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결교회와 성청의 비전

(1998, 7, 17, 성청 지도자 연수회 주제강연, 수안보 파크 호텔)

 
이신건


1. 위기와 기로 앞에 한국 교회

성결교회의 나이가 벌써 90살을 넘겼다. 인간으로 치면, 벌써 고령의 나이고 죽음을 기다릴 나이다. 하지만 교회는 이 땅에서 영원히 존재할 것이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 아래 있으므로, 교회의 무궁한 나이를 인간의 짧은 나이에 비할 바는 아니다. 하지만 무슨 단체든지 나이를 90살 정도 먹으면, 이제 그 단체의 정체나 특징은 다 드러난 것이나 다름이 없다. 그리고 이때 쯤이면 기력이 쇠약해지든지 아니며,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양적으로 보면, 성결교회는 아직도 한국의 "3대 교단의 하나"라는 체면을 유지하고 있다. 비록 후발 주자인 침례교회와 하나님의 성회(오순절 교회)가 맹추격을 가하고 있고, 벌써 추월했는지도 모를 일이지만.

그러나 양이 뭘 그리 대수인가? 만약 질이 엉망이라면, 많은 양은 오히려 화를 불러들일 것이다. 짜지 않는 소금이 많으면 무슨 소용이고, 빵을 부풀리지 않는 누룩이 많으면 무슨 소용인가? 오히려 빵을 망칠뿐이다. 하나님은 수백단의 가라지 보다는 한알의 알곡을 더 귀중히 여기실 것이다. 속이 허실한 과일을 어떤 손님이 사 가겠는가? 엉성하고 바람맞은 과일을 어떤 주인이 좋아하겠는가?

성결교회는 얼마나 잘 익었는가? 성결교회의 참 맛은 무엇인가? 혹시 속이 엉성하거나 썩은 열매는 없는가? 세상 사람들에게, 아니 세상과 교회의 주인이신 주님에게 내어놓을 알차고 맛있는 열매는 무엇인가? 우리가 자랑할 만한 내실있는 열매는 무엇인가?

성결교회에 소속된 젊은이 여러분은 왜 다른 교파 교회에 가지 않고, 여전히 성결교회 안에 머물러 있는가? 수많은 교파 교회 중에서 굳이 성결교회가 존재해야 할 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불신자들이나 다른 교파 교회의 사람들은 무엇을 보고 여러분들이 성결교인임을 식별하는가? 설령 성결교회의 분명한 특징이 점점 더 약해지고 끝내는 완전히 사라진다손 치더라도, 성결교회도 이 땅에서 계속 존재할 특권, 아니 하나님의 은총을 받고 있다고 믿는 한, 이런 물음들은 한가한 사람들의 물음인가?

아니 여러분도 이런 물음을 사치스러운 물음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는가? 특별히 성결교회가 더 좋아서 다니는가? 부모따라 다니거나, 친구따라 다니지! 아니면 가까우니까 다니거나, 한번 다니다 보니 그냥 계속 다니는 것이지! 그리고 지금 이런 고민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지금 온 세상이 세계화니 정보화니, IMF 시대니 하는 말로 어지러운 마당에 작은 땅 한국의 작은 교회의 존재 가치가 그 무슨 대수란 말인가? 더욱이 기독교 자체부터 이 땅에서 짠 맛을 거의 다 잃은 소금이 된 실정이 아닌가? 요즘 세상 사람들은 그 얼마나 자주 짠 맛을 잃은 이 돌멩이를 걷어차거나 짓밟고 가는가?

