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시대 속에서의 성청운동의 선교적 사명

제6회 성청지도자 연수회 주제강연
(1989년 6월 6일 경주 유스호텔 계림국청원)


 
이신건

 

[I]

예수님은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에게 "왜 시대의 징조를 분별하지 못하느냐?"고 엄하게 책망하신 적이 있다(마태 16:3). 이 책망은 우리에게도 우리가 처한 시대의 징조를 올바르게 분별하도록 촉구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 어떠한 시대적 사건들 속에 처해 있는가? 이런 질문을 제기함으로써 본 강연을 시작 하고자 한다. 본인이 제가하는 물음은 "성청운동의 보편적, 일반적 선교의 과제가 무엇이냐?"가 아니라 "오늘 우리가 처해 있는 이 시대의 징조 속에서 구체적으로 성청운동의 선교적 과제가 무엇이어야 하느냐?"이다. 그러므로 본인은 잠시 우리 시대의 상황을 먼저 간단히 설명해 보고자 한다.

우리는 지금 몇 십년, 아니 몇 백년 동안에 누적되어 온 한국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극복하려는 변혁의 시대에 처해 있다. 각 시대마다 그 나름대로의 문제가 항상 있어 왔고 또 그것을 극복하고자 시도하는 노력들이 경주되어 왔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이 시대의 변혁의 몸부림만큼 그처럼 긴급하고 처절한 것이 과연 있었겠는가? 긴급하다는 것은 이젠 더 이상 과거의 모순의 굴레에 깔려 신음할 수 없다는 자각이 팽배해져 있어서 각 방면마다 이에 대한 요구가 거세게 분출되고 있다는 뜻이요, 처절하다는 것은 다방면에서 이의 극복을 위한 몸부림과 피눈물나는 희생을 치르고 있다는 뜻이다.

한반도는 일찍부터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의 틈바구니에 끼어 있다는 그 지정학적 이유 때문에 원치않게 수없이 외세의 간섭, 강탈 아래 생존권을 유린당하고 압제당해 왔으며, 지금도 강대국에 의해 저질러지고 강요되고 있는 분단의 모순이 삶의 전 분야에 깊이 뿌리 박혀 있다. 아직도 우리는 진정한 자주독립국가라고 자처할 수 없으리만치 정치, 군사, 경제, 심지어는 문화의 영역에까지 강대국의 영향과 지배를 받고 있다. 국내적으로 이러한 분단의 모순을 그대로 끌어 안은 채 이를 최대한도로 악용하고 있는 독재정치(특히 군부) 세력과 이와 결탁한 독점 재벌세력에 의해 또 다시 국민들도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진보변혁 세력과 보수수구 세력으로 나뉘어져 있고, 심지어는 도시와 농촌 간의 격차, 영호남 등 지역 간의 갈등, 세대 간의 갈등 등이 심화되고 있다.

일찍부터 민족 주체세력들은 외세의 간섭을 물리치고 민족 내부의 갈등과 모순을 극복하고자 몸부림쳐 왔지만, 외세를 업은 기회주의자들에 의해 번번히 좌절당하고 말았다(예: 동학혁명, 3·1 운동, 임시정부세력을 비롯한 민족주체세력들의 자주·독립·건국운동, 반민특위활동, 4·3 제주민중항쟁, 4·19 의거, 부마항쟁, 5·17 항쟁, 6월 항쟁 등). 그러나 이제 다시 국제적 화해의 무드, 제 3 세계의 민주화 추세, 국민의 민주적·통일적 역량의 성장 등에 힘입어 장기간 축적되어 온 민족의 모순적 구조를 극복하고자 하는 몸부림이 거세게 분출되고 있다.

