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서로 마음을 같이 하라

롬 12:15-16

2004년 7월 14일, 현풍제일교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 동안 평안하셨습니까? 아니 하나님의 평안이 여러분에게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이 무더위에 무슨 평안이냐? 그렇게 묻고 싶은 분들이 계시겠죠? 사실 작년에 이어 올해에도 자연의 위력이 만만치 않습니다. 작년에는 물동이로 물을 마구 퍼붓듯이 하늘이 엄청난 비를 내리더니, 올해에는 이글거리는 태양이 온 땅을 불덩이로 만듭니다. "잘 났다"고 으스대는 인간이 자연의 위력 앞에 꼼짝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서, 새삼 자연 앞에 겸허해지게 됩니다. 지금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받는 시련은 인간이 스스로 자초한 점이 많다고 합니다. 지금처럼 기후가 달라진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지구 온난화 현상' 때문이라고 합니다. 인간이 태운 화석 연료 때문에 지구에 비닐 하우스와 같은 검은 막이 덮여서 기온이 점점 더 올라간다고 합니다. 그 결과로 빙하가 점점 녹아 낮은 땅이 물게 잠기고, 날씨도 점점 더워진다는 겁니다.

그래서 얼마 전부터 환경의 위기를 절감한 국가들이 해마다 화석연료 사용을 점차로 줄이기 위해 기후환경협약을 제안하였지만, 세계에서 석유를 가장 많이 사용하는 미국의 반대 때문에 별반 효과를 거두지 못한다고 합니다. 말이 다른 곳으로 잠깐 빗나갔지만, 미국이 9.11 사태를 빌미로 이라크를 침공한 이유도 실제로는 이라크가 석유 매장량이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기 때문이라고 전문가들은 분석합니다. 이래저래 석유 때문에 지구는 하루도 평안할 날이 없습니다. 좌우간 우리는 교만한 미국이 회개하도록 기도해야 하겠지만, 우리도 자원을 너무 낭비하는 일이 없는지 되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지난 주일에 저는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라"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서로를 형제와 자매로 여겨 사랑하고, 서로를 왕처럼 존경하자"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은 이 말씀에 이어 "서로 마음을 같이 하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릴까 합니다. 오늘의 본문만이 아니라 다른 본문에서도 사도 바울은 자주 성도들에게 '마음을 같이 할 것'을 권합니다. 로마서 15장 5절에서 바울은 "이제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라고 기도합니다. 고린도후서 13장 11절에서 바울은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형제들아 기뻐하라. 온전케 되며, 위로를 받으며, 마음을 같이 하며..."라고 권합니다. 빌립보서 2장 2절에서 바울은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빌립보서 4장 23절에서도 바울은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이렇게 자주 초대교회의 성도들에게 한 마음이 될 것을 권하는 것은 물론 교회 안에서 자주 분열과 갈등이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일어날 분열과 갈등을 염려하기 때문입니다.

