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슬리신학의 전통에서 본

한국의 감리교신학과 성결교신학”(최인식)에 대한 논찬 

한국기독교학회 제40차 정기학술대회(2011, 10,22) 발표


최인식 : 웨슬리신학의 전통에서 본 한국의 감리교신학과 성결교신학

 

 
이신건



마감 시간에 쫓겨 발제도 제대로 못하는 이 마당에 논찬까지 찬찬히 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왜 우리는 늘 시간에 쫓겨 허둥지둥 마감하고 헤어져야 할까? 일 년에 겨우 한 두 차례 열리는 이런 소중한 만남을 위해 우리는 왜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없으며, 밤을 새우면서까지 열렬히 토론하고 논박할 수 없을까? 이런 푸념으로 이 글을 시작하는 까닭은 어쩔 수 없이 짊어진 논찬의 십자가를 가뿐히 질 수밖에 없는 불가피한 상황을 설명하기 위함이다    

한국감리교회의 신학과 성결교회의 신학이 동일한 전통, 곧 웨슬리신학의 전통을 물려받았다고 고백하면서도, 두 교회의 신학자들이 지금까지 서로 간에 진지한 신학적 대화와 공동 작업을 거의 해 오지 않았음을 고려할 때, 최 박사의 논문은 신학자들의 상호이해와 협력을 위한 소중한 토대를 마련했다고 여겨진다. 쉽지 않은 주제와 방대한 자료를 놓고 씨름한 끝에 유익하고 알찬 논문을 제공해 준 최인식 박사의 노고에 진심으로 감사한다. 시간과 지면의 한계 때문에 이 자리에서 굳이 내용을 요약하지 않겠다. 그리고 이 논문의 공헌과 장점에 관해서도 여러분들이 이미 현명하게 판단했으리라 믿고, 이 자리를 빌려 비판적인 화두와 질문을 던져보고 싶다. 

신학자들은 교단이 표방하거나 심지어 자신이 표방하는 신학적 표준(교리, 장정, 선언 등)이나 구호에 항상 충실해 왔는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순진하거나 순수했던 나는 그들이 당연히 그래왔을 거라고 믿어왔다. 한국의 지도적인 교단이나 탁월한 인사들이 공언하고 선포한 말을 어찌 조금이라도 의심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나는 세월이 흐를수록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는 사실을 새삼 발견하게 되었다.

성결교회의 예를 들자면, 본인이 서울신학대학에 입학할 당시(1972년)에 학장으로 부임하여 왕성한 활동을 하던 조종남 박사는 교단의 교리신조1)와 이명직 목사의 "조선 야소교 동양선교회 성결교회 약사(1929년)2) 등을 근거로 성결교회의 신학이 바로 웨슬리 신학 위에 세워져 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되어야 함을 수시로 역설해 왔다. 그래서 그는 웨슬리 신학을 서울신대의 교육이념으로 삼았고, 모든 학생들에게 웨슬리 신학을 필수 과목으로 가르쳤으며, 웨슬리 노선을 벗어나거나 비판하는 사람들은 홀대해 왔다. 여러분이 잘 알다시피, 1970대는 한국에서 민주화 운동이 들불처럼 일어나던 시기였다. 민주화 운동을 주도하는 사람들과 단체들은 폭압적인 박정희 독재정권에 격렬히 저항했다. 시대에 비교적 민감했던 나도 자연히 시대적 고민을 떠안을 수밖에 없었고, 역사참여 혹은 사회선교의 신학적 근거를 찾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조종남 박사는 언제나 개인적 회심 혹은 개인적 성결만을 외쳤고, 민주화 운동을 하던 학생들을 보호하기는커녕 은근히 탄압했다.3)

하지만 나는 민주화 운동을 주도하던 사람들(함석헌, 강원용, 박형규 등)의 주장과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과 십자가의 신학, 해방신학, 민중신학, 그리고 내가 탐독한 여러 역사 서적을 통해 교회의 역사참여의 당위성을 확신하게 되었다. 하지만 조종남의 가르침에 주로 의존해 있던 나는 웨슬리가 사회에 대해서는 완전히 무관심한 사람으로만 알았다. 하지만 매우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웨슬리는 “사회적 성결이 아닌 성결은 성결과 전혀 무관하다!”라고 외쳤고, 흑인해방을 비롯한 사회문제 해결을 위해 웨슬리가 크게 기여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성결교회의 신학이 오직 웨슬리의 신학 위에 세워져 왔다고 주장한 조종남의 반(反)-역사적, 반(反) 혹은 반(半)-웨슬리적 입장은 도대체 어떻게 설명되어야 하는가? 그가 성결교회와 한국교회에서 웨슬리 신학을 정당하게 대변해 왔다고 떳떳이 말할 수 있겠으며, 그래서 그와 그의 제자들의 신학이 과연 웨슬리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비슷한 현상은 예전에도 이미 나타났다. 성결교회의 신앙과 신학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이명직도 “성결교회의 신앙이 요한 웨슬리의 성경해석의 근본적 교리와 만국 성결교회의 신앙개조를 토대로 삼는다.”고 수차례 선언했지만, 그의 글에서는 웨슬리의 글을 전혀 인용하거나 해석조차 하지 않았다. 이명직도 오직 개인적 성결만을 줄기차게 주창해 왔으며, 사회적 관심을 철저히 억압했다. 이런 현상은 그 당시 성결교회의 지도적인 신학자들(김상준, 이건 등)에게서도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현상이다. 초기 성결교회 지도자들이 표방했던 신학과 그들이 전개했던 신학이 상당한 괴리를 보인 현상은 단순히 그들이 물려받았던 다른 전통과 역사적 배경으로부터 설명할 수만은 없다.

