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를 향한 성청의 과제

성청 신년금식수련회 주제강의

12. 31, 9:00-11:00(P.M.)  충주제일기도원

 
이신건

 

 들어가는 말

본인은 미래학자가 아니다. 그래서 21세기가 우리의 미래를 어떻게 바꾸어 놓을 것인지에 대해 본인이 세세한 정보를 줄 능력도 없거니와 그럴 필요도 없다. 그러나 본인은 기독교 신앙에 근거한 희망의 신학자이다. 희망하는 자는 당연히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인지 미리 앞당겨 생각하고 그 미래를 현실 한복판에서 꿈꾸고 실험해 본다. 그런 의미에서 미래는 본인의 중요한 본질적인 관심사이다. 아니 미래는 결코 미래학자나 신학자만의 관심사가 아니라 우리 인류 전체, 아니 신앙인 전체의 중요한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본 주제에 들어가기 위하여, 그리고 본 주제를 적절히 다루기 위하여 본인은 21세기가 인류와 한국사회 그리고 교회를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지 그 큰 줄기라도 파악해 보고, 그것을 토대로 삼아 성청의 현주소, 성청의 미래, 미래의 성청의 과제를 본인 나름대로 제시하려고 한다.

A. 세기의 전환

21 세기는 2000년대로 접어드는 거대한 연대기적 전환(크로노스적 전환)이라는 의미에서 그것은 큰 의미를 갖는다. 단지 수량적으로 세기의 전환을 경험하는 것으로도 우리는 쉽사리 흥분에 휩싸인다. 특히 2000년대를 중심으로 잡아 지구의 종말, 재림 등을 예고하는 온갖 점술가들, 종말론자들의 음울한 소리들은 때로는 사이비적 종교적 열성을 부추기고, 때로는 지구멸망을 준비하거나 방지하기 위한 몸짓을 유도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적으로는 다시금 시한부 종말론에 대비하는 건전한 종말론-역사관의 준비가 있어야 하겠고, 사회적으로도 심리적 공황상태가 오지 않도록 준비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21 세기가 가져오는 전환은 단지 연대기적인 전환만은 아니다. 이 전환은 새로운 문명, 새로운 생활, 새로운 사고의 패러다임을 가져오는 거대한 전환(카이로스적 전환)이 될 것이다. 이 새로운 물결은 이미 우리의 삶의 문지방 아니 안방까지 밀려오고 있다. 이 제 3의 물결은 과거의 물결에 비해 그 속도나 질적인 도약에서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급격한 것이기에, 그야말로 21 세기에는 대단한 정신적인 각오가 요구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21 세기가 가져올 변화의 내용을 세세히 다 이해할 필요는 없다. 단지 우리의 주제와 관련하여 변화의 큰 맥만을 집어 보기로 하자.

1. 자본주의적 생활방식의 확산

국가사회주의(공산주의)적 사회체제의 붕괴는 자본주의적 사회체제가 상대적으로 우월하고 지속적일 것임을 보여 주었다. 아직 '역사의 종말'을 다 경험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마치 '자본주의'가 인간이 실험해 본 체제 중에서 가장 궁극적이고도 최선의 체제임을 주장하고, 이런 의미에서 역사는 종말에 이르렀다고 성급히 단언하기도 한다. 우리는 역사의 종말을 완전히 예견할 수 없다. 그래서 자본주의가 영원하리라고 언제나 믿고 살 수는 없다. 그리고 교과서적인 하나의 자본주의는 그 어디에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 체제도 끊임없이 수정되고 변화되는 가운데서만 존재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 체제의 상대적 우월성 때문에 지구촌의 모든 공동체들은 서둘러 이 체제로 변화하고 있으며, 이리하여 전 지구적 생활망이 신속하게 짜여지고 있다.

확실히 자본주의 체제는 인간과 기업의 자유, 창의를 드높이고, 그래서 공산주의 체제보다 더 유연하고도 건강한 체제임을 입증해 보였다. 이제 인간의 자유와 개성을 억압하고 말살하고서도 건강할 수 있는 체제는 그 어디에도 없다. 확실히 자본주의는 이러한 장점을 갖고 있고, 그래서 혁명적으로 전복될 가능성은 전 지구적 차원에서는 아마도 거의 없을 것이다. 민주주의는 정치, 경제에서만이 아니라 사회 전반에서 인간적인 제도로 입증되고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잠정적 승리와 그 발전은 상대적으로 인간의 평등, 박애, 사회적 연대를 크게 해치고, 인간 간에 무한한 경쟁을 촉구할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인간의 사고와 행동을 물(질주의)화할 것이고, 그래서 "돈이면 제일이라"는 황금숭배사상을 낳아서 인간성과 윤리의 추락, 쾌락주의를 더 부추길 것이고, 더 나아가 지금도 심각하게 오염된 지구를 더 망가뜨려서 인류의 파괴, 아니 생태계의 파괴를 통해 지구의 종말을 앞당길 수도 있다.

