이, 언제나 평화스러운 모습이었습니다. 어느 날 싸움을 잘 하는 집 남자가 평화로운 집 남자에게 물어보았습니다. "도대체 당신 가정은 어떻게 그토록 화평한 가정을 계속 유지해 나갈 수가 있습니까? 그 비결을 좀 가르쳐 주십시오!" 옆집 남자는 싱긋이 웃으면서 대답했습니다. "그거야 간단합니다. 댁에는 모두 착한 분들만 사시고, 우리 집에는 모두 나쁜 사람들만이 모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 소리를 듣고 옆집 남자는 정색을 하면서 다시 물었습니다. "농담하지 마시고, 어서 빨리 가정 평화의 비결을 말씀해 주세요." 옆집 남자가 웃음을 거두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모르고서 방 한가운데 놓여 있던 물컵을 바로 차서 넘어뜨렸다고 가정해 봅시다. 나는 당연히 그것이 내가 부주의한 탓이라고 용서를 구합니다. 그러나 내 아내는 자기가 그 곳에 물컵을 둔 것이 자기의 잘못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우리 어머님께서는 어른이 된 자신이 그것을 보고도 치우지 못했으니까 자기가 잘못했다고 말씀하십니다. 모두가 자진해서 서로 나쁜 사람이 되려고 하니, 싸움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