학생 뿐만 아니라 노동자, 농민 등의 기층민중, 심지어는 그 동안 다분히 방관적 태도를 가져 왔던 각 분야(종교, 언론, 문화, 교육 등)의 양심적인 진보인사들까지도 이러한 자주·민주·통일운동에 힘차게 가담하고 있다. 우리 민족의 진로는 다시금 실험대 위에 올랐다. 다시 말하면, 다소 혼란스러워 보이는 변혁의 몸부림이 성공적인 길을 걸어서 민족의 자존적 역량이 더 한층 높여지느냐? 아니면 기득권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수구세력들이 변혁에 불가피하게 따르는 갈등을 '위기'니 '혼란'이니 '좌경'이니 하는 논리로 회색칠하여, 안정을 구실로 극우보수체계를 복귀시키느냐? 기로에 우리가 서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나는 확신한다. 이젠 더 이상 퇴로는 있을 수 없다! 왜냐? 몸에 스스로 불지르기까지 처절히 희망을 앞당기려는 젊은이들의 희생정신이 거세기 때문만도 아니다. 군부독재 세력이 세계적 화해무드, 민주화 추세, 국민의 민주화 역량의 성숙에 떠밀려 더 이상 쿠데타를 일으킬 수 없다거나, 독재를 연장시켜 나갈 수 없다는 계산 때문만도 아니다. 역사는 진보발전하게 되어 있다는 낙관적 역사관 때문만도 아니다. 우리가 이 시대 속에서 희망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다름 아니라 우리가 신앙하는 '희망의 하나님'이 역사 가운데서 힘차게 활동하고 계심을 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다 오진 않았으나 가까이 오고 있기 때문이며, 비록 세계 도처에서, 우리 주위에서 어두움의 세력이 발호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 발악 때문에, 우리는 세상의 빛이신 하나님이 그분의 나라를 앞당겨 오시리라는 징조를 여기 저기서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찬송가 265장의 가사("어둔 밤 지나서 동튼다. 환한 빛 보아라 저 빛, 주 예수의 나라 이 땅에 곧 오리라 오리라")를 보라. 이 빛은 구약의 예언자들이 미리 꿈꾸고 대망했던 빛이요,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 보았던 빛이요, 지금도 꿈을 꾸고 환상을 보는 자들이 바라보는 빛이다.

역사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빛의 승리로 끝날 것이다. 어두움이 빛을 이겨 본 적이 없다. 아무리 묵시적 야수들이 날뛴다 해도, 아니 바로 그 때문에 승리는 밝아 오는 것이다. 우리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진군의 발길을 들어 보자! 하나님은 우리 민족의 변혁의 한 가운데서 힘차게 활동하신다. 우리는 지금 그분의 힘찬 거동을 보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변혁, 아니 질적인 도약의 시대에 처해 있다. 이것이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보는 시대의 징조일 것이다. 우리는 이 시대의 징조를 분별하여 이 변혁에 결연히 참여하도록, 아니 하나님의 발걸음을 뒤따르도록 부름 받고 있다.

 

[II]

그런데 교회는 무엇을 보고 있는가? 교회는 이 시대의 징조를 올바로 보고 있는가? 또 본다면 그것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전통적으로 교회가 특히 변혁의 시기에 시대의 사건을 잘못 대해 온 방식은 대개 세 가지로 나뉘어 진다.

1) 첫째는 교회가 시대사건에 대해 무관심한 태도이다. 교회는 이 세상을 보지 말고 하늘의 영광만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세상은 '장차 망할 성'(장망성)이니 교회라는 방주 안으로 들어와야 재난을 피할 수 있으며, 그리스도인은 오직 교회 안에서도 하늘만을 쳐다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교회는 거룩한 구원의 이기주의, 구원의 사유화를 조장한다. "개인주의적 실존은 도둑의 실존이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그 본질상 성부, 성자, 성령으로 구성된 구성체이시고, 이 땅에서 공동체를 창조하신다. 그리고 은총을 자기를 위한 개인의 것으로 보유하고자 하는 사람은 은혜로부터 떠난 자이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그가 고독에서부터 공동체로 들어가는데서 일어난다"(칼바르트). "그리스도는 남을 위한 존재이시듯이, 그리스도인도 남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 그리스도는 오늘날 우리가 남을 위해 존재하는 바로 그곳에 존재하신다"(본훼퍼). 영혼과 육신, 교회와 세상, 이 세상과 저 세상 사이를 갈라 놓고 고고히 하늘만을 쳐다보는 소위 경건한 종교적 그리스도인은 실로 하나님이 육신을 입으시고 바로 이 세상 한 가운데로, 특히 낮은 자들, 작은 자들, 가난한 자들 한 가운데로 오셨음을 보지 못하는 자이며, 예수님이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 위에, 십자가가 세워졌던 바로 이 땅 위에 이루어지길 기도하셨다는 사실을 망각한 자이다. 십자가의 고난도, 부활의 승리도, 재림의 영광도 바로 이 세상을 위한 것, 하나님이 너무나 사랑하시사 독생자를 죽기까지 내어주신 바로 이 세상을 위한 것이다.