# 성서적으로 , 자본주의도 공산주의도 기독교의 이상적 사회체제일 없다. 기독교의 희망은 하나님의 나라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의 아래서 체제의 장점을 수용하고 단점을 극복할(그리고 통일될 미래의 한국사회에 유용한) 이상적인 공동체의 비전을 제시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대개의 한국교회는 일방적으로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있는 실정이다. 그러므로 대개의 한국교회는 피동적으로 사회의 변화에 이끌려 것이다. 즉 교회는 미래의 세대에게 물려 이상적인 지구 공동체의 비전이 없이 그때마다의 현상에 적응하며 교회성장과 선교에 급급할 것이다. 그러므로 기성교회에 문제의 해결을 기대하기보다는, 미래사회의 주역이 청년 여러분이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를 준비하고 앞당기려고 노력해야 한다. 무한한 자본주의의 발전은 에너지 자원을 고갈시키고 자연을 오염시킬 뿐만 아니라 인간과 모든 생명체들을 멸종시킬지 모를 일이다. 자유와 경쟁, 창의와 발전도 좋지만, 자연의 무한한 착취, 인간의 존엄성 상실, 물신숭배주의를 감수할 수는 없는 것이다.


2. 정보사회의 확산

자본주의적 생활방식의 전 지구적 확산은 정보사회를 앞당기고 또 이것의 영향에 의해 크게 촉진되고 있다. 지식-정보사회는 앨빈 토플러가 말하는 대로 제 3의 물결의 중심이다. 그에 의하면 정보사회가 도래하면, 권력의 중심은 이제 정보로 움직인다고 한다. 돈이나 물리력보다 이제 정보가 인간 사회를 지배하리라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정보민주화가 민주주의적 생활방식을 조장하고 촉진한다. 과거의 권위주의적, 수직적, 종적인 생활방식은 횡적인 정보망을 통하여 평등주의적, 수평적, 횡적인 생활방식으로 변한다. 정보사회는 정보를 분산하고 공유함으로써 또한 권력의 분산과 공유, 생활방식의 수평화, 평등화에 크게 기여할 것이다.

물론 정보독(과)점과 거대한 정보기업의 출현은 정보권력도 독점하거나 불균등화할 것이다. 그러나 정보를 둘러싼 치열한 자유경쟁은 일반적으로 정보를 더 빨리 확산시키고, 그래서 정보의 민주화에 더 기여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지구촌은 더 좁아질 것이며, 세계시민주의 사회의 도래가 앞당겨질 것이다. 이리하여 생활의 세계화는 '초인류'(샤르댕)의 등장을 더욱 더 앞당길 것이다.

그러나 정보사회는 개인의 비밀, 인권을 침해하거나 범죄와 타락상을 더욱 확산시킬 수 있다. 그리고 거대한 정보사회의 획일적 생활방식은 개성과 주체성을 상실시키고 인간의 다양한 개성과 민족 고유의 문화를 억압하거나 말살시킬 수 있다. 정보사회가 다양성 속의 인류의 일치를 촉진할 지 아니면 인류의 다양성을 억압하는 획일성을 촉진할 지는 아직 불분명하다고 할 수 있지만, 후자의 가능성이 더 커진다면, 결코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권력이 평등하게 분배되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인간의 개성이나 민족의 문화가 평준화되거나 획일화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이다.

# 정보사회는 교회와 신앙의 양태를 크게 바꾸어 놓을 것임이 분명하다. 제 2물결로 인하여 도시화, 산업화 등의 급격한 변화가 이루어졌듯이, 제 3 물결은 이보다 급격히 미래의 생활방식을 바꾸어 놓을 것이다. 아니 이것은 단지 생활방식만이 아니라 생활 자체, 사고와 생활구조를 크게 변화시킬 것이다. 이에 교회는 준비하고 대비해야 하겠지만, 또 교회가 이러한 시류를 타고 흘러가기보다는 이를 주도하거나 거슬러 가면서 기독교적 문화형성에 앞장서야 하겠지만, 부분에서도 교회의 주도성은 미약하고 오히려 사회의 변화가 교회개혁과 교회갱신을 크게 주도하리라고 여겨진다.

청년은 미래를 맞이하기 위해 가장 시급한 준비를 해야 것인데, 바람직한 정보사회의 선도와 활용은 교회 내외에서 청년의 역량, 비중을 드높이고, 민주적 참여의 가능성을 드높이기 때문에, 미래사회는 청년에게 유리한 입지를 마련해 것이다. 단지 정보사회로 인한 교회출석률의 저하가 청년 공동체에도 불리한 영향을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교회중심적이면서도 생활 전체를 통괄하는 새로운 정보망의 구축을 통하여 교회 공동체의 활성화에 기여하는 청년운동을 키워 나가야 것이다.

3. 과학혁명의 주도

자본주의 혁명(골비쳐), 정보혁명과 더불어 오늘 날 현대인의 사고와 생활에 혁명적인 전환을 주도하는 것은 바로 과학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 날 눈부시게 발달하는 과학은 자본주의 사회와 정보사회를 촉진하는 중요한 원동력이 되면서도, 현대인의 사고와 생활에 가장 강력한 영향을 끼치는 요인이 되고 있다. 과학은 과거의 인간이 감히 상상할 수 없었던 영역 즉 대우주와 소우주(유전자, 원자물리학)의 영역을 해명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인간의 시야와 관심을 엄청나게 넓혀 놓았을 뿐만 아니라 현대인의 세계관에 지대한 영향을 주고 있다. 과학이야말로 미래를 주도하는 가장 강력하고도 유일한 혁명의 주역이 되고 있다.