이런 괴리와 모순 현상을 여기서 굳이 지적하고 싶은 까닭은 무엇인가? 어떤 현상을 설명할 때, 우리는 단순한 구호와 선언만을 고려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역설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역사를 연구할 때 우리가 가장 중시해야 할 사항은 누가 무엇을 표방하고 무엇을 선언했는지가 아니라, 그가 표방하고 선언한 대로 과연 말하고 행동했는지를 면밀히 관찰하고 검증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단순한 역사적 문헌이나 선언적 문구만으로는 성결교회와 감리교회의 신학을 제대로 설명해 낼 수 없다는 점을 나는 이 자리에 역설하고 싶다.   

감리교회는 명실상부하게 웨슬리 후예로서 웨슬리 신학을 한국교회에 제대로 알리려고 노력을 많이 기울여 온 것으로 보인다. 존 웨슬리 총서(10권)를 펴낸 송흥국을 위시하여 예컨대 이계준, 변선환, 장종철, 장경철, 김홍기, 김영선, 김진두 등과 같은 신학자들이 웨슬리 신학을 계속 소개해 주고 있다. 하지만 “한국 감리교회가 신학적인 차원에서는 개인적 성화보다는 사회적 성화에 더 큰 비중이 주어진 것으로 보인다.”는 최 박사의 설명에는 언뜻 동의가 되지 않는다. 감리교회는 분명히 성결교회보다는 사회적 성화에 더 많은 관심을 보여 왔지만, 기장교회의 사회적 관심에 비하면 감리교회의 사회적 관심은 매우 미약한 편이다. 하지만 최근에 “사회적 성화의 신학”을 활발하게 소개하는 김홍기를 성결교회는 여러 차례 초청하여 경청한 적이 있다. 최인식의 말대로 감리교회 측에서는 성결교회로부터 “개인적 성결‘의 신학을 배우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최근에 연이어 나타나는 감리교회의 도덕적 해이와 심각한 타락상은 ”사회적 성화의 신학“만으로 해결할 수 없을 것이다. 

감리교회의 신학으로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명실공히 토착화 신학일 것이다. 최병헌으로부터 시작하여 정경옥, 윤성범, 유동식, 변선환, 박종천, 이정배 등에 이르기까지 토착화 신학은 한국 감리교신학의 주요 흐름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비록 토착화 신학이 실제적인 열매를 얼마나 많이 맺었고 감리교회와 한국교회 안으로 얼마나 깊이 파급되었는지는 의심스럽지만, 복음의 토착화, 현장화 혹은 상황화를 위한 감리교 신학자들의 진지한 노력과 알찬 결실은 한국적 신학 혹은 아시아 신학의 새로운 전형이라고 자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성결교회는 그들로부터 많은 점을 배워야 할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종교다원주의”, “상대주의” 혹은 “자유주의”라는 비판을 듣고 있는 감리교회의 신학자들은 기독교와 자신의 전통만이 아니라 성결교회의 온건한 복음주의 전통으로부터 계속 배우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최인식에게 묻고 싶다. 감리교회 이용도의 “예수영성”과 성결교회 이성봉의 “임마누엘 영성”이란 무엇인가? 오늘날에 그들의 영성에 새삼 주목할 필요가 무엇인가? 그들의 영성신학이 어떻게 1세기 예수 영성의 불꽃을 21세기 한국 땅에 다시 붙여 놓을 수 있단 말인가? 더욱이 예수의 영성이란 무엇인가? 그의 뜻밖의 결론이 나를 당황하게 한다. 그럼에도 힘든 작업을 훌륭하게 완수한 그의 노고에 감사의 큰 박수를 보내고 싶다. 당연히 우리는 그의 제언에 진지한 관심을 보태야 할 것이다!

 

 

 


1) 본 단체에서 주창하는 교리는 새로 만든 별 교리가 아니오, 오직 옛날 웨슬리 씨와 감리회의 초시대 성도들의 주창하던 교리, 곧 하나님의 단순한 근본적 진리니라.

2) 혹시 동양선교회(성결교회)는 ... 오직 감리교회의 개조(開祖)인 요한 웨슬리를 이어 일어나 초시대(初時代)의 감리교회와 같이 ... 복음을 고조하며 ... 우리 교리나 정신은 초시대 감리교회로 인정하여야 틀림이 없을지니라.

3) 나를 실례로 들면, 나는 그 당시에 유신반대 데모를 주도했다는 이유로 무기정학 처분을 받았고, 1년 1개월 만에 복학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나의 학적부에는 내가 6개월 후에 복학처분을 받았고, 가사의 이유로 자진 휴학을 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전혀 사실무근이었다. 이와 같은 공문서 조작 행위는 그 당시 학교의 책임자들이 민주화 운동을 하던 학생을 탄압했음을 여실히 상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