곳곳마다 사람들이 서로 갈등하고 분쟁하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왜 이처럼 분쟁과 갈등이 끊이지 않고 일어날까요? 세상에는 왜 참 평안과 평화가 없을까요? 성경은 인류의 범죄가 가장 큰 원인이라고 봅니다. 창세기의 기록을 보면, 인류의 범죄 때문에 낙원의 평화가 깨어졌습니다. 서로를 자신의 살과 뼈처럼 친밀하게, 아니 한 몸처럼 사랑하던 부부가 범죄 후에는 서로에게 죄를 전가합니다. 상대방의 허물을 덮어주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의 책임을 상대방에게 떠넘깁니다. 형제 사이에 지배를 둘러싼 험악한 투쟁이 일어납니다. 나라 사이에 영토와 자원을 둘러싼 치열한 전쟁이 일어납니다. 더욱이 인간과 땅 사이에도 힘겨운 노동과 투쟁이 일어납니다. 이 모든 분열과 갈등의 뿌리는 인간이 자신의 근원인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사실에 있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하는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거부한 결과로 인간에 내려진 가장 무거운 심판은 낙원 추방입니다. 이로 인하여 인간은 자신의 존재와 생명의 근원인 하나님으로부터 추방되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분열들은 이와 같은 근원적인 분열의 현상과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하나님에게 다시 되돌아가지 않는 한, 참된 평안과 평화를 누릴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인간과 인간 사이에, 그리고 인간과 자연 사이에 가로막힌 담을 허물기 위해 친히 십자가의 희생을 감당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인류에게 평화의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그러므로 길이신 예수님을 뒤따르지 않고서는 평화와 생명으로 가는 길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갈등을 극복하고 존재의 근원이신 하나님에게 되돌아가지 않고서는 인류는 참 평화를 영원히 누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갈등에는 항상 부정적이고 악한 점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죄로 인한 갈등 외에도 새로운 창조를 위한 생산적인 갈등도 있습니다. 세상은 처음부터 완성된 채로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인생도 아직은 미완성입니다. 그러므로 더 나은 발전과 새로운 도약을 위한 갈등은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발전을 위한 갈등을 회피해서는 안 됩니다. "과거가 좋았다"는 보수적인 사고 방식이나 "지금 이대로가 좋다. 이러면 어쩌고 저러면 어쩌리"하는 식으로, 현상을 유지하려는 사고 방식은 기독교적이지 않습니다. 인류의 죄악과 미래의 발전 때문에 우리는 매일 회개하고, 매일 새로워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교회도 사람이 모인 곳이라서 갈등이 없을 순 없습니다. 교회의 발전을 위해, 선교의 방법을 위해 서로 다른 견해를 내어놓고 토론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인간의 추악한 욕심과 교만, 시기와 모함 때문에 갈등이 생겨난다면, 이것은 교회를 큰 위험에 빠뜨릴 수 있습니다. 이런 무익한 갈등, 아니 추악한 갈등은 교회가 항상 경계해야 합니다. 바울이 걱정하고 근심하는 갈등과 분열은 바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일평생 교회를 세우는 일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교회의 갈등을 치유하기 위해서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교회를 위해 일평생 근심하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주 교회에 보낸 편지 속에서 성도들에게 한 마음이 될 것을, 마음을 같이 할 것을 권하였습니다.

 

"마음을 같이 한다"는 것은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하나는 "서로 동고동락한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15절에서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갈등을 방지하고 치유하는 데 이처럼 좋은 처방은 없습니다. 기쁜 일에 함께 기뻐하고 슬픈 일에 함께 슬퍼하는 일만큼 사람을 하나로 묶는 든든한 끈이 없습니다. "먼 친척보다 가까운 이웃"이라는 말이 있듯이, 함께 울고 웃는 사람이 바로 진정한 가족이요, 진정한 친구요, 진정한 성도입니다. 사람이 생각과 이념으로 하나가 된다는 것은 물론 참으로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같은 가족끼리도, 아니 부부끼리도 생각이 제 각각입니다. 그리고 나쁜 생각이 아니라면, 다른 것이 반드시 틀린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생각이 서로 다른 사람끼리라도 감정이 서로 통한다면,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설령 생각과 이념이 완전히 다르다고 하더라도, 상대방의 기쁨과 아픔을 함께 나눌 수 있다면, 얼마든지 좋은  동반자가 될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 교회의 성도들이 생각이 똑같다면, 한편으로는 갈등이 없어서 좋기도 하겠지만, 교회 생활이 얼마나 단조롭고 지루하겠습니까? 하지만 우리 교회 성도들이 서로 기쁨과 아픔을 나 몰라라 한다면, 교회 생황이 얼마나 삭막하겠습니까? 특히 기쁜 일보다 슬픈 일에 함께 하지 않는다면, 한 교회, 한 성도라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바울은 "사랑이 없다면, 다른 모든 것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머리가 아무리 똑똑해도, 아무리 잘 살고 출세해도, 사랑의 감정이 메마른 사람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말이 됩니다. 요한은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사랑은 함께 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고통에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머리는 똑똑하지만 사랑의 감정이 메마른 사람보다는 머리는 좀 덜 똑똑해도 사랑의 감정이 풍부한 사람이 하나님에게 더 가까이 있다는 말이 됩니다. 설령 고통을 당장 해결해 주지는 못해도, 고통을 당하는 자와 함께 하는 것은 큰 위로가 됩니다. 예수님도 "불쌍히 여기는 자가 복이 있나니, 그가 불쌍히 여김을 받을 것이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비록 우리가 서로 생각과 뜻은 다르더라도, 서로를 진정으로 불쌍히 여겨주고 서로의 아픔을 진정으로 감싸주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합시다. 이런 자야말로 진정 예수님이 축복하신 바로 그 사람, 참으로 행복한 자가 아니겠습니까! 이런 교회야말로 참으로 예수님이 약속하신 바로 그 교회, 반석 위에 세운 영원한 교회가 아니겠습니까!   