사실상 한국 교회는 지금 크게 흔들리고 있다. 기복적이고 성장 지향적이었던 한국 교회는 여러 면에서 한계 상황에 직면한 느낌이다. 새 신자의 유입은 점점 더 줄어드는 반면, 타종교로 옮아가는 교인들은 점점 더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아니 이것이 진정한 위기의 본질은 아니다. 정말 심각한 것은 기독교의 존재 가치의 약화, 기독교의 공신력의 추락이다. 한국 사람들이 가장 큰 도덕적 권위를 부여하는 곳은 카톨릭 교회(김수환 추기경?)라고 한다. 왜 그런가? 그 동안 대개의 개신 교회는 대중을 손쉽게 전도하고 교화하기 위하여 기복적, 이기적인 신앙 행태를 너무나 철저히 심어 왔다. 그러니 교회도 비정상적이고 불법적인 수단을 정당화하게 되었고, 그 결과로 수많은 범죄인을 양산해 내었다. 그리고 번영과 위로의 복음, 이기적인 물질 축복의 복음을 강하게 주입하는 사이에 십자가의 복음, 고난과 희생, 섬김의 가치는 거의 실종시켜 버렸다. "가난한 자, 마음이 깨끗한 자, 의로 인해 핍박받는 자, 애통하는 자가 복있다"는 예수의 교훈이 "부자, 이중적인 자, 불의 중에도 평안한 자, 즐기는 자가 복있다"는 천박한 처세술로 뒤바꾼 것이다. 이런 현상에 깊히 중독된 신자들은 이제 다른 맛, 즉 짠 맛이나 신 맛이 섞인 복음을 대하면, 곧바로 내뱉고 만다. 달콤한 물질의 맛을 좀 알고 영혼의 기쁨도 어느 정도 채운 교인들은 이제 다른 곳에서 욕구를 채우려고 한다. 뭔가 새롭고 진지한 것을 찾으려고 교회 문을 두드리는 사람들, 젊은이들은 싱겁기만한 설교, 천박한 복음 선포에 더 이상 매력을 느끼지 않는다. 그래서 이들은 다른 종교나 세상이 주는 기쁨과 첨단 문화 행사에 고개를 기웃거리는 것이다.

복음의 깊은 맛, 진정한 영성을 잃어버린 한국 교회는 이제 더 이상 과거의 거품 성장을 그리워할 것이 아니라, 위기와 변화의 시대에 방황하고 괴로워하는 한국 백성을 구원하고 계도할 새로운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IMF의 위기만 넘기면, 다시금 과거의 번영과 성장으로 되돌아 갈 수 있다는 헛된 환상과 끝없는 욕망을 부추길 것이 아니라, 이 위기를 하나님의 심판과 새로운 회개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교회는 더 이상 물질적 성장, 물질 축복을 부추기는 바알의 신전이 되어서는 안 된다. 비록 외롭고 괴롭더라도 교회는 좁은 길, 좁은 문으로 나아가야 한다. 더 이상 백성을 현혹하여서는 안 된다. 바알과 야웨를, 맘몬(재물)과 하나님을 혼동하거나 둘 다 섬기려고 하는 잘못된 습관을 버리고, 이제는 하나님을, 하나님의 나라를, 그분의 정의를 먼저 구하도록 해야 한다. 그럴 때에만, 우리가 이 세상에서 근심하며 거두어들이는 재물들도 하나님으로부터 선물로 받을 수 있을 것이다.

2. 성결교회는 얼마나 성결교회다운가?

성결교회의 형편은 어떠한가? 단적으로 말하면, 깨어 있는 성결교인이라면 누구나 성결교회가 그 정체성과 존재 의의를 점점 더 상실해 간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다. 다른 교파의 교인들만이 아니라 성결 교인조차도 이제는 성결교회다운 것이 무엇인지 거의, 아니 전혀 식별하지 못하고 있다. 이제는 성결교인조차도 스스로 멍청하다는 것을 자인한다. 뜨겁지도 차지도 않고 미지근하다는 것을 자인한다. 90년이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성결교회의 신조와 신앙고백이라는 것이 짤막하고 낡은 몇 마디 문장으로, 앙상한 가지처럼 남아 있다. 이런 빈약한 유산으로는 오늘의 복잡다단한 문제를 도저히 풀어 갈 수가 없는데도 말이다. 그리고 신앙의 원조가 웨슬리인지, 미국 성결운동가들인지, 아니면 이명직 목사를 비롯한 초대 지도자들인지 그 누구도 명확히 정리해 주고 있지 않다. 이들이 다함께 신앙의 원조들이라고 하더라도, 그들 간의 현격한 신학적, 실천적 차이는 어떻게 해소해야 하는지, 도중에 강조점이 크게 변하거나 완전히 뒤바뀐 내용들은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그 누구도 시원하게 말해 주지 않는다.

