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대 100주년을 바라보는 나의 마음

 

 

 
이신건

 


새로운 1,000년을 희망차게 맞이하고, 교단 100주년의 감격을 맞본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벌써 서울신대 100주년이 우리를 반기고 있다. 서울신대 100주년을 바라보는 나는 먼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사와 감격을 느낀다. 희미한 사진과 기억을 통해 되돌아보는 서울신대는 나라의 멸망과 일본의 지배, 해방과 전쟁의 상흔을 고스란히 간직하면서도, 이를 극복하는 가운데서 놀랍게 성장하고 발전해 온 모습을 오롯이 보여준다. 이는 지금까지 서울신대를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서울신대를 위해 헌신하신 분들의 노고의 결과가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나는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리며, 수고하신 모든 분들께 존경과 감사를 표한다.

하지만 100년의 세월은 은혜의 무게임과 동시에 임무의 무게이기도 하다. 아니 100년의 고개턱을 넘으려니, 숨찬 기쁨 못지않게 벅찬 숙제가 해일처럼 밀려오는 듯하다. 그래서 감격과 기쁨을 잠시 내려놓고, 100주년을 어떻게 맞이하고 넘어갈지를 잠시 고민해 본다.

먼저 서울신대의 100주년은 모든 성결가족이 참여하는 대동제, 대축제가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다른 교단과는 달리 성결교회는 서울신대(경성성서학원)로부터 출발했고, 서울신대가 공급해 온 인재를 통해 발전해 왔으며, 앞으로도 당연히 그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서울신대 100주년은 서울신대 교직원들과 학생들, 교단 임원들, 소수의 동문들만의 행사가 되어서는 안 된다. 코흘리개부터 연로한 어르신에 이르기까지 모든 성결가족들이 지나온 역사를 되돌아볼 수 있게 해야 하고, 현재를 감사하고 기뻐해야 하며, 기도와 참여 속에 미래를 맞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특히 이 땅에 사중복음의 씨앗을 뿌려 주셨던 선교사들과 그들의 선교에 동참해 주신 분들의 은혜도 기억되어야 하고, 살아 계신 분들은 당연히 축제 마당에 초대되어야 한다.

지나온 역사를 잊지 않고 후대에 전승하기 위해 역사 화보집을 만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다만 생생한 사진이 매우 부족하고 동영상이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은 매우 아쉬운 일이다. 우리가 역사자료를 만들고 보존하는 일에 매우 소홀했다는 분명한 증거가 아니겠는가! 이를 교훈으로 삼아 앞으로는 역사 자료를 보존하는 일에 더욱 힘써야 한다. 그리고 화보집만으로는 영광과 상처로 얼룩진 역사를 도무지 담아낼 수 없다. 비록 늦어지더라도, 100주년 역사를 문자로도 반드시 남겨놓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서울신대의 교정을 들어서면, 서울신대만의 역사와 특징을 보여주는 형상이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대문부터 밋밋하기 그지없다. 지금은 이미지, 감성 시대라고 말하지 않는가? 첫 인상이 매우 중요하다지 않는가? 그러므로 비록 돈이 좀 들더라도, 아니 행사 위주의 소모경비를 줄여서라도 차제에 다른 학교처럼 학교의 특성이 드러나는 독특한 형상을 입구에 세우거나 새기기를 바란다. 그리고 교정 안에도 100주년을 기념하는 서울신대의 정신을 새겨 넣은, 작지만 멋진 조형물이 세워지기를 바란다.

그리고 교정 곳곳마다, 특히 관련 건물 앞이나 광장에 서울신대를 빛내신 분들의 흉상 정도라도 세워 좋은 본보기를 삼았으면 좋겠다. 예컨대 이명직 기념도서관 앞에는 이명직 목사님의 흉상을, 성봉기념관 앞에는 이성봉 목사님의 흉상을, 명헌기념관 앞에는 이명헌 목사님의 흉상을, 우석기념관 앞에는 이계무 장로님의 흉상을  세웠으면 좋겠다. 토마스 홀 앞에는 토마스 감독의 흉상을, 100주년기념관 앞에는 정빈, 김상준의 흉상과 나란히 길보른, 카우만의 흉상을 세우면 좋지 않을까? 순교자 박봉진, 문준경의 흉상도 세울 만하다. 만약 흉상이 너무 많고 산만하고 경비가 많이 들어간다고 생각된다면, 스위스에서 볼 수 있는 종교개혁자 조형물처럼 반각 형태로 건물 벽에 새겨 넣어도 무방할 것이다.

진달래, 벚꽃, 목련, 철쭉, 아카시아꽃 등이 서울신대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봄마다 온갖 종류의 백합이 교정에 만발하고, 백합의 향기가 교정을 넘어 온 동네까지 퍼져나가기를 소원해 본다. 봄마다 해마다 백합축제를 개최하여, 성결가족들이 한데 모여 백일장 짓기, 그림 그리기, 찬양대회, 무용대회, 음악공연, 연극공연 등을 하고, 멋진 음식과 사귐이 어우러지는 축제 행사를 한다면, 서울신대를 더 널리 홍보하고 새로운 출발도 다짐할 수 있지 않을까?

100주년 기념관을 짓는다고 하지만, 대부분의 공간이 역사를 회상하는 목적보다는 다른 목적을 위해 사용될 것이다. 그리고 좁은 실내 공간보다는 넓은 야외 마당이 훨씬 더 강한 시각효과를 드러낼 것이다. 실내에 비치된 것들은 한 두 번 보는 것으로 끝나기 쉽지만, 실외에 세워진 형상들은 언제나 우리를 반길 것이고,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항상 던질 것이다. 왜 우리가 여기에 왔는가? 우리가 여기서 무슨 일을 했는가? 여러분은 무슨 일을 하고 있고, 장차 무슨 일을 하려는가? 눈앞에 생생하게 보이는 인물의 형상보다 더 강하게 우리에게 다가오는 귀감이 있겠는가?

