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서로 용납하고 용서하라

골 3:12-14

2004년 8월 1일, 현풍제일교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에게 늘 충만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지난 주일에 저는 "서로 마음을 같이 하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마음을 같이 한다"는 것은 "서로 동고동락한다"는 뜻과 "서로 자신을 낮추는 마음 자세를 갖는다"는 뜻을 갖고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은 이 말씀에 이어서 "서로 용납하고 용서하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릴까 합니다.

"서로 용납하고 용서하라"는 말씀은 사도 바울이 골로새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 가운데 나타납니다. 아마도 골로새 교회 안에서 심한 다툼이 일어났던 것 같습니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3장 5절에서 바울이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아마도 골로새 교회 안에는 육신의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많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결과로 3장 8-9절의 말씀대로 분노와 악의와 훼방과 부끄러운 말과 거짓말이 골로새 교회를 심하게 어지럽혔던 것 같습니다.  

이와 같은 골로새 교회의 형편을 알게 된 바울은 먼저 골로새 교인들에게 자신의 신분을 분명히 밝혀 줍니다. 3장 1-12절에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다. 너희는 죽었고, 너희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다. 그리스도가 재림하실 때, 너희도 영광 중에 나타날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거룩하고 사랑을 받는 자다." 이렇게 골로새 교인의 새로운 신분을 분명히 밝히면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실천 강령을 제시합니다.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하지 말라.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너희가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과 악의와 훼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으로 옷을 입으라. 누가 누구에게 불평하거든, 서로 용납하여 주고, 주님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피차 용서하여 주라."

이와 같은 바울의 권면 가운데서 저는 "서로 용납하여 주고, 피차 용서하여 주라."는 말씀에 특별히 주목하여 말씀을 드릴까 합니다. 어떤 공동체든지, 거기에는 반드시 갈등과 다툼이 일어납니다. 교회라고 예외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교회 안에는 아직 진정으로 거듭나지 않은 자들, 성경의 표현대로 '가라지'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존재로 거듭난 '알곡'인 교인들이라고 해서, 완전할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성도라도 이 세상 가운데서 살아야 하므로, 그리고 성도라도 여전히 육신 가운데 있으므로 세상과 육신의 일을 도모해야 합니다. 세상과 육신의 일이 곧 악한 것은 아닙니다.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하지 말라.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라는 바울의 말은 "세상과 육신을 부정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과 육신을 부정하기는커녕, 하나님이 독생자를 보내셔서 죽기까지 사랑하신 이 세상과 육신을 긍정하고, 세상과 육신 가운데서 하나님의 영광을 찾고 실현해야 합니다. 그러면 바울이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라고 말한 뜻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의 생명, 하나님 나라의 영광으로 거듭난 성도답게, 하나님의 선택과 사랑을 받은 거룩한 백성답게 자신의 욕망에 이끌려 살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생각하고 행동하라"는 말입니다.  

분명히 교회 안에는 여전히 신앙과 행동에 초보적인 자, 미숙한 자, 걸음마 신자가 많이 있습니다. 이들이 세상의 욕망에 따라, 세상의 기준에 따라 다른 성도들에게 악한 생각을 품고, 다른 성도를 향해 악하고 더럽고 거짓된 말을 내뱉을 때, 성도가 서로에게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바울은 가르칩니다. 바울은 세상 기준에 따라, 세상 사람들처럼 그런 사람들을 똑같이 비난하고 추방할 것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바울은 하나님의 선택과 사랑을 받은 거룩한 백성답게 동정심을 갖고, 친절하고, 겸손하고, 온유하고, 오래 참으라고 말합니다. 특히 불평하는 일이 생기더라도, 똑같이 불평하고 험담을 주고받을 것이 아니라, 서로 용납하고 용서하라고 말합니다.

"더러운 죄인을, 나쁜 놈을 용납하고 용서하라니요! 이게 말이 됩니까? 말이 안 되지요. 그런 놈을 빨리 솎아내어야 교회가 깨끗해지죠!" 이런 생각으로 성급히 징계의 몽둥이를 내치려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도 종종 나타났습니다. 물론 교회 안에서도 정의를 세워야 할 때가 있습니다. 정의를 세우는 일이 사랑보다 더 시급할 때가 있습니다. 아니 정의를 세우는 일이야말로 참으로 사랑을 세우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랑이 없는 정의, 단지 징계를 위해 징계하려는 정의, 즉 사랑을 세우려고 노력하지 않는 정의는 참으로 위험하고 무모합니다.

예를 들면, 남을 살인한 사람은 당연히 죽여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지금 한국 사회와 교계에서도 사형제도 폐지에 관해 논쟁이 오가고 있는데, 사형 제도가 살인 범죄를 줄이는 효과를 나타내지 않는다고 합니다. 남을 살인하기까지 극단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은 자기도 죽을까 봐 겁이 나서 살인을 중지하는 일이 드물다는 말입니다. 살인하는 사람은 대개 인생을 완전히 포기한 사람이거나, 이성을 완전히 잃어버린, 거의 미친 사람입니다. 아무 연고와 잘못이 없는 22명의 소중한 생명을 죽인 살인마 유영철은 경찰에 잡힌 후에도 여전히 "감옥에 가더라도 두 명을 더 죽이고 싶다"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사람을 물어 죽인 미친개를 몽둥이로 때려죽이면, 마음이 후련하고 앞으로 일어날 수 있는 사고도 미연에 막을 수 있겠지요. 하지만 살인마를 죽이면, 피해자의 마음은 후련할 지는 몰라도, 사고 예방에는 별반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사고를 미리 막으려면, 사고를 저지르는 사람들의 성격과 심리를 치료하고, 이런 사람들이 생겨나는 사회적 환경을 바꾸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죄인도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기회를 주는 편이 낳지 않겠습니까?