더욱이 성결교회는 자신의 신학의 역사를 아직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있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이를 분명하게 해석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여기서 그 누구를 원망할 마음은 없다. 현실이 그러하다는 것일 뿐이다. 그러니 본인같이 미천한 사람이 "성결신학연구소"라는 것을 만들어 이 일을 해보자고 감히 나섰지만, 이게 어디 이 부족한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인가? 그래도 나는 3대째 성결 교인이다. 그러니 골수부터 발끝까지 성결 교회의 체질을 잘 안다.

하지만 나를 키워 준 성결교인의 신앙 안목이 너무나 협소하고 비체계적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나는 일찍부터 폭넓은 세계의 신학 지식을 쌓으려고 노력해 왔다. 최근에 이르러서는 성결교회의 신학 유산이 제대로 정리조차 되어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이론과 현실, 명분과 실제 간의 모순이 너무나 크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를 어떻게 조정하고 극복해야 할지 고심하고 있다.

이런 고민을 여러 분에게 털어놓으려고 이 자리에 선 것은 아니다. 사실 이런 나의 고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거나 때로는 우습게 여길 분들도 있을 것이다. "관행과 시류를 잘 타면서 성공하면 그만이다"는 생각으로 살아가는 분들도 주위에 많이 늘려 있다. 성결교회가 밥 먹여 주나? 성결교회로 신앙 생활하고 목회하고 신학하나? 그저 성결교회 안에 있을 뿐이지, 굳이 성결교인임을 의식하지 않고도 좋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는 생각도 편만하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나그네나 뜨내기나 할 생각이지, 성결교회를 진정 사랑하는 사람들이 할 생각인가? 적어도 100년을 바라보는 나이에 자기가 누군지조차 모르고 살아간단 말인가? 자기 이름만 알뿐, 피형이나 체질, 조상을 모르고, 또 자손을 어떻게 키워야 할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을 우리는 어떻게 건전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정신이 팔리고, 아니 정신이 홀리고 다니면서도 잘 살기만 하면 그만인가? 이건 차라리 돼지나 꿈꿀 행복이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사람이 어디 꿈꿀 행복이란 말인가?

3. 성결교회를 성결교회답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나의 해답이 마지막일 수도 없고, 정답이 아닐 수도 있다는 전제 아래서 이야기를 풀어 가려고 한다. 비록 "성결"이라는 교회 이름이 우리 교회의 독특성을 곧바로 간결하게 전달해 주기는 하지만, 성결, 성결론이 성결교회를 성결교회답게 하는 유일한 구호는 아니다. 오늘날에는 "거룩"의 차원이 거의 세속화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거룩한 영역을 찾아볼 수 없다는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오늘날에는 세상 사람들이 더 이상 "깨끗한 삶"을 살려고 하지 않고, 가급적 "평안하고 행복한 삶"을 살려고 한다는 이유 때문도 아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거룩하고 깨끗한 삶이 더욱 더 요구되는 것이고, 그래서 성결 교회의 사명도 더욱 더 큰 것이다.