이로 인해 과거의 생활방식만이 아니라 인류의 사상, 세계관도 변화를 겪게 되었으며, 종교도 이제 새로운 과학적 패러다임에 대응하지 못하면 낡아 버린 종교로 도태될 수도 있다. 물론 과학이 발달해도 여전히 신비의 영역은 남아 있기 때문에, 과학의 발달이 종교의 후퇴를 가져오기보다는 오히려 종교를 더 조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제도화된 건전한 종교의 경우에, 종교의 패러다임이 과학의 패러다임과 잘 맞지 않는다면, 현대인, 특히 청년들에게 점점 더 외면당하기 쉽다. 이처럼 과학은 낡은 학문과 기술만이 아니라 낡은 세계관과 종교까지 도태시키거나 변혁시키는 혁명의 '블랙 홀'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과학의 오용에 의한 인간성 상실과 파괴, 하나님을 무시하고 스스로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하는 인간의 바벨탑 문명 건설, 생명과 지구환경의 엄청난 파괴의 가능성 등의 문제가 과학혁명이 가져다 줄 수 있는 부정적 폐해와 현대문명의 위기이다. 그러나 과학의 이러한 위험을 잘 다스리고, 과학을 인간과 환경을 유익하게 하는 방향으로 통제할 수 있다면, 과학은 그 어떤 것보다도 현대와 미래를 변화시켜 줄 가장 강력한 물결이 될 것이다.

# 이러한 과학혁명 앞에서 교회는 어떠한 태도를 보이고 있는가? 물론 교회도 과학기술은 최대한으로 활용하려고 것이다. 그러나 특히 한국 기독교의 교리와 신학체계는 매우 낡은 신화적, 헬라철학적, 샤머니즘적 세계관에 입각해 있으며, 과학혁명의 엄청난 파고를 전혀 의식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그리하여 한국교회는 급격히 늙어 가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청년은 다시금 자신의 신앙과 신학을 현대인에게 변증할 있도록 재확립해야 도전을 받고 있고, 이것도 주로 청년이 추구하고 해결해야 과제로 남아 있다. 종교를 무시하는 과학은 장님이지만, 과학을 무시하는 종교는 절름발이다. 과학과 무관하게 신비와 기적, 축복을 추구하는 종교는 비교적 단순한 사람들에게는 호소할 있겠지만, 미래의 세대들에게는 절름발이처럼 미래를 인도하는 역할을 수는 없을 것이다.

B. 한국사회의 전환

앞에서 거론한 세계의 세기적 변화를 맞이하는 한국사회도 그 어느 시대보다도 더 큰 변화의 격랑을 타고 있다. 개혁이라는 말이 사회 전반에서 사용되는 중요한 중심용어가 되고, 심지어 혁명이라는 말까지 사용되는 정도이다. 그만큼 우리도 빨리 변해야 한다는 절박한 의식이 생활 깊숙이 자리잡고 있다. 한국이 유엔에 가입하고 비상임이사국과 세계무역기구의 일원이 된 것은 세계화의 중요한 전기가 되었다. 우리도 이제 세계적 국가로 발돋움하면서 세계시민을 키워야 한다는 의식을 갖게 되었다. 그러므로 세계의 변화는 한국의 변화를 촉구하고 선도한다. 그런 만큼 지금의 한국사회의 변화는 세계변화와 맞물려서 이루어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둘을 따로 떼어서 말할 수는 없지만, 한국에서 특기할 만한 두 가지 변화를 말하고 싶다.

1. 역사적 과거청산

한국사회는 지금 대단한 전환을 경험하고 있다. 전직 대통령 두 사람이 군사반란죄, 내란죄, 뇌물수수죄로 구속되어 재판받는 사건은 민주헌정의 수립 후 처음 이루어지는 일이다. 그와 함께 그 동안 경제질서의 왜곡, 부실공사, 대형참사 등의 원인이었던 기업주들의 뇌물증여죄가 단죄받는 것도 대단히 예외적인 일이다. 대단히 비정상적인 죄악과 부패임에도 불구하고 역사심판이나 관례라는 이름 하에 덮어놓았던 것을 드러내는 현 정부의 의도가 어디에 있든 간에, 그 동안 줄기차게 요구해 온 백성 특히 교수와 종교계, 재야의 목소리를 수용한 것은 그 동안 억눌러 왔던 민족정기의 회복과 사회정의의 실현에 크게 기여하는 일이다. 이 사건은 기회주의적 출세와 부정과 불의를 통한 권력장악과 축재를 이제는 더 이상 허용할 수 없다는 백성의 결연한 의지의 소산이자, 민족사의 크나큰 분기점이 아닐 수가 없다.