지금까지 나는 주로 외형적인 측면에 관해 말했다. 100년을 넘긴 성결교회와 100년을 바라보는 서울신대가 한국교회와 한국사회에 내세울 만한 자랑거리가 무엇인가? 대형교회도 없고, 탁월한 인물도 없다. 사회적 영향력도 크지 않고, 세상을 이끌어가는 정신적 힘도 미약하다. 하지만 다행하게도 인재 양성은 다른 교단의 추종을 불허한다. 특히 서울신대가 배출한 신학자들은 다른 교단이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늘어났다. 지금 그들의 눈부신 활약상은 교단과 대학의 자랑거리로 삼아도 무방하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서울신대를 비롯한 교단의 기관들은 그들을 제대로 수용하지 못하기 때문에 많은 학자들이 시간 강사로, 혹은 다른 교단에 속한 교수로 외롭게 분투하고 있다. 이제 모교는 자신의 품을 더 넓혀야 하고, 그래서 그들을 최대한 넉넉히 감싸 안아야 한다. 성결교회와 서울신대의 가장 큰 자산이 아깝게도 방치되거나 잘못 사용되고 있다. 성결교회 100주년을 맞이하여 성결교회의 신학을 새롭게 해석하여 다른 교단이 부러워할 만한 탁월한 업적을 남긴 것도 그들의 희생과 노고의 뒷받침이 있었기에 비로소 가능했다.

진주알도 꿰어야 보배가 된다는 말이 있다. 만약 성결교회가 낳은 뛰어난 인물을 계속 이대로 방치한다면, 그나마 우리의 자긍심도 서서히 사라질 것이고, 우리의 미래도 크게 기약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의 역량을 한데 모아 시너지 효과를 만들고, 이를 서울신대의 발전의 위대한 에너지로 삼아야 한다. 반갑게도 성서신학자들이 방대한 성서주석을 함께 펴내기로 결심하고, 이미 이 일에 착수했다는 소식은 큰 위로를 준다.

인문학의 위기 속에서 가장 큰 위기를 맞이하고 있는 분야는 바로 조직신학 분야다. 현대인은 거대담론은 싫어할 뿐만 아니라, 교리를 매우 거추장스럽고 불필요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 탓인지는 몰라도, 서울신대 100주년을 앞두고 조직신학자들의 도전정신이 거의 보이지 않는 것은 유감이다. 성결교회 100주년을 위한 신학적 작업으로 인해 이미 지쳤거나 그것으로도 만족하고 있다는 뜻인가? 과거에 대한 해석보다 더 중요한 것은 미래의 비전을 그리는 일이다. 이런 일을 조직신학자들보다 더 명확하게 감당할 수 있는 자들이 어디 있겠는가?

유감스럽게도 지금 서울신대에서 웨슬리안, 성결교회의 전통을 계승하는 학자들은 점점 줄어드는 반면, 다른 신학을 소개하고 새로운 신학을 확장해 가는 학자들은 상당히 늘어나고 있다. 과거에는 다양성을 억압하는 획일성이 심각한 문제였다면, 지금은 통일성이 사라진 다양성이 점점 더 큰 문제로 부상하고 있다. 점점 더 다원화해가는 우리 시대에 이것은 도리어 큰 장점일 수도 있다. 하지만 구심력보다 원심력이 더 강한 팽이는 반드시 넘어지고 말듯이, 통일성보다 다양성이 더 강한 신학은 무기력해지기 쉬울 것이다. 100주년을 맞이하여 국제적인 학술대회를 개최하는 것도 이런 고민을 담기 위한 것이어야 할 것이다. 차제에 성결교회의 모든 학자들이 함께 모여, 험한 파도를 헤쳐 나가야 할 서울신대의 새로운 방향타를 설정하기 위해 머리를 맞대고 지혜와 비전을 모아야 할 것이다.

이것은 서울신대의 개명(改名)과 분리보다 더 막중한 과제일 것이다. 이것은 다분히 미래의 생존 전략 혹은 발전 전략에 관한 일이지만, 신학적 작업은 이를 포함하거나 이를 넘어서, 더 원대한 미래의 비전을 그리는 일이 될 것이다. 수많은 교파의 난립 속에서, 수많은 신학대학의 현실 속에서, 수많은 백가쟁명(百家爭鳴) 식의 신학 속에서, 아니 온갖 새로운 사상과 생활의 양식이 난무하는 어지러운 세상 속에서 서울신대만이 줄 수 있는 독특한 정체성과 확고한 방향성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여전히 전통만을 문자대로 읊조려야 할 것인가? 무조건 새로운 것만을 추구해야 할 것인가?

자본주의와 지구환경의 위기 속에서, 점점 더 해체되어가는 가족 공동체와 급속한 인구감소 속에서, 아니 방향과 목적을 잃고 오직 개인의 욕망을 향해 부나비처럼 불 속으로 뛰어드는 현대인들에게 오늘 서울신대는 무엇이고, 내일 서울신대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만약 서울신대가 이런 고민을 진지하게 나누지 않고, 단지 외형적 사업과 거창한 행사 위주로만 100주년을 보낸다면, 하나님께서 모처럼 허락하신 100주년이라는 귀한 선물을 헛되이 낭비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먼저 “주님, 부족하고 불충하고 불쌍한 우리를 도와주소서!”라고 모두가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해야 할 것이다. 서울신대의 미래는 우리의 엉덩이(전통과 미래, 나와 너의 소통)와 무릎(하나님과의 소통, 아니 하나님의 뜻을 위한 간구)의 무게에 달려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활천 2010년 6월호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