사실 더 큰 문제점은 날로 부패해 가는 세속 사회에서 성결교회가 거룩하고 깨끗한 삶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실천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도 있다. 성결교인이라고 남달리 거룩하고 깨끗한가? 웨슬리에 의하면 진정한 성결의 특징은 온전한 사랑과 순수한 동기에 있는데, 성결교인들은 남달리 사랑이 많으며, 동기가 순수한가? 미국 성결운동가들은 성결의 특징을 성령 세례, 성령 충만으로 보았는데, 성결교인들은 남달리 성령이 충만한 사람들인가? 성결교인들이 남달리 성령으로 충만하다는 것을 증거하는 열매는 무엇인가? 이명직 목사는 성결교인들을 향하여 몸과 마음을 성결하게 유지하면서 임박한 종말을 기다리면서 살라고 권고하였는데, 성결교인들은 임박한 종말 앞에서 고결한 삶을 살려고 몸부림치고 있는가? 하지만 이런 질문에 성결교인들이 자신 있게 "예"라고 대답할 수 없다고 해서, 성결이 성결교회의 주요한 특징임을 부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성결도 어디까지나 더 큰 테두리, 즉 "온전한 구원" 안에 있는 한 요소이다. 웨슬리와 미국의 성결운동가들, 초기 성결교회의 지도자들은, 비록 시간과 공간의 이동과 함께 강조점과 초점을 달리하기는 하였지만, 한결같이 온전한 삶, 그리스도인의 완전, 온전한 구원을 열망하였다는 데 일치하고 있다고 본다.

물론 구원의 출발점은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에 있고, 그래서 당연히 그 어떤 세속적 프로그램에 있지는 않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된 그리스도인들은 더 온전한 구원을 열망하여야 한다. 그래서 웨슬리는 성결한 삶을 추구하였고, 비록 상대적이기는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추구하였다. 그리스도인의 완전은 동기의 순수성, 온전한 사랑(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등에 있었다. 그리고 그의 생애 후반기에 이웃 사랑은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향한 적극적인 관심, 즉 "사회적 성결"로 이어졌다.

미국의 성결운동도 근본적으로는 웨슬리처럼 온전한 구원을 향한 몸부림 속에서 태동되었다. 비록 미국의 성결운동가들이 온전한 성결을 이루기 위해 강하게 성령 충만을 갈구, 체험하였고, 그런 중에 능력과 은사(방언)를 강조한 오순절 교회가 생겨나기도 하였지만, 대체로 이들도 더 큰 구원을 추구하였던 것이다. 한편으로는 초기의 성결교회의 지도자들이 "능력"이나 "은사"보다는 "내적인 확신"과 "성결한 삶"을 더 강조하였다는 점에서 웨슬리의 정신을 계승하였다고 볼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성결의 본질을 순간적인 "성령 체험"으로 보았다는 점에서는 웨슬리와는 달리 미국의 성결운동의 정신을 더 많이 계승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미국의 역사 비관주의적, 세대주의적인 "전천년설"의 영향으로 인하여, 그리고 기독교의 복음을 훼손하면서까지 일방적으로 사회 참여만을 강조한 "사회복음주의"(Social Gospel)에 대한 반발 때문에 웨슬리가 강조한 이웃 사랑의 정신이 크게 위축된 것은 불행한 일이다. 이웃 사랑이 없는 성령 충만, 이웃의 고통을 외면하는 거룩한 이기주의는 웨슬리와 예수의 정신이 아니거니와, 온전한 구원을 향한 열망과도 맞지 않다.

더욱이 한국의 특수한 상황(혹독한 일제의 탄압) 때문에, 그리고 임박한 재림에 대한 간절한 기대 때문에 이웃과 사회, 역사에 대한 관심이 더욱 더 위축된 것도 유감이 아닐 수 없다. 그리하여 사회적, 역사적 무관심은 마치 영원히 고수해야 할 성결교회의 유산으로 생각되어 왔는데, 엄밀히 말하자면, 이것은 웨슬리와 또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에도 전혀 맞지 않는 것이다. 그렇더라도 미국의 성결운동가들이 "신유"와 "재림"을 추가적으로 강조함으로써(사중복음) 더 온전한 구원을 열망한 것이라든가, 올해 3월에 있었던 "성결인 대회"의 선언문의 정신과 실직자 돕기 등의 실천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라고 생각된다. 이 선언문은 이제 지난 시절의 성결교회의 협소한 관심을 대단히 넓혀 놓았다(국난극복과 민족통일을 위한 기도, 교회갱신과 회개운동의 지속적 전개, 도덕성 회복과 사회정화의 실천, 분쟁지양과 화해일치의 노력, 소외된 이웃을 위한 사랑과 봉사 실천, 세계선교와 인류 평화를 위한 노력, 창조질서와 자연환경 보전).