2) 둘째는 이 시대 속에는 하나님보다는 사탄, 빛의 세력보다는 어둠의 세력이 더 강하게 활동하기 때문에, 이 역사는 결국 심판과 파멸로 치닫게 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오직 악에서 구하옵소서"라고 기도하면서 심판 날까지 자신을 잘 보존하면 될 일이지, 세상 일에 끼어들어 손해볼 필요가 없다는 교회의 태도이다. 이러한 태도는 묵시적 종말론, 특히 비관적이고 이원론적인 영향을 받은 묵시록에만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신앙태도인데, 실상은 묵시록마저도 당대의 사탄적 세력, 즉 불의한 권력과 구조적 수탈·탄압 세력에 맞서 투쟁했던 그리스도인의 고난과 희망을 보여 주고 있음을 애써 외면하는 태도이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서 가장 작은 자들을 어떻게 대하고 행동했느냐에 따라서, 즉 믿음의 행함(실천)에 따라서 심판을 받는다(마태 25:31-46).

그리스도인이 이 땅에서 행한 모든 노력은 결코 헛되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에 곡간에 차곡차곡 채워진다. 눈물로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둘 것이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궁극적인 승리로 이끄실 것이고, 모든 그리스도의 군사들에게 그 행함에 따라 상급이 주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그 어느 것 하나 가치 없는 것이 없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세상 한복판에서 일해야 한다. 하나님이 일하시니 그리스도도 일하시고, 우리도 성령의 능력 안에서 일해야 한다. 악한 세력과 싸우고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한다.

3) 셋째는 이 세상의 강자의 편을 들고 재물과 영광을 탐하며, 이 세상의 약자를 위로만 할 뿐이지, 그것들을 낳는 불의한 구조와는 짝하고 타협하는 교회의 태도이다. 이러한 교회는 독재자와 강자의 안정의 논리에 빌붙어서 자기 안정을 추구하는 교회이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사실 교회가 먼저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아우성치고 그리스도를 내어 주었지만)이 던져 준 옷을 나눠 먹으려고 다투고 분열하는 교회이다. 이런 교회는 세상의 빛이기는 커녕 그 빛을 가리는 장애물이며, 세상의 소금이기는 커녕 세상의 설탕, 아편이며, 세상을 구원하기는 커녕 세상을 멸망으로 인도하는 장님의 교회이다.

이러한 교회는 결국 공산주의와 무신론이라는 기형적 사생아를 낳고 기르는 부정한 음녀이며, 자본주의가 던져 주는 돈에 눈을 감고 몸을 파는 추잡한 창녀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예수님이 뿌리치신 세상영광, 재물, 기적을 바라는 교회는 결국 하나님 대신에 가이사를, 하나님의 나라 대신에 암몬의 나라를, 예수님 대신에 마술장이 시몬을 섬기는 우상숭배자가 아니고 그 무엇이겠는가?

 

[III]

예나 지금이나 이처럼 교회가 시대의 사건과 세상에 대해서 잘못된 태도를 취해 온적이 많고, 지금도 많은 교회가 세 가지 태도 중에 하나를 택하고 있다. 이런 교회는 항상 하나님의 심판의 위기 아래에 있다. 이스라엘의 역사와 기독교의 역사는 배반과 불충실, 그로 인한 심판과 버림받음의 역사 이기도 하다. 기독교의 역사는 숱한 오류와 죄악으로 점철되어 있다. 교회는 수없이 자신의 사명으로부터 이탈하여 이 세상의 권세를 흉내내고 이 세상의 영광으로 치장했으며, 수없이 예언자를, 교회 개혁자를, 아니 그리스도를 처형했다. 교회는 가시관의 그리스도보다 금관의 그리스도를 섬겼고, 과거의 그리스도를 빙자하여 현재의 그리스도를 박대했다. 그리하여 교회는 항상 심판과 버림받음의 운명에 노출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사탄의 권세에 의해 무너지지 않은 것은 교회 자신의 공로나 업적 때문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끊임 없이 '남은 자'를 보존시키시고 새로운 백성을 불러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 때문이다.