물론 과거청산과 역사를 바로 세우는 혁명이 얼마나 지속적으로 그리고 광범위하게 이루어질 지는 아직 대답할 수 없다. 또 이 일이 김영삼 대통령의 각본과 여당의 이해, 당파 간의 당리당략에 의하여 왜곡될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다. 하지만 6, 29 선언처럼 굴절된 역사의 청산도 어디까지나 백성의 피와 땀으로 일구어 낸 것이지, 일개 대통령의 구국적 결단은 아니다. 그러므로 정의와 진리, 법과 양심에 기초한 새로운 한국사회의 창조는 이제 그 누구의 힘으로도 되돌려 놓을 수 없는 도도한 역사의 물결이 되었다.

# 역사를 바로 세우는 일에 보수적이던 교회들과 학자들이 대거 참여한 것을 보면, 일은 김수환 추기경의 말대로 하나님의 섭리인 것같다. 불의는 정의를 영원히 이기지 못하고, 거짓은 진실을 영원히 가리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 주는 이번의 사건은 한국의 근대사에서 다른 어떤 사건보다 자랑스럽고 감사할 일이다. 다만 아쉬운 것은 이번에 우리 교단에서 서울신학대학교의 대다수의 교수들과 학생들 그리고 성청이 5,18 불기소에 항의하는 입장을 밝혀서 새로운 역사창조에 기여했지만, 장 감 성 3 교단을 자랑하는 우리 성결교회가 장로교와 감리교에 이어서 공식적으로 혹은 집단적으로 입장을 밝히지 않고 그냥 방관한 것은 역사에 부끄러운 일이다. 지금까지 성결교회가 한국사에서 이렇다 만한 역사참여를 일이 전무한 실정에서, 하나의 하나님의 섭리와 같은 절호의 기회를 놓친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우리 교단 내외에서 일어나는 숫한 사건들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정의를 바로 세우고 앞당기는 일을 거의 하지 못하는 우리 교회의 현실을 직시하면서 청년 여러분에게 부탁하고 싶은 말은, 떳떳하고 당당한 성결인으로서 역사에 이끌려 것이 아니라 이를 앞서 가며 선도하는 예언자적인 모습을 갖추기를 부탁하며, 다소 현실이 실망스럽고 힘겹더라도 우리 교회를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으로 그리고 희망을 버리지 말고 우리 교회와 사회를 정의롭게 세우는 일에 주역이 되어 주기를 간곡히 부탁한다.

2. 시민사회의 성숙

한국사에서 간과할 수 없는 최근의 중요한 전환적 사건은 바로 기초민주주의인 지방자치가 본격적으로 뿌리내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권력의 집중과 편중이 가져온 독재와 억압, 착취와 불평등을 제거하고 백성에 의한, 백성을 위한 그리고 백성의 정부를 세우려는 국민의 노력이 비록 미약하나마나 이루어지기 시작했다는 것은 우리의 사고와 생활에 많은 변화를 줄 것이다. 이제는 더 이상 권력자와 돈 많은 자의 눈치를 보고 사는 사회가 아니라, 모두가 주인의식을 갖고 자신의 결단과 선택으로 다함께 이루어 가는 사회를 추구하는 일은 인간다운 민주적인 사회를 건설하는 일에 필수적인 일이다.

물론 서구의 앞선 기초민주주의에 비하면, 아직도 우리 사회의 기초민주주의는 아직도 어린이 걸음마를 걷는 상태에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아직도 사회 전반에 민주와 참여의 정신이 구현되기에는 너무나 부조리하고 부패한 부분이 많이 남아 있다. 그러므로 진정한 시민민주주의의 발전은 많은 시간을 요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제 권력의 우상으로부터 본격적으로 해방되어 새로운 민주사회를 일구어 가는 시대적 전환에 서 있다. 이제 우리의 생활과 의식은 민주적이고도 평등한 시민적 사회를 향해 줄기차게 변해 갈 것이다.

# 한국교회는 얼마나 민주화되었는가? 교회 안에서 어린이, 청년, 여성, 가난한, 힘없는 자의 목소리가 얼마나 반영되고 있는가? 우리 성결교회의 현주소는 어떠한가? 시민-기초민주주의의 도래에 걸맞은 갱신과 변화를 이루어 가고 있는가? 이번의 성결교회 헌법개정의 과정에서 얼마나 민주적 정신이 반영되고 민주적 절차가 존중되었는가? 많은 발전이 이루어졌다고 믿지만, 헌법개정의 과정에 청년과 평신도, 젊은 목회자의 의견이 얼마나 반영되었는지, 다른 교단에서 허용된 여성안수는 무시되었는지, 폭넓은 성도들이 다양하게 참여할 있는 선교-봉사-교육의 영역이 마련되었는지? 등을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특히 청년인 여러분은 성결교회가 여러분의 미래를 위해 얼마나 많이 투자하고 준비하는지, 여러분의 잠재력을 얼마나 키워 주고 참여의 기회를 열어 놓고 있는지, 눈 여겨 살펴보고, 여러분 나름대로의 대안을 추구하는 일에 노력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C. 한국교회의 전환