이런 실천 사항들이 어떠한 신학적, 실천적 의미를 지니는지는 더 검토해야 하겠지만, 여하튼 공식 문건에 이렇게 폭넓은 내용이 포함된 것 자체만으로도 성결교회의 역사에서 획기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이 모든 것은 결국 한국적 상황에서 온전한 구원을 이루는 데 필요한 것임이 분명하다. 뜻밖에 우리에게 이런 큰 신앙적 진보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 하나님은 인간이 예상할 수 없는 일을 하신다. 그 누가 그분의 계획과 뜻을 사전에 미리 알겠는가? 무한히 부요하신 하나님에게 경외와 찬양을 드리자.


4. 성청이여, 새로운 비전을 보자!

그렇다면 이 모든 사실들이 성청에게 무슨 의미를 갖는가? 성결교회가 성결교회답다는 것과 성청이 성청답다는 것은 무슨 관계가 있는가? 성청이 지금 여기서 감당해야 할 과제는 무엇인가? 아니 성청은 어떤 비전을 보고 있는가?

일찍부터 성결교회의 청년들은 복음 전도와 교육 등에 선구적인 역할을 하여 왔다. 그들의 뜨거운 구령열과 교회에 대한 열정적인 헌신은 오늘의 성결교회가 있게 하는 데 크게 기여하여 왔다. 우리 모두는 주로 나이 많은 목회자들의 설교를 듣고 신앙 생활을 하여 왔지만, 우리의 신앙을 든든하게 살찌우고 교회에 다닐 맛을 심어 준 이들은 바로 교회 교육과 행사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청년들이었다. 청년들은 앞 세대가 전해 준 복음을 충실히 믿고 따르며 가르쳤다.

하지만 경제가 급속히 발전하고 사회가 크게 변화되던 70년대에 이르자, 심령 구원과 개인전도, 교회성장만으로는 교회의 사명을 다할 수 없다는 자각이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일어났다. 특히 사회의 구조악에 일찍 눈뜬 청년들은 교회의 사회적 사명을 깨닫게 되었고, 그래서 적지 않은 청년들이 교회 안팎에서 사회정의, 민주화 실현을 위해 헌신하였던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비교적 사회변화에 무관심하던 성결교회 안에서 갈등이 일어났다. 비록 민주화와 정의실현은 시민으로서 마땅히 추구해야 할 보편적인 가치이긴 하지만, 교회가 이런 일을 해야 하는지를 놓고 이론적, 실천적 대립이 일어났고, 성결교회 안에서도 이런 갈등이 종종 가시화되었다.

그리고 90년대에 이르러 환경파괴와 생명위협의 징후가 지구 전체로 확산되어 간다는 사실을 자각한 사람들 사이에서 "환경운동"의 필요성도 대두되었다. 그렇지만 "사회구원"에도 낯설었던 성결 교회의 어른들이 "자연구원"을 이해하고 수용할 리가 없었다. 이리하여 환경에 대한 관심을 둘러싸고 또 다시 갈등이 일어났다.

비록 소수나마 사회참여나 환경보전에 관심을 가졌던 성결교회의 청년들은, 내가 직접 경험해 본대로는, 결코 좌경사상이나 파괴적인 운동권에 편입된 자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다같이 성결교회의 소중한 신앙 유산을 간직하고 있었으며, 이와 동시에 사회와 자연에 대한 관심도 가졌던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들은 웨슬리나 그 이후의 웨슬리안들처럼 구원의 지평을 넓혀 가며 "온전한 구원"을 추구하는 자들이었다. 어른들의 몰이해와 냉대, 질시 가운데서도 소수의 청년들은 성결 교회 안에서 제 나름대로 선교 영역을 확장해 오는 데 기여하였다.