그렇지만 교회가 시대 속에서 들여오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눈을 감고 귀를 막는다면, 하나님의 일보다 인간의 일을 먼저 좇는다면, 하나님의 뜻보다는 바알의 유혹에 무릎 꿇는다면, 복음을 버리고 창녀와 매음하고, 강도만난 자를 보고 황급히 도망간다면, 시대의 파수꾼으로서 깨어 있지 않고 졸며, 적이 쳐들어 와도 나팔을 불지 않는다면, 예언을 하지 않고 오히려 예언자를 내쫓고 쳐죽이는 일을 선동하고 이에 협력한다면, 하나님은 이런 교회를 버리실 것이며, 다른 곳에서 그분의 백성들을 택하여 사명을 맡기실 것이다. 교회가 잠잠하면 돌들로 하여금 소리치게 하실 것이다.

최근의 우리 시대의 교회를 보면, 더욱이 한국의 아우슈비츠인 광주학살 이후에도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는 '잠잠한, 짖지 못하는 개'와 같은 교회의 모습을 보면, 참으로 교회는 바리새인과 도둑의 소굴이요, 하나님은 그 교회를 떠나신 게 아닌가, 아니 교회를 버리신 게 아닌지 생각될 때가 한 두번이 아니다. 교회는 세상일에 시시콜콜 간섭하는 정치단체는 아니다. 그러나 강도가 형제들을 죽이고 강도를 피로 물들이고 형제들의 살을 찢는데, 그들의 피가 하늘에 호소하는데, 그들을 위해 하나님께 호소하고 세상 죄를 대신 고하고 이를 씻는 제사장의 직분을 감당하기는 커녕, 이를 보지도 못하고, 알아도 모른 척하고, 고발하고 경고하지 못함을 볼 때, 이제 교회는 너무 늙은 개가 되어서 죽을 날을 기다리고, 교회가 죄인이라고 회개시키려던 세상의 의인들이 오히려 하나님의 일을 하지 않는지 의구심을 떨칠 수가 없다.

특히 광주학살은 한국교회가 진정 이 세상을 위한 교회인가 자기 자신만의 안일을 구하는 교회인가를 판가름하는 시금석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광주학살의 대재앙은 신학과 그리스도인의 삶의 양식이, 교회와 민족 전체가 과거의 구습 그대로 존재해서는 안 된다는 하나님의 경고라고 나는 확신한다. 만약 광주학살 이후에도 교회가 달라지지 않는다면, 교회는 이미 하나님의 교회가 되길 그치고 하나님을 빙자한 종교적 장사꾼들의 투전판이 되고말 것이다. 세상이 없는 교회는 도대체 누굴 위해 존재한다는 말인가? "개인주의적 실존은 도둑의 실존이다"(칼바르트) 이런 경우라면, 예수님은 이 강도의 소굴을 떠나셔서 세상 속으로 들어가시며, 고난당한 이웃과 함께 계실 것이다.

교회가 민족의 어두운 시기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던 시기로부터 점차 퇴락하여 이 시대에 질질 끌려다닐 뿐만 아니라, 이 시대에 의해 조롱받고 버림받을 처지에 있다. 아니 그보다 더 슬픈 것은 교회가 하나님에 의해, 교회를 세우신 바로 그 하나님에 의해 금치산선고를 받고, 버림받을 운명 앞에 있지나 아니한지 두려움이 생긴다. 교회는 끊임 없이 심판받고 버림받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동시에 끊임없이 새로운 백성들을 부르시고, 자신의 일을 계속하신다. 하나님은 특히 이 땅의 한복판에서 친히 고난의 굴레를 지시고, 이를 돌려 번혁의 역사를 일으키시며, 이 변혁의 길을 따라 오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신다. 교회는 이러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고 순종하고 있는가? 주위를 돌아 보면 비관적이라고 판단할 수 밖에 없다.

그렇다고 절망할 것인가? 아니다. 희망은 있다. 교회에게 희망은 있다! 교회에게 희망이 있는 것은 지금의 교회에게가 아니라, 미래의 교회를 이끌어 갈 지금의 청년들에게 희망이 있다는 뜻이다. 미래 교회의 희망은 지금 청년들의 어깨에 지워져 있다. 왜냐? 기성세대는 너무 기득권에 안주하고 있고 정체되어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항상 개혁되어야 할 교회'를 모토로 삼고 있는 개신교회는 실은 한국 사회에서 가장 개혁되기를 거부할 뿐 아니라, 오히려 보수수구세력의 안전판 역할을 하고 있다. 진리와 복음은 보수되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의 교회가 보수하려는 것은 진리와 복음이라기 보다는 현상태요, 기득권이다. 그러나 청년은 기득권이 없으므로 거짓안정보다는 변혁을 추구하고, 현상보수보다는 현상타파를 갈구한다. 청년은 그 사회학적 위상으로 보아 변혁의 기능을 담당한다. 민족사적 위상으로 보아도, 청년은 한국의 민주화, 통일추진 운동에 가장 헌신적이고 효력적인 세력임이 이미 실증되었다. 그러므로 한국교회의 미래도 청년의 어깨에 걸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성청의 사명은 막중하다. 청년이여! 변혁의 발걸음을 뒤따라 오라는 이 시대의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고 분연히 일어나자! 복음의 깃발 아래 선교적 사명에 결연히 참여하여 헌신하자!