교회도 망망대해 한 복판에 있는 고고한 섬이 아닌 이상 세계와 한국사회의 변화를 겪을 수 밖에 없고, 어떻게 보면 기존체제에 순응한 그 만큼 그 체제의 변화와 함께, 아니 이보다 더 큰 변화를 겪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교회의 변화는 단순히 사회변화의 결과만은 아니다. 교회가 신앙하는 바로 하나님 자신이야말로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분이라는 점을 고백할 때, 우리는 이 변화의 한 복판에 이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그러므로 변화를 거부하는 순수한 보수주의자는 하나님에게 대항하는 자일 것이다. 그래서 사회가, 그리고 사회를 통하여 하나님이 지금의 한국교회를 어떻게 변화시키시는지, 잠시 우리의 주제를 돕기 위해 살펴보기로 하자.

1. 양적 성장감소

한국교회가 양적으로 급성장하게 된 요인이 많지만, 그 중에서 중요한 요인의 하나는 한국인의 전통적인 기복신앙과 급속한 자본주의의 발달이 맞아떨어진 데서 찾아 볼 수 있다. "잘 살아 보세"라는 새마을운동의 구호는 "예수 믿고 복받아 보세"라는 신앙구호와 함께 지난 20 여년의 한국인의 심성을 지배했다. 그래서 가난의 한을 품은 사람들이 공장과 도시로 몰렸듯이, 성공과 축복에 목마른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 왔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 사람들이 잘 살고 나서는 교회를 등한시하게 되고, 이제 더 이상 신앙을 절실하게 필요로 하지 않게 되었다. 물론 경제적으로 부유한 나라일수록 교인이 줄어드는 것은 세계적으로 보편적인 현상이라고 한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교인의 급격한 감소현상은 바로 교회가 직접 거두어들인 자업자득이다. 신앙이 복받기 위한 수단이기 때문에, 복받고 난 후엔 신앙이 소용없게 된 것이다. 물론 물질적으로 잘 살아도 정신적, 심리적 불안 때문에 여전히 교회를 찾는 사람들은 항상 존재하겠지만, 교회가 주로 물질적 축복을 받기 위한 수단으로서 신앙을 강조해 왔기 때문에, 물질적 축복을 받은 사람들은 이제 서서히 유흥거리를 찾아 나서기 마련이다.

한 편으로는, 교인의 양적인 감소가 경기가 과열된 후에 빠져나가는 거품처럼 껍데기 교인을 걸러 내는 건전한 과정일 수도 있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는 이런 양적인 감소를 질적인 성장으로 연결시키지 못한다면, 한국교회는 장차 영락할 운명에 빠질 지도 모른다. 문제는 과연 한국교회가 갑자기 질적인 성장 내지 도약을 할 수 있겠느냐에 있는데, 교회의 체질변화가 그리 쉽지 않으리라고 본다. 지역사회 선교나 문화선교 혹은 다원선교 등에 교회의 힘을 돌리고, 미래의 주역인 어린이와 청년을 위해 과감히 투자하는 것이 그러한 체질변화라고 할 수 있는데, 지금의 상황을 보면, 대다수의 교회는 여전히 전통적인 기복신앙과 선교형태에만 머물러 있다. 한국교회는 지금 갈림길에 서 있다.

2. 해외선교 경쟁

한국교회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영적, 물질적 축복을 자신만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해외선교를 위해 사용하는 것은 매우 아름답고 바람직한 일이다. 우리 교단만 해도, 해외선교비가 총회예산보다 더 많다고 한다. 지금도 많은 교회들이 앞다투어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으며, 세계 방방곡곡에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애를 쓴다. 세계선교에서 한국교회가 담당해야 할 비중이 날로 커지기 때문에, 해외선교는 교회가 감당해야 할 중요한 임무의 하나로서 늘 강조되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교파 간의 경쟁적 선교파송은 이전의 경쟁적 교회설립의 재판(再版)을 보는 것 같다. 그리고 "무조건 선교사를 보내고 보자"라는 식의 단기적, 즉흥적 선교정책은 선교효율을 심각하게 떨어뜨린다. 그리고 외국의 교회처럼 해외선교의 열기는 국내선교의 퇴조를 반영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극복하려는 안간힘일 수가 있어서, 오히려 한국교회의 질적, 장기적 성장에 투자할 힘을 해외에서 탕진할까 두렵기도 하다. 국내선교의 건실한 바탕 위에서만 건실한 해외선교도 가능하리라 보아서, 지금은 과다한 단기적인 해외선교의 열기를 차분히 식히고, 자신을 되돌아 볼 필요도 있다고 보여진다. 자신이 있고서야만, 남도 위할 수 있지 않겠는가?

3. 새로운 종교개혁의 필요성

질적 성장과 자신의 점검은 회개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한국교회가 양적 감소에 초조해 할 것이 아니라 그 전에 진정한 복음적 영성을 되찾고 교회의 권위를 되찾아야 한다. 그러자면 과거의 잘못된 관행으로부터의 과감한 탈출과 과거의 죄를 회개하는 진지한 자성의 몸부림이 있어야 한다.

