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은혜를 입은 자여!

 눅 1:26-38

2005년 12월 25일, 현풍제일교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에게 아기 예수님의 평화가 늘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성탄절을 맞이하여 온 세계 사람들이 기뻐합니다. 기독교인만이 아니라 심지어 불교인과 이슬람교인도, 아니 하나님을 전혀 믿지 않은 사람들도 성탄절을 반기며 즐거워합니다. 비록 성탄절의 주인공이 예수님이 아니라 엉뚱하게도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로 바뀌었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이 날만은 기쁜 날이기를 진정으로 바라고 있습니다. 비록 성탄절은 사랑과 구원의 날이 아니라 영악한 장사꾼들의 날로 변질되었지만, 그래도 이 날만은 뭔가 좋은 일이 일어날 것으로 사람들은 기대합니다. 좌우간 사람들이 성탄절을 어떻게 보내고 어떻게 이용하든, 우리에게 참으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바로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사람들마다 제 각기 달리 말하지만, 한 마디로 말하자면, 바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려고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천사 가브리엘이 요셉과 정혼한 처녀 마리아에게 나타나서, 이렇게 말합니다.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찌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 무서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느니라.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요즘에는 아주 흔한 일이 되었습니다만, 2천년 전 유대 땅에서 처녀가 아기를 밴다는 사실은 참으로 끔직한 일입니다. 더욱이 약혼한 남자를 둔 여인이 남의 아기를 밴다는 것은 뻔뻔한 부정을 저질렀다는 말이 됩니다. 두 말할 것도 없이 돌멩이로 맞아 죽어야 마땅한 짓입니다. 더욱이 누가 마리아의 결백을 믿어 주겠습니까? 더욱이 약혼자 요셉조차 마리아의 결백을 믿어주겠습니까? 아무도 몰라 줄 것입니다. 요즘처럼 인공수정을 통해 아기를 배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하던 그 시대에 처녀가 아기를 뱄다는 사실은 가문에도 엄청난 수치를 안겨 준 일이 됩니다. 이것은 옛 날의 일만은 아닙니다. 요즘 이슬람을 믿는 나라에서도 이슬람의 계율을 무시하고 마음대로 사랑했다는 이유로 여인들이 가족과 친척에게 죽임을 당하는 일이 종종 일어나곤 합니다. 계율이 엄격하던 2천년 전에 여자 혼자서는 도저히 임신할 수 없는 여인이 결혼하기도 전에 배가 불러온다니, 얼마나 두렵고 무서운 일이겠습니까?

더 놀라운 것은 갑자기 천사가 나타나 처녀 마리아에게 아기를 밸 것이라고 소식을 알려준 사실입니다. 성경을 보면, 천사는 자주 나타나지 않습니다. 아주 중요한 사명을 전달할 일이 있을 때에만 아주 드물게 천사가 등장합니다. 마리아는 평생 천사를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느닷없이 나타난 천사의 등장에 착하고 여렸던 마리아는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참으로 혼비백산하여 뒤로 나자빠질 일입니다. 신비한 존재인 천사가 갑자기 그에게 나타난 것도 기이하고 놀라운 일인데, 처녀가 아기를 밸 것이라고 예언하니, 참으로 기가 막히고 놀랄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 사정을 다 알아차린 천사 미가엘은 마리아에게 "평강할찌어다"라고 말합니다. "안심하라,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별안간 천사가 왜 나타났는지, 처녀가 어찌 아기를 밸 수 있는지, 아무런 이유도 말하지 않고,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는다면, 어찌 안심할 수 있겠습니까? 무서워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바로 마리아가 은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28절에서 천사는 말합니다.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찌어다." 30절에서도 천사는 말합니다. "마리아여, 무서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느니라."

