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서로 기다리라

고전 11:27-34

2004년 8월 22일, 현풍제일교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에게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오늘은 "서로 기다리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오늘의 말씀은 성만찬과 관련하여 바울이 쓴 편지의 한 내용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자기를 살피지 않고 함부로 성만찬을 받는 자들을 경고합니다. 주의 몸을 분별하지 않고 먹고 마시는 것은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행위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행위가 된다는 것입니다. 전반부만을 보면, 회개하지 않고 믿음도 없이 성만찬을 받는 행위를 바울이 나무라는 듯이 보입니다. 하지만 후반부를 보면, 바울이 나무란 이유가 다른 데 있습니다.

먼저 온 사람들이 뒤에 올 사람들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성만찬을 다 먹었기 때문에 뒤에 온 사람들은 성만찬을 먹을 수 없었습니다. 먼저 온 사람들이 배가 고파서 다 먹어 버렸던 것입니다. 이로 인해 교회 안에 갈등이 일어날 것을 염려하여, 바울은 "배가 고픈 사람은 집에 가서 먹고, 성만찬을 먹을 때에는 뒤에 오는 사람을 기다리라"고 말합니다. 성만찬은 일치와 화해의 의식이기도 한데, 먼저 온 사람들이 먼저 성만찬을 다 먹어버리면, 도리어 불화와 갈등을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온 자는 뒤에 오는 자를 기다려 줄 줄을 알아야 한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오늘의 설교의 주제는 '기다림'입니다. 하지만 본문의 의도와는 조금 다른 각도에서 '기다림'이 갖는 영적인 의미를 생각해 보기로 합시다. 저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거시는 분들은 다음과 같은 노래를 들으실 수 있습니다.

 

정답던 얘기 가슴에 가득하고, 푸르른 저 별빛도 외로워라.
사랑했기에 멀리 떠난 님은 언제나 모습 꿈 속에 있네.
먹구름 울고 찬 서리 진다 해도, 바람 따라 제비 돌아오는 날.
고운 눈망울 깊이 간직한 채, 당신의 마음 품으렵니다.
아 그리워라 잊지 못할 내 님이여, 너 지금 어디 방황하고 있나?
어둠 뚫고 흘러내리는 눈물도 기다림 속에 잠들어 있네.
바람 따라 제비 돌아오는 날, 당신의 마음 품으렵니다.    

 

이 노래는 남미의 민속적인 가락에 조영남 씨가 가사를 붙여 유명해진 노래입니다. 제가 이 노래를 즐겨 부르기 시작한 것은 군대에 입대한 후부터입니다. 신병 시절에 밤 점호가 끝난 후 잠자리에 들자, 고참이 나보고 노래를 부르라고 해서 이 노래를 불렀는데, 그 후로 이 노래는 부대 안에서도 유행하게 되었습니다. 이 노래는 멀리 떠난 제비를 기다리는 사람의 심정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노래의 주인공이 애타게 기다리는 것은 제비라기보다는 멀리 떠난 연인입니다. 주인공은 사랑했기에 멀리 떠난 연인이 제비처럼 돌아오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노래의 이름은 제비이지만, 이 노래의 주제는 기다림입니다.

군대에서 제대한 후로도 저는 이 노래를 즐겨 부릅니다. 조영남 씨의 창법을 따라 부르면, 어떤 사람들은 제가 조영남 씨보다 더 잘 부른다고 칭찬하곤 합니다. 제가 조영남 씨를 좋아하는 이유도 바로 이 노래 때문입니다. 제가 이 노래를 자주 불렀기 때문인지 저를 처음 보는 사람들이 제가 조영남 씨와 닮았다고 말합니다. 아마도 외모보다는 분위기가 비슷하게 느껴지는가 봅니다. 우리 집 사람도 가끔 그런 소리를 하는데, 제가 조영남 씨처럼 좀 자유분방하기 때문에 그렇다고 합니다.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만, 제가 조영남 씨와 닮았다는 말을 듣는 이유를 더 깊이 알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만 저는 이 노래의 곡조보다 가사를 더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이 노래의 주제인 기다림은 기독교 신앙의 본질과 너무나 흡사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도 본질적으로 기다림의 종교입니다. 흔히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말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기독교의 사랑보다는 불교의 자비가 훨씬 폭이 넓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사랑만으로는 불교와의 차이점이나 불교보다 뛰어난 점을 드러내기 어렵습니다. 불교에도 기다림의 요소가 없지는 않습니다. 불교인들도 미래에 나타날 미륵불을 기다립니다. 불교인들도 순간적인 깨달음 못지 않게 점차적인 깨달음을 추구합니다.

하지만 기독교만큼 기다림을 말하는 종교는 드뭅니다. 구약성경과 신약성경, 그리고 이 천년 기독교의 역사 동안 믿음의 사람은 항상 기다림의 사람이었습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한 시편 기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 곧 내 영혼이 여호와를 기다리며 내가 그 말씀을 바라는도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의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여호와께는 인자하심과 풍성한 구속이 있음이라"(시 130:5-7). 이 밖에도 기다림을 주제로 삼는 말씀은 셀 수 없이 많습니다. 구약성경에서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끈질긴 신뢰요, 이 신뢰를 바탕으로 한 기다림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약성경도 기다림의 사람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구약의 사람들이 장차 오실 메시아를 기다렸다면, 신약의 사람들은 이미 오신 메시아를 회상하면서 다시 오실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그 후로 기독교인들은 줄곧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려왔습니다. 그러므로 기다림이라는 말을 빼버리면, 기독교는 즉시 죽어버립니다. 기다림이 있기 때문에, 미래의 희망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이 있기 때문에 믿음은 결코 죽지 않으며, 사랑도 끝까지 참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을 보면, 비단 사람만이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도 기다리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세상을 기다리시며, 새로운 사람을 기다리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데 협력할 사람을 기다리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이 회개하고 돌아오길 기다리십니다.