한국의 초대교회는 민중을 계도하고 구습을 타파하며 민족의 진로를 염려하고 역사에 책임을 지려는 진지한 예언자적 모습을 갖추고 있었고, 그래서 불신자들의 존경과 기대를 받았다. 그러나 일제의 압제정책과 선교사의 비정치화의 시도가 이런 교회를 되돌려 놓아 오로지 개인구원과 내세소망, 교회성장만을 목적으로 삼는 이기적 영성을 심어 놓았고, 이것을 '순수한 복음'이라는 포장으로 씌어 놓았다. 그리고 현란한 포장이 마치 허실한 알맹이와 똑 같은 것처럼 위장해 놓았다.

그리고 해방 후에는 점차 기득권에 영합하여 교회성장에만 급급한 나머지, 교회의 양적 성장은 이루었지만 그 반대급부로 교회의 도덕적 권위의 상실, 이단과 사이비 종파의 난립, 역사에 대한 책임감과 영향력 상실 등 부정적인 현상을 낳았다. 아니 거꾸로 범죄와 부패 사건이 터질 때마다, 기독교인이 거기에 있었다. 교회와 교인의 수가 증가하면, 범죄와 부패는 감소해야 할텐데, 오히려 그 반대였다. 그 만큼 교회는 세상적, 물질적 축복이라면 불의와 부패의 행동도 축복해 주고, 그것에 면죄부를 발부해 준 셈이었다. 아니 부패한 중세교회처럼 부패의 면죄부를 팔아 교회를 증축한 셈이었다.

이제 잘못된 정치와 경제가 단죄받고 있는 현실에서, 이를 이용하여 배불린 언론과 종교만은 마치 의인이나 되는 것처럼 오히려 비난하기에만 열을 올린다. 특히 회개는 기독교의 본질적 핵심이고 기독교인의 주요 상표가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사장적인 백성인 교회가 남의 죄만을 들추는 데는 용감하고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데는 비겁하다. 한국교회가 진정 거듭나지 않는다면, 한국사회를 이끌어 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회개하라고 외칠 자격도 없다. 이래 가지고 어떻게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고 그분의 정의를 실현하겠는가? 예수님은 이것을 먼저 구하라고 하셨는데, 교회는 어느 사이에 이방인이 되어서 아직도 물질적 복을 먼저 구하는 것은 아닌가? 정말 하나님 대신에 물질을 섬기고, 민중의 아픔을 감싸는 대신에 권력자에 아부하여 배불린 한국교회가 과감하게 회개하고 각성하지 않는다면, 질적 성장과 도약은 커녕 하나님에게 버림받을까 두렵다. 글을 못 읽는 문맹, 컴퓨터를 사용할 줄 모르는 컴맹은 그다지 심각하지 않겠지만, 역사를 읽을 줄 모르는 장님, 아니 눈을 떤 자조차 구덩이로 인도하는 장님은 모두를 다 망하게 하지 않겠는가? 적이 내부에까지 침투한 것도 모르고 단잠에 빠져 있는 파숫군은 자신과 백성 전체의 생명을 망치게 하지 않겠는가? 한국교회는 내부로부터만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회개해야 한다는 강력한 요구를 받고 있다.

D. 성청의 전환

이제 우리는 앞의 세 영역의 전환을 전제로 삼아서 성청이 당면한 전환의 과제를 설명하기로 하겠다. 그렇게 하기 위하여 먼저 성청의 현주소를 간략하게 진단하고, 성청의 미래적 과제를 제시한 후, 그 구체적 대안을 제안해 보기로 하겠다.

1. 성청의 현주소

1) 양적 감소

한국교회의 일반적인 추세처럼 성결교회에서도 어린이와 젊은이의 숫자가 급격히 감소하고 있는 현상은 바로 성청의 현황과도 직접 연관되어 있는 문제이다. 그 원인을 여기서 일일이 열거할 수는 없지만, 크게는 자연적인 감소와 청년의 교회이탈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이다. 인구감소와 교인의 증가둔화 등이 자연적인 감소의 요인일 것이고, 청년에 대한 기성세대의 관심부족, 시대적 환경(유흥산업, 대체집단의 증가 등)과 정신적 지형의 변화(사회적 이데올로기의 불투명한 혼재현상, 종교적 가치와 권위의 상실, 신앙의 필요성 감소, 물질-출세문화 등) 등이 교회이탈의 요인일 것이다. 그래서 개 교회의 청년의 감소는 바로 성청운동의 양적 역량의 감소로 이어진다.

2) 청년운동의 약화

교회 내의 청년의 감소는 바로 청년운동의 약화로 이어지고, 청년운동의 약화는 또 청년의 감소를 부채질한다. 개 교회마다 청년운동의 역동력이 다르겠지만, 분명히 전반적으로 청년운동은 퇴조하는 듯이 보이고, 그래서 성청운동도 많이 위축된 것 같이 보인다. 더욱이 일반 사회에서는 청년의 역량이 최대한도로 발휘되도록 유도되고 촉진되고 있는 반면에, 교회 내에서는 여전히 유교의 권위주의적, 폐쇄주의적 문화가 강하게 자리잡고 있어서, 청년이 설 자리를 빈약하게 만든다. 교회 내에서 청년은 아직도 주변적, 보조적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교회의 의사결정과 미래투자의 우선순위에서도 늘 뒷전으로 밀려난다. 이러한 가운데 청년회 혹은 대학생회는 나름대로 청년을 결집시킬 마땅한 방도를 찾지 못하고, 관행에 쫓아 무기력하게 활동하고 있는 듯하다.