우리는 대개 왜 이 세상에 태어난 지를 잘 모르고 살고, 왜 죽는지도 잘 모르고 죽습니다. 누가 잘 말해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낳고 기르신 부모님도 그 이유를 잘 말해 주시지 않습니다. 아마도 부모님도 우리를 낳은 목적을 잘 모르고 낳으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지금도 부모님에게 "왜 나를 낳으셨습니까?"고 물어보면, 열의 아홉은 아마도 이런 말을 하실 것입니다. "내가 너를 낳고 싶어 낳았냐? 네가 생겼으니까 낳았지!" 그러면 이렇게 물어 보십시오. "그럼 내가 왜 생겨났습니까?" 그러면 부모님은 이제 뭐라고 대답하실 것 같습니까? 아마도 민망해서 잘 대답하시지 못할 것입니다. 가장 흔한 대답이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는 말입니다. 커서 보니까, 그 말이 거짓말이나 우스개 말이 아니라 정답이더군요. 정말 모든 아기는 엄마 다리 밑에서 주워온 아기가 아닙니까? 문제는 "누가 그 아기를 다리 밑에 갖다 놓았느냐?"는 사실입니다. 요즘 성교육을 많이 받는 자녀들에게 부모님들이 솔직하게 대답하듯이, 설령 아빠와 엄마가 사랑해서, 뽀뽀를 하고 서로 부둥켜안고 자서 아기를 낳았다고 해도, 대답이 다 된 것은 아닙니다. 왜 우리가 생겨났으며, 왜 우리는 이 땅에 태어났는지는,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직접 대답하시기 전에는 아무도 모를 것입니다. 그래서 생명은 아직도 신비입니다. 과학자가 아무리 배아 세포를 해부하고 이리저리 조작해도, 생명은 영원한 신비입니다. 황우석 교수의 진정한 잘못은 거짓말에 있다기보다는 생명을 인간이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다는 교만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세상에 왜 태어났는지, 그 이유를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물론 직접 음성을 들으려고 노력할 필요는 없습니다. 비록 성경은 여러분 하나 하나를 골라서 말하지는 않지만,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신 목적을 여러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되었다고 말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 태어났다고도 말합니다. 인간은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기 위해 태어났다고도 말합니다. 인간은 생육하고 번성하기 위해 창조되었다고도 말합니다. 이런 말씀들 가운데서 여러분에게 가장 다가오는 말씀들을 여러분의 삶에 적용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분명히 우리는 아무 목적도 없이, 아무 이유도 없이 태어나진 않았습니다. 우리는 다리 밑에서 우연히 주워온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 아래, 하나님의 섭리 안에 거룩하고 아름답게 지음을 받은 존귀한 존재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난 이유를 가장 분명히 말씀해 주시는 한 분, 위대한 스승 한 분이 계십니다. 그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은 아무 목적도 모르고 사시다가 아무 이유도 없이 돌아가신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분명히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분명한 사명을 띠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분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성경은 여러 가지로 말합니다. 예수님이 오신 목적은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함입니다. 이 땅에 참 진리와 평화를 심기 위해, 우리에게 영생과 기쁨을 주기 위해, 우리를 죄악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은 오셨습니다. 한 마디로 줄이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은혜의 해를 선포하시고 실현하시기 위함입니다. 누가복음 4장 18-19절이 이를 분명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눅 4:18-19).

예수님은 은혜의 해를 전파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태어나신 날은 바로 은혜의 날입니다. 그 스스로 은혜가 아닌 분이 어떻게 은혜를 선포하실 수 있겠으며, 더욱이 은혜를 줄 수 있겠습니까? 인간의 배아줄기세포를 세계 최초로 만들어냈다고 온 백성이, 아니 온 세계 사람이 경탄해마지 않던 황우석 교수가 상당히 많은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이 들통이 났습니다. 이로 인해 난치병을 고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던 많은 사람들이, 그리고 기쁜 소식을 기다리던 온 세계 사람들이 큰 충격과 실망에 빠졌습니다. 하지만 황 교수에게 모든 책임이 돌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를 성급하게 부추긴 세력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황 교수만이 거짓말쟁이가 아닙니다. 그는 거짓말을 잘 하는 우리 모두의 자화상을 보여줍니다. 설령 황 교수가 배아줄기세포를 만들어 난치병 치료에 획기적인 도움을 주었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대부분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전혀 기쁜 소식이 될 수 없습니다. 그의 혜택은 오직 부자들의 돈벌이와 부자들의 치료에만 도움을 주는 것이 될 것이므로, 대다수 서민들에게는 오히려 더 심각한 빈부격차와 깊은 절망을 안겨줄 것입니다.