 

"마음을 같이 한다"는 것은 "같은 마음 자세를 갖는다"는 뜻도 갖고 있습니다. 바울은 15절에서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말라." 대개 사람들 간의 갈등은 모두가 서로에게 "자기가 더 잘났다"거나 "자기가 더 옳다"고 우기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대개 사람들 간의 투쟁은 "자기를 더 알아달라"거나 "자리를 높여달라"고 하기 때문에 생겨납니다. 대개 사람들 간의 상처는 "자기를 무시했다"거나 "자기를 깔보았다"는 이유로 생겨납니다. 이런 생각, 이런 마음 자세를 갖는 한, 세상에는 영원히 평화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과 같으신 분이 자기를 비워서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자기를 낮추어서 종의 형태를 입으셨습니다. 더욱이 자기를 죽여 인류를 살리셨습니다. 범죄한 인류를 위해 죄가 없는 자신을 희생시킨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이런 예수님을 하나님은 높이 들어 올리셔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히셨습니다. 세계의 통치자와 심판자로 앉히셨습니다. 자신을 무한히 낮출 수 있는 사람보다 더 위대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과는 달리 성도들의 마음 자세는 항상 낮은 곳을 향해야 합니다. 성도의 꿈은 세상 사람의 꿈보다 더 높아야 합니다. 우리가 꿈꾸는 꿈은 하나님 나라의 꿈입니다. 모든 인류가 하나가 되는 꿈, 전쟁이 그치고 온 세상에 평화가 넘치는 꿈, 온 누리에 생명과 기쁨이 충만한 꿈입니다. 이런 꿈은 세상 사람들이 감히 꿀 수 없는 위대한 꿈입니다. 하지만 성도들의 마음 자세는 예수님처럼 언제나 더 낮은 곳으로 향해야 합니다. 낮은 곳으로 임하신 예수님처럼 우리도 세상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세상 사람들의 종이 되기를 기꺼이 자처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해야 하거늘, 하물며 형제와 같고 자매와 같은 성도들의 종이 되지 못한대서야, 말이 됩니까? 성도가 서로 섬기고 서로 낮추는 곳에서는 분쟁과 갈등이 일어날 이유가 없습니다. 서로가 먼저 "낮아지겠다", 서로가 먼저 "용서하겠다", 서로가 먼저 "이해하겠다", 서로가 먼저 "당신의 말이 더 일리가 있을 지도 모른다, 당신이 더 옳을지도 모른다." 이런 마음 자세를 갖는다면, 갈등과 분쟁은 그 어디서도 둥지를 틀 곳이 없습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의 마음을 가집시다. 남의 아픔을 나의 아픔처럼 생각하는 마음을 소유한 사람이 됩시다. 남을 더 낫게 여기는 사람, 남을 먼저 섬기는 사람이 됩시다. 이런 일에 마음을 같이 합시다. 그리하여 현풍과 한국과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교회, 가장 아름다운 성도가 되도록 기도합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