3) 교단과 개 교회의 청년선교, 교육정책 미비

청년운동의 약화의 내부적 요인은 무엇보다도 사회변화와 청년의 심리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교단과 교회의 빈약한 관심과 투자에 있다고 아니 할 수 없다. 청년이 미래의 사회와 교회의 주역인데도 당장 교회에 기여하는 면이 적다고 그런지, 청년회와 대학부에 지원하는 재정은 빈약한 대신에 과다한 교회봉사를 요구하고 있다. 청년이 살아 있는 다음에야 비로소 그에게 봉사도 기대할 수 있건만, 사실 교회는 청년에 대한 지원보다는 교회봉사를 더 요구하고 있다. 그리고 교단적으로 보더라도, 청년에 대한 투자와 교육정책, 교재개발 등은 매우 미흡한 대신에, 청년운동을 마치 위험한 집단놀이 정도로 생각하고 가급적 행사를 자제시키는 경향을 뚜렷이 보여 주고 있다. 이것은 청년을 의젓한 교회의 한 주체적 성원으로 보지 않고 있다는 증거이다. 외부적 요인에 이런 내부적 요인까지 겹쳐 오늘 날 성청운동은 매우 침체되어 있음은 성결교회의 미래를 위해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4) 성청의 정체성, 적합성의 위기

그렇지만 성청운동의 약화를 남의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 동안 성청이 이러한 허약한 사회적 토대 위에서라도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변화된 상황에 적응하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도 냉철하게 점검해 보아야 한다. 성청이 과연 아직도 존재할 이유와 가치가 있는가? 그리고 이 이유와 가치를 교회와 교단의 지도자, 성청회원에게 얼마나 주지시켜 주었는가? 성청이 교회와 교단 안에서 확고히 자리잡기 위하여 얼마나 몸부림쳐 왔는가? 이와 같이 성청의 정체성과 적합성의 위기를 극복하고 올바른 자리매김을 하기 위하여 새로이 출발해야 한다. 자신의 가치와 의미를 되찾고 새롭게 시작하기 위하여 스스로 반성해야 한다.

2. 성청의 미래적 과제

위와 같은 성청의 현황의 토대 위에서 성청운동의 위기를 극복하고 다가오는 21세기를 준비하기 위하여 성청이 감당해야 할 미래적 과제가 무엇인지 개괄적으로나마 제시하고자 한다.

1) 새로운 성청운동 패러다임(모형)의 창출

성청이 새롭게 출발하기 위해서는 관례적인 성청운동의 모형(패러다임)을 점검하고 장단점을 분석한 후에 새로운 모형을 창출하기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 구태의연한 사업, 지도부 중심의 독단적 결정, 대다수 청년의 요구를 읽지 못하는 그릇된 관행, 시대에 뒤지는 행사 등을 없애고, 참신하고 역동적인 성청운동의 모형이 무엇인지를 모색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해외교회의 청년운동도 참관하고 타 교회의 모델 등을 적극 참조하면서 늘 배우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2) 교회의 민주화와 교회 내의 참여확대

성청운동의 자리와 출발점은 교회이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교회를 위하는 마음을 갖고서 성청운동의 미래를 걸어야 한다. 그러자면 성청은 교회의 정회원으로서 교회의 의사결정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자신의 목소리를 내도록 힘써야 한다. 이것은 오직 교회의 민주화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청년의 위상이 의존적이고 보조적인 것에서부터 주체적이고 참여적인 것이 되도록 각 교회 안에서 노력해야 한다. 자신의 교회 안에서 이미 힘을 잃어버린 청년이 어떻게 결집된 힘을 발휘할 수 있겠는가? 청년은 스스로 미성숙한 그리스도인이라는 자의식을 버리고 미래의 성결교회의 주역으로서 비전을 그리고 힘을 모으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3) 새로운 신앙적 영성의 확립

새로운 운동의 모형창출과 교회참여는 새로운 신앙적 영성의 확립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지엽적 전략이나 흉내보다는 신앙의 역동성을 청년 각자의 마음 속에서 불러 일으켜야 하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효과적인 운동(기도운동, 부흥회, 신학강좌, 연구 세미나, 공청회 등)을 일으키면서 성결교회적인 영성을 살리면서도 이를 보편적인 영성으로 승화시켜 나가야 한다. 즉 전통적 영성을 사랑하면서도 사회적, 역사적 영성만이 아니라 오늘 날 시급히 요청되는 우주적 영성까지 통합하는 새로운 미래적 영성을 확립하려고 노력할 때, 성청은 진정한 영적인 역동성을 살려 나갈 수가 있을 것이며, 소외된 많은 청년을 끌어안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3. 구체적 대안제시