은혜란 공짜라는 말입니다. 우리 나라 사람이 하도 가난하게 산 탓인지는 몰라도 유달리 공짜를 좋아해서, "공짜라면 양잿물도 마신다"는 속담이 생겨났습니다만, 은혜란 "아무 대가도 없이 주어지는 선물"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과학은 부자에게는 혜택을 줄 수 있어도, 모든 사람들에게 은혜를 줄 수는 없습니다. 오직 은혜이신 분만이 은혜를 주실 수 있습니다. 오직 사랑이신 분만이 사랑을 주실 수 있습니다. 오직 진리이신 분만이 진리를 말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100 퍼센트의 은혜와 사랑과 진리를 기대하지 마십시오. 실망으로 끝날 게 뻔합니다. 100 퍼센트 은혜와 사랑과 진리가 아닌 인간이 어찌 똑같은 인간에게 100 퍼센트 은혜와 사랑과 진리를 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황우석 교수가 100 퍼센트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고 새삼 실망하지 마십시오. 그에게 100 퍼센트 진실을 기대했던 우리가 바보입니다. 황우석 교수의 거짓말 게임에 놀아난 우리가 바보입니다. 좌우간 우리는 황 교수를 너무 비난하거나, 그로 인해 너무 실망하지도 마십시다. 인간은 늘 그래왔으니까요...!

오직 100 퍼센트 은혜이신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100 퍼센트 은혜를 주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마리아에게 주신 것은 신기한 생명체라기보다는 100 퍼센트 은혜입니다. 참 은혜이신 하나님이 참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은혜란 공짜라는 말이라고 했습니다. 아무 대가도 없는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하나님이 아무 대가도 없이, 공짜로 주신 선물입니까? 물론 아기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아기 예수님을 오늘 우리는 어떻게 선물로 받을 수 있습니까? 2천년 전의 사람들 중에 소수들은 아기 예수님을 눈으로 보았고, 손으로 만져 보았습니다. 그렇지만 아기 예수님을 눈으로 볼 수도 없고 손을 만질 수도 없는 우리가 어떻게 아기 예수님이라는 은혜의 선물을 받을 수가 있습니까? 믿음으로 받습니까? 아닙니다. 다만 믿음뿐이고 실제가 아니라면, 100 퍼센트 선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은 시공간에 제약되는 예수님의 육체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아기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은 언제 어디서든지 모든 사람들이, 아니 모든 우주가 경험할 수 있는 영원한 선물입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28절에서 천사 미가엘을 뭐라고 말합니까?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찌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그렇습니다. 아기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은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다만 약속으로만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육신으로 오신 아기 예수님을 통해 입증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성령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십니다. 감리교의 창지사인 요한 웨슬리가 죽을 때에 남긴 말도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라고 합니다. 오래 살았든 짧게 살았든, 이 세상에 살면서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이었던 것 같습니까? 어린 아기에게 가장 좋은 것은 사랑하는 부모가 언제나 그와 함께 한다는 것입니다. 설령 부모가 육체적으로 잠깐 떨어져 있어도, 만약 부모가 언제나 그를 지켜보고 있고 언제라도 찾아온다고 믿으면, 어린 아기는 평안하게 놀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린 아기에게 그 부모를, 그 엄마를 강제로, 영원히 떼어놓아 보십시오. 그 아기에게 아무리 좋은 것을 주어도, 그 아기는 기쁘지 않습니다. 그 아기를 아무리 달래도 그 아기는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부모에게 버림을 받은 고아가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자요, 자식을 버리는 부모가 세상에서 가장 나쁜 자입니다.