이런 활동이 성결교회의 진정한 전통에 거슬리기보다는 오히려 충실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억압과 냉대를 받아 온 것은 참으로 역사의 모순이 아닐 수 없다. 복음의 이름으로 복음이 냉대받고, 성결의 이름으로 성결이 억압되었던 것이다. 웨슬리로부터 흘러온 "사회적 성결", "온전한 구원"의 정신이 우리 시대에 계속 살아 움직여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정신사의 물줄기는 그 반대로 흘렀던 것이다.

물론 어른들의 우려에도 그 나름대로 정당성은 있었을 것이다. "청년들의 신상을 보호하고 운동의 과격화를 막아야 한다"는 명분이 여기에 작용하였을 것이며, 때로는 "사회변화를 거부하는 것이 기득권에 이롭다"는 정치적 판단도 개입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은 물론이거니와, 웨슬리의 정신도 올바로 계승되거나 실천되지 않았다는 사실, 아니 이 정신이 시대 정신에 의해 변형되고 왜곡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직시하여야 한다.

하지만 그 동안 외로움과 괴로움을 견디며 성청 운동을 선구적으로 이끌었던 청년들의 노력이 이제야 서서히 결실을 거두고 있다는 느낌을 갖는다. 앞에서도 이미 말하였거니와, "98 성결인 대회"의 선언문은 성결 교인들이 지향해야 할 온전한 구원의 전망을 거의 다 제시하고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성결교회 고유의 "뜨거운 구령열"과 "온전한 구원을 향한 전진", 이 두 정신을 잘 조화시키며 구원의 더 큰 진보를 이룰 수 있는 데 가장 효율적인 사람들은 청년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청년은 아직 여러 면에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세대이다. 정치적으로 미숙하고 무력하며, 경제적으로 허실하고 빈약하다. 더욱이 오늘날 청년의 정체성은 더욱 모호해지고 있다. 과연 청년은 이 시대를 이끌어 갈 만한 역량과 의지가 있는가? 날이 갈수록 이기적이 되어 가고, 감각적이고 즉흥적인 인간으로 변해 가는 오늘날의 청년이 과연 교회와 사회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여러분은 과거의 선배들처럼 복음에 뜨겁게 헌신하고 있는가? 사회구원과 자연사랑에 얼마나 선구적이며 뜨거운가?

이제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문제점은 더 이상 기성세대의 몰이해와 억압이 아니라 청년의 이기주의와 무능, 청년 운동의 허약성이다. 오늘 여러분은 하나님과 교회, 역사 앞에서 어떤 부름을 받고 있는가? 아니 여러분에게 정말 요구되는 것은 목표설정이 아니라 목표를 이루기 위한 뜨거운 열망과 불타오르는 헌신이다. 여러분의 선배들이 피와 땀으로 일군 성청 운동의 고랑에서 더 알찬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더 많은 땀과 피가 요구된다.

여러분의 심장을 뜨겁게 지필 불은 어디서 오는가? 그것은 다시금 하나님의 영, 성령이 아닌가?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은 무엇보다도 "창조자 영이시여, 오소서, 우리를 새롭게 하소서"라고 기도해야 한다. 그리해야만 성청은 다시 일어날 수 있고, 또 그래서 만방에 빛을 발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는 이론이 아니라 실천이며, 인간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이다. 다시금 예수 그리스도를 움직였고, 초대 교회를 움직였으며, 우리의 신앙 선조들을 움직였던 성령의 임재와 충만을 갈구하자. 다시금 시대와 역사의 사명을 회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성령을 구하지 말고, 이 일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 뜨거운 성령 체험을 갈구하자. 멸망해 가는 영혼과 부패해지는 사회와 죽어 가는 자연을 되살리도록, 만물이 풍성한 생명을 얻도록, 젊은 생명인 여러분, 피끓는 청년이여 일어나라. 시대와 역사, 아니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새로운 비전을 주시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