하나님의 기다림은 '탕자의 비유'에서 가장 잘 드러납니다. 아버지는 집을 나간 둘째 아들을 간절히 기다립니다. 둘째 아들이 언젠가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올 것을 알고 기다립니다. 아들을 편히 잠을 자는지 몰라도, 아버지는 집을 나간 아들 때문에 잠을 잘 이루지 못합니다. 방탕한 아들이 언젠가는 꼭 돌아오리라고 믿고, 문 밖에서 서성거리다가 동구 밖으로 나가보기도 합니다. 아버지는 종들을 보내어 아들이 있는 곳을 수소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강제로 끌어오라고 명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렇게 하지 않고, 아들이 스스로 돌아올 때까지 마냥 기다립니다. 이런 아버지가 너무 무력한 아버지입니까? 너무 무책임한 아버지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향해서도 이처럼 항의하였습니다. "하나님, 이 순간에는 직접 개입하셔서 도와주셔야 하지 않습니까? 왜 힘없는 사람들이 고통스럽게 죽어가고 있는데, 악인들이 착한 사람들과 믿음의 사람들을 때리고 죽이고 있는데, 무심히 보고만 계십니까? 아니 하나님은 장님이십니까? 하나님은 귀머거리십니까? 어찌 죄인과 악인을 속히 벌하시고, 의인과 선인을 속히 구원하시지 않습니까? 하나님, 왜 더디 오십니까? 아니 아예 안 오시렵니까?" 정말 기다리시는 하나님은 무능하시고 무책임하신 하나님입니까?

아닙니다. 만약 아버지가 힘이 있다고 아들을 강제로 끌고 왔다면, 아들의 몸은 돌아왔는지 몰라도 아들의 마음은 전혀 돌아오지 않았을 겁니다. 그리고 아들의 자존심은 완전히 망가졌을 겁니다. 짐승은 억지로 끌고 올 수는 있어도, 사람을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억지로 끌고 와 보았자, 또 집을 나갈 것이 뻔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는 편이 낫습니다. 물론 아버지가 아들을 찾아가 눈물로 하소연할 수도 있을 겁니다. 달콤하게 유혹하여 집으로 데려올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버지의 자존심 때문이 아니라 아들이 언젠가 꼭 돌아올 날이 있으리라 굳게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비록 아들이 더 망가지는 한이 있더라도, 아들이 제 발로 돌아올 때를 손꼽아 기다립니다. 그러니 아버지의 마음이 얼마나 더 안타깝겠습니까?

현승용 집사님이 우리 교회 홈페이지에 올리신 글 중에는 '기다림'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이 시는 이렇게 말합니다.

 

다림의 끈만 놓지 않는다면
가다리는 것은 반드시 오리라 믿습니다.
그러나 올 시간이 되었는데도
기다리는 것이 오지 않을 때에도
그다지 실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기다림을 갖고 있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아름다운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이정하의 <내 삶을 기쁘게 하는 모든 것들> 중에서  

 

이 시를 쓴 사람은 기다림은 그 자체로서도 충분히 아름다운 일이므로, 기다리는 것이 오지 않더라도 실망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믿음의 사람의 기다림과 하나님의 기다림은 이와 다릅니다. 믿음의 사람의 기다림은 막연한 기다림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을 믿는 기다림이기 때문에 결코 실망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기다림도 결코 공연한 수고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신실하고 끈질긴 기다림은 결국 우리로 하여금 돌아오게 만듭니다. 해가 지도록 놀던 아이가 부모가 기다리는 줄을 알고, 혹은 자기를 부르는 부모의 음성을 듣고 집으로 돌아가듯이, 하나님을 떠난 사람도 자기를 애타게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심정을 알게 되면, 반드시 돌아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다리듯이,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서로서로 기다려 줄 줄을 알아야 합니다. 기다림은 다른 사람을 배려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른 사람의 행동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운다는 것을 말합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교회 안에서 우리는 서로를 받아들이고 기다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내가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는 생각도 버려야 합니다. "남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생각도 버려야 합니다. "무엇이든지 빨리 해야 하고, 누구보다도 먼저 해야 한다"는 생각도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께서도 일하실 수 있습니다. 그래야만 다른 사람들도 일할 수가 있습니다. 좀 더디더라도, 좀 답답하더라도, 아니 좀 손해를 보더라도, 이제는 좀 기다리는 법을 배웁시다. 우리가 우리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생각보다 상당히 적습니다. 인생의 많은 부분을 우리를 기다림으로 채워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우리가 서로를 위해 조용히 기도하고, 조용히 기다리는 법을 배웁시다. "서로 기다리라"고 말한 바울은 '사랑의 찬가'에서도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은 ...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1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