제가 부천에 위치한 서울신대학교를 졸업할 때, 저의 부모님은 부산에 살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부모님에게 먼 곳까지 오실 필요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부모님은 대학교 졸업식 때에 오시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막상 졸업식 날이 되고 보니, 얼마나 쓸쓸하고 슬펐던지, 사내로서 차마 눈물은 흘리지 않았지만, 마음으로는 참으로 우울했습니다. 기쁠 때에 함께 기쁨을 나눌 사람이 없다는 것은 차라리 슬픔입니다. 연세신학대학원을 졸업할 때에는 저의 부모님만이 아니라 형님과 형님의 친구, 심지어 아주 어린 조카도 와 주었습니다. 졸업을 마치고 어린이 대공원에 다녀왔습니다. 그 날은 날씨가 무척 추웠고, 어린 조카가 바지에 오줌을 싸는 등 좀 힘겨운 일도 있었지만, 제 기억으로는 행복했던 날로 길이 남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 가장 행복한 것은 재물과 명예와 출세가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저의 아내가 가장 행복해 하는 것은 저와 함께 하는 것입니다. 아내는 돈을 많이 주거나 좋은 그 무엇을 줄 때보다 저와 함께 하는 것을 가장 좋아합니다. 특히 운전석 옆에 앉을 때에는 얼마나 행복해하는지 모릅니다. 아내를 행복하게 해 주는 비결은 간단하고 쉬운 데 있습니다. 함께 있어 주는 일, 함께 시장에 가는 일, 함께 차를 타는 일은 수고와 돈이 그리 들지 않습니다. 종종 바쁜 중에 시간이 들기도 합니다만, 그래도 저는 아내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아까운 시간을 과감히 내어 줍니다. 그런데 내가 아내와 함께 해 줄 때에 아내만이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행복해 하는 아내를 보는 저도 참으로 행복합니다. 독일에서 혼자 있을 때에 가장 힘든 일은 나의 행복을 나눌 아내가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독일 고속도로에서 오래 운전할 때에 가장 힘든 것은 옆 좌석에 아내가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지금에야 여기서 말하지만, 그래서 저는 늘 내 옆 좌석에 아내가 있는 것처럼 상상하고 운전하였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제가 불행해서 못 견디겠더라구요. 마치 아내라 옆에 앉아 있는 것처럼 운전하면,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부모님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님은 자식에게 많은 돈이나 음식을 바라지 않습니다. 먼길 떠난 자식이 부모님에게 종종 안부를 전해주는 것으로도 부모님을 얼마나 행복하게 하는지요! 그래서 부모님에게 해 드릴 것이 달리 없는 저는 홀로 계신 어머님에게 종종 전화를 합니다. 전화가 목적이 아니라, 홀로 계신 어머님 옆에 제가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려는 목적입니다. 비록 짧은 통화라도 어머님이 얼마나 좋아하시는지요. 부모님을 행복하게 해 주는 비결은 거창한 데 있지 않습니다. 부모님 곁에 평생 함께 있다는 말로도 부모님을 한없이 행복하게 해 드릴 수 있습니다. 기왕이면 돌아가시기 전에, 부모님에게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는 말을 해 준다면, 더 할 나위가 없습니다. 저의 부친이 돌아가신 후에 제가 가장 후회하는 일은 그런 말을 한번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저처럼 후회하지 않으시려면, 말로만이 아니라 진정으로 부모님을 사랑하고 부모님과 함께 한다는 것을 종종 표현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행복할 때에 함께 해주는 사람이 없는 것도 무척 슬픈데, 슬플 때에 함께 해주는 사람이 없는 것은 무척 슬픕니다. 아니 슬퍼다 못해 비참합니다. 제게 그런 경우는 없습니다만, 혹시 제가 실수하거나 오해를 살만한 행동을 한 후에 아내가 화를 내면, 저도 같이 화를 내거나 변명하거나 합니다. 그러나 아내가 진정으로 슬퍼하는 것을 보면, 저는 아무리 제가 결백하고 억울해도 아내의 슬픔을 홀로 둘 수가 없습니다. 홀로 슬퍼하는 아내의 모습보다 더 슬픈 것은 없습니다. 아내를 슬퍼하게 한 못난 저 자신도 슬프지만, 그보다는 아내가 홀로 슬퍼하는 것은 참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무조건 잘못했다고 빕니다. 그리고 무조건 아내를 안아 주려고 노력합니다. 아내가 뿌리쳐도, 그래서 실수로 제가 맞는 한이 있더라도, 아내를 품어주고 싶습니다. 이것이 무슨 동정심인지, 남자의 본능인지는 잘 몰라도, 좌우간 "만약 제가 슬플 때에 홀로 있게 된다면 얼마나 슬프겠는가!"를 상상하면, 슬퍼하는 아내를 그냥 둘 수 없습니다. 제 자랑이 아니라 제 아내도 제가 슬퍼할 만할 때에 가장 가까이 와 주었고, 저를 가장 이해해 주었거든요! 그래서 저는 지금도 제가 잘 되었을 때에 축하해 주고 함께 한 사람보다 제가 곤경에 빠졌을 때에 함께 해준 사람이 가장 고맙고 그립습니다. 그런 사람들과는 지옥이라도 갈 수 있을 것 같지만, 혼자로는 천국에 가고 싶지 않을 것 같습니다.