말씀이 조금 빗나갔습니다만, 성도가 악한 사람을 용납하고 용서해야 하는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하나님 때문입니다. 욥기를 보면, 하나님은 심지어 사탄도 바로 죽이지 않고 인정하고 그를 사용하십니다. 요한계시록 20장 7-15절을 보면, 마지막 심판의 날에 불신자들과 사탄은 불과 유황의 바다에 던져집니다. 비록 그들이 거기서 영원히 고통을 당할지언정 완전히 제거되거나 멸망을 당하지 않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살인을 저지른 무거운 죄수가 사형을 당하지 않고 종신형에 처해진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도 갱신의 기회를 주시려는 걸까요? 좌우간 하나님은 사탄과 악인도 완전히 제거하시지 않으신다는 말이 됩니다. 물론 성경에는 하나님이 그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허락하시고 용서하신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을 끝까지 제거하시지 않는 이유는 새로운 갱생을 바라시기 때문이 아닐까요? 하나님의 사랑이 더 강합니까? 아니면 불신자와 사탄의 저항이 더 강합니까? 마지막에는 누가 이길 것 같습니까? 당연히 하나님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남을, 아니 모든 존재를, 아니 설령 악한 존재라고 하더라도 그를 용납해야 합니다. 그들이 존재할 이유와 가치를 우리가 부인할 수도 없고, 부인해서도 안 됩니다. 밀림의 성자 슈바이처는 아프리카에서 의료 행위를 할 때, 밤에 하찮은 벌레가 덤벼들어 죽지 않도록 등불을 끄기를 원했다고 합니다. 이 세상에 어떤 존재가 있다면, 분명히 존재할 이유와 가치가 있기 때문에 존재할 것입니다. 왜 모든 존재가 서로 평화롭게 지내지 못하는지, 왜 우리가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고 서로를 짓밟고 죽여야만 하는지, 그 모든 이유와 처방을 완전히 알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세상의 그 어느 것도 하나님의 창조와 허락이 없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모든 존재가 하나님 안에서 새롭게 창조되고 평화롭게 살 날이 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악한 사람이라도 우리는 그를 끝까지 용납하고 용서해야 합니다. 하물며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이요, 그리스도 안에서 친밀한 형제와 자매가 된 성도들을 우리가 어떻게 용납하지 않을 수 있으며, 어떻게 용서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바울은 "주님이 우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우리도 서로 용납하고 용서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남을 용서하는 것은 교회와 사회만이 아니라 개인의 건강에도 참으로 좋습니다. 남을 원망하면, 혈압과 심장 박동이 오릅니다. 울화를 품으면, 스트레스가 더 심해지고, 불쾌감도 급속히 증가합니다. 울화를 품는 것은 장기적인 질환을 일으킵니다. 하지만 용서는 몸의 스트레스를 제거해 주고, 육체적으로, 정서적으로, 영적으로 치유해 줍니다. 프레드 러스킨(강현숙 옮김, 중앙M&B)이 지은 '용서'라고 하는 책은 '용서의 아홉 단계'를 다음과 같이 제시합니다. 1.자신의 느낌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 2.마음이 편해지기 위해 필요한 일은 반드시 하겠다고 결심한다. 3.나의 목표가 무엇인지 이해하도록 한다. 4.고통의 일차적 원인은 내가 당한 공격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상한 감정임을 인정한다. 5.고통스러운 기억을 누그러뜨리도록 노력한다. 6.실현불가능한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7.상처받은 경험만을 끊임없이 생각하는 대신에 긍정적인 목표를 이룰 수 있는 다른 길을 찾아본다. 8.나의 삶을 잘 살아내는 것이야말로 상처에 대한 가장 멋진 복수임을 잊지 말자. 9.용서라는 대담한 결정을 내린 영웅으로서 내가 등장하는 활기찬 이야기를 만들어 본다.

  그런데 남을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은 그 이전에 먼저 자신을 용서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남을 용서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용서해야 합니다. 남보다 자신을 용서하기가 더 어렵다고 합니다. 대개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이유로 자신을 비난하고 자신을 죄책감 속에 가두어 넣게 된다고 합니다. 1.인생의 결정적인 과제를 수행하는 데 실패한 것, 2.꼭 필요할 때에 자신이나 남에게 적절한 도움을 주지 않은 것, 3.남에게 상처를 입힌 것, 4.약물 중독이나 일 기피증과 같은 자기 파괴적인 성향 때문에 자신에게 화를 내는 것. 하지만 우리 자신의 행동조차도 때에 따라서는 우리 힘으로 완전히 좌우할 수 없음을 알 때, 비로소 우리는 자신을 용서할 수 있게 됩니다. 이 세상 누구도 완전하지 않습니다. 누구나 실수를 합니다. 완벽하고자 하는 것은 실행 불가능한 규칙입니다. 우리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기억할 때, 자신을 좀 더 쉽게 용서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부터 너그럽게 용납하고 용서합시다. 그런 후에 이웃 사람들과 성도들을 너그럽게 용납하고 용서하기를 힘쓰십니다. 그리함으로써 우리의 마음이 평안하고 육신이 건강할 뿐만 아니라, 이를 통해 우리 가정과 우리 교회도 늘 평안이 넘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