1) 성청에 의한 여론형성

앞의 제안사항을 효율적으로 실천하기 위하여서는 무엇보다 먼저 여론조사를 하고 여론을 확산시키는 항존기구를 성청 안에 두어야 한다. 그리하여 성청이 교단 내에서 선한 여론을 주도하고 미래적 대안을 형성하는 세력으로 부상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오늘 날의 정보사회의 도구를 최대한으로 활용하는 방안이 좋을 것이다. 컴퓨터 성청통신망을 갖추어야 하겠고, 컴퓨터의 보급과 활용에 앞장서야 한다. 컴퓨터에 토론과 여론을 위한 방을 개설하여 늘 열어 놓고 대화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아직 시간과 돈이 들어가겠지만, 언젠가 그런 날이 오리라고 기대하고 앞장서서 준비해야 한다. 민주적인 힘의 효율적 결집만이 성청의 정당성과 역동성 그리고 밝은 미래를 가져다 줄 것이다.

2) 성청에 의한 신앙, 신학형성

신앙은 물려받은 것이다. 그러나 전통이 죽은 전통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물려받은 전통을 끊임없이 오늘의 삶 속에서 고백하고 전승하는 작업이 꼭 필요하다. 성결교회는 물려받은 신학전통도 약할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의 신앙고백도 매우 빈약하다. 그래서 늘 남의 뒤를 따라가며 모방하기에 급급하다. 성결교회신학의 형성은 기성세대의 몫이겠지만, 여러분은 나름대로 성청헌장, 성청신앙고백, 성청의 신학선언 등을 작성하여 오래도록 청년운동의 지표가 되도록 하는 일에도 힘써야 한다. 신학은 결코 공리공론이 아니라 실천을 규정하고 이끌어 가는 원리요 원천이다. 그런 의미에서 성청이 성결교회사에서 오래오래 기억되는 훌륭한 신앙고백 내지 신학선언 혹은 신학요지를 마련한다면, 매우 뜻깊은 일이 될 것이다.

3) 성청에 의한 성청의 교육담당

성청에 의한 여론형성, 이를 토대로 한 신앙-신학고백을 토대로 성청에 의한, 성청을 위한, 성청의 교육내용과 모델을 개발할 필요가 있다. 신앙고백의 확산은 오로지 교육적 행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러기 위하여 성청이 스스로 교재개발에 앞장서고 이를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남들이 만들어 놓은 교재는 아무래도 주입식이고 피동적인 자세를 요구한다. 성청 스스로 자신의 신앙고백을 형성하고 확산하는 일에 앞장선다면, 성숙한 성결인으로서 큰 보람을 느낄 것이다.

4) 성청에 의한 선교활동

성청은 주로 개 교회적 차원에서만 선교를 수행한다. 그러나 성청에 의한 성청 고유의 선교영역과 모델도 계발하여 꾸준히 발전시킬 필요가 있을 것이다. 성청은 어느 정도 경재력을 확보할 수 있으므로, 교회 안의 선교참여만이 아니라 성청주도형의 선교모델을 개발할 순 없을까? 예를 들면, 성청인에 의한 봉사선교, 도농(都農)선교, 문화선교(연극, 뮤지컬, 미술, 출판), 체육선교, 지역사회선교, 사회선교 등이다.

5) 성청에 의한 모금활동, 기구확대

이런 일을 위해서는 경제적 지원이 가장 절실할 것이다. 그러므로 성청운동을 위한 새로운 모금활동을 전개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수익사업이 있다면 더 좋겠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지속적인 후원-모금사업을 펼쳐 나가야 한다. 그리고 이를 뒷받침할 기구확대도 필요할 것이다. 성청통신망, 회보를 통해 꾸준히 후원회원을 확보하고 관리해야 할 것이며, 새로운 모금발상도 할 필요가 있다 (만명의 만원 후원회원 확보운동, 성청 저금통, 성청의 날 헌금-모금?...).

맺는 말: 새 시대는 새 청년을 부른다!

이제 우리는 결말을 맺어야 할 지점에 이르렀다. 새 시대가 오고 있다. 그 시대가 이미 가까웠으니, 우리는 회개해야 한다. 즉 사고와 생활을 급전환시켜야 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하듯이, 새 시대는 새 청년에 의해 가까이 온다. 현실이 현실적인 것이 아니라 희망만이 참으로 현실적이다. 왜냐하면 모든 현실적인 것은 언젠가는 사라져서 먼 환영이 되고 말지만, 희망만은 영원히 죽지 않고 살아서 우리를 늘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현실에 적응하고 절망할 게 아니라, 늘 살아 움직이며 가능한 것을 용감하게 붙잡아라. 역사는 오직 희망하는 용감한 자의 가슴을 통해서만 다가온다. 새 청년이 되라. 생각과 생활에서, 신앙과 실천에서 늘 다시 시작하고 다시 결단하라. 그리하면 성청은 영원히 살아서 성결교회와 한국교회, 아니 한국사회를 인도하는 예언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언제까지 우리가 늘 뒷북치는 자만 되어야 하겠는가? 새 시대는 새 청년을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