말이 조금 다른 곳으로 흘러갔습니다만, 아기 예수님의 탄생이 우리에게 참으로 기쁘고 행복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더 가까이, 아니 가장 가까이 오셨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신다." 처녀로서 아기를 밴 마리아는 두렵고 무서웠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음을 알고 기뻐서 단숨에 친척 엘리사벳에게 달려갔습니다. 엘리사벳도 마침 세례 요한을 잉태하고 있었으므로, 서로 축하해주고 기뻐하였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도 참으로 행복한 일입니다. 만약 제가 언젠가 여러분 곁을 떠나게 된다면, 여러분이 제게 주신 말씀과 여러 가지 좋은 것들, 좋은 음식과 선물 등은 대부분 잊을 것이지만, 여러분과 함께 했다는 사실만은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가장 행복했다고 기억할 것입니다. 참으로 좋은 것, 아니 가장 좋은 것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함께 하는 것입니다.

마리아가 하나님의 엄청난 선물, 놀라운 은혜를 받았다면, 우리도 마리아를 통해, 아니 아기 예수님을 통해 놀랍고 엄청난 선물을 받았습니다. 하늘 높은 곳에만 계시던 하나님이 아기 예수님 안에서 우리의 육신 안으로 오셨습니다. 우리의 세상 안으로 오셨습니다. 이제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시고 우리를 말씀으로만 훈계하시고 위로하시지 않고, 친히 육신과 말씀이 되셔서 우리 가운데로 오셨습니다. 우리와 함께 하셨습니다. 이 날 이후로, 이 은혜의 날 이후로 이 지구는, 이 세상은, 우리는 이제 혼자가 아닙니다. 비록 폭풍우가 몰아치고 환난이 덮쳐와도, 이제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있습니다. 폭풍을 만난 배가 흔들리고 가라앉을 것만 같았어도, 예수님이 배 안에 계시므로 안전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배의 안전과 운행을 책임지시므로, 험한 항로도 이제는 겁나지 않습니다. 폭풍보다 더 위험한 것은 배 안에 예수님이 안 계시는 것입니다. 아니 만약 배가 순항할 때에 예수님이 안 계신다면, 이것은 더 위험천만한 일입니다. 위급할 때에 도우실 분이 없어서가 아니라, 예수님이 안 계신 그곳은 바로 지옥과 같은 곳이기 때문입니다. 겉으로는 예수님이 안 계시니 마음대로 먹고 마실 수 있고 마음대로 살 수 있어서 좋을 것 같아도, 아니 예수님이 안 계셔서 오히려 만사태평인 것 같아도, 이 때야말로 가장 위험한 때입니다. 죄를 가장 잘 지을 수 있고, 악에 가장 잘 물들 수 있는 때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잘 불려지지 않지만, 저는 이런 찬송이 마음에 듭니다. '예수 없는 천당은 내가 원치 않고요, 예수 있는 지옥도 내가 가길 원하네, 예수여, 예수여, 내 마음에 오셔서,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게 하소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비록 알든 모르든 모든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지만, 여러분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것을 알기 때문에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알고 모르는 것은 천지차이입니다. 더욱이 알뿐만 아니라 아는 대로 사는 것은 알면서도 아는 대로 살지 않는 것과도 천지차이입니다. 여러분도 마리아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아무리 두렵고 힘들더라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겁내지 마십시오.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세상 끝 날까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과 함께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성탄절이 인류에게 안겨다준 가장 크고 놀랍고 기쁜 소식입니다. 아직도 이 소식을 듣지 못하고 있고 믿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 소식을 널리 전합시다. 이 소식을 혼자만 간직하기에는 너무 아깝고 귀한 소식입니다. 기쁨은 나눌수록 더 커진다고 하였으니, 이 기쁜 소식을 널리 전함으로써 여러분의 기쁨도 날로 더 커질 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