 

[IV]

그런데 여기서 분명히 지적해야 할 내용이 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복음'의 의미문제이다. 도대체 복음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진부한 이야기같지만, '복음'이 무엇인지 모른다면, 우리의 헌신이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리스도인들중에는 복음의 뿌리와 내용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설명할 수 있는 자들이 그리 많지 않다. 여기에서 한국교회의 비극의 단면을 극명하게 볼 수 있다. '구원'이니, '축복', '영생'이니 '천국'이니 하는 말들은 제각기 상이하고 모호할 뿐만 아니라, 서로 배치되기도 한다. 다 알것 같이 전제되는 복음은 실로 엄청나게 와전, 곡해, 변질되어 있다.

복음(복된 소식, 기쁜 소식)의 어원과 내용을 어디에서 찾아 볼 수 있는가? 그것은 이사야의 선포에서 분명히 드러나 있다. "주 야훼의 영을 내려 주시며, 야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고 나를 보내시며 이르셨다. 억눌린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여라. 찢긴 마음을 싸매 주고, 포로들에게 해방을 알려라. 옥에 갇힌 자들에게 자유를 선포하여라. 야훼께서 우리를 반겨 주실 해, 우리 하나님께서 원수 갚으실 날이 이르렀다고 선포하여라. 슬퍼하는 모든 사람을 위로하여라. 시온에서 슬퍼하는 사람에게 희망을 주어라..."(이사야 61:1이하). 예수님은 이 본문을 인용하셔서 회당에서 읽으신 후에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 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누가 4:18), "이 성서의 말씀이 오늘 너희가 들은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누가 4:21)고 하셨다.

여기서 복음이란 이 세상에서의 하나님의 총체적 해방, 통전적 구원임을 알 수 있다. 즉 복음은 하나님의 통치가 이 세상의 전체의 영역에서 완전히 실현되는 상태를 말한다. 다시 말하면, 구원이란 개인심령의 구원(찢긴 마음을 싸매주고 슬퍼하는 사람을 위로함)만이 아니라 정치적·사회적 해방, 신체적 치유, 자연만물의 안식(희년)을 포함한다.

그런데 이러한 지상적, 통전적, 총체적 복음이해가 왜 개인화, 영성화, 피안화되었는가?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기독교가 헬라문화권 안으로 전파되면서 영-육 이원론의 영향을 받아서 육체, 현실, 세상을 평가절하하게 된 것, 또 한편으로는 루터가 '칭의'의 복음을 재발견한 이후에 '오직 오직 믿음만으로'의 은총의 복음이 순종과 행함을 무시하는 '값싼 은총(본회퍼)의 복음으로 변질된 것, 그리고 루터가 교회와 국가, 영적인 왕국과 세상 왕국을 구분함으로써(두왕국론), 점차 교회가 세상의 일에 무관심해진 것 등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한국 교회사를 보면, 샤마니즘의 개인기복적 경향, 민속종교의 내세적 요소 등의 요인 외에도 일제 시대의 근본주의적인 미국 선교사들의 탈정치화(脫政治化)의 공작, 부흥사들의 타계적 설교, 몰역사적인 목회자들과 교인들의 신앙행태 등이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을 개인적, 비역사적, 피안적 형태로 고착시켰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찬송가의 가사를 보면, 공동체-역사를 지향하는 내용이 매우 희소하다는 사실을 보게 된다.

우리 성결교회가 물려 받은 신앙 전통은 요한 웨슬리의 신학유산, 미국의 오순절 부흥회의 특징을 띤 초기 선교사들, 특히 심프슨(Simpson)의 사중복음적 해석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러한 신학유산은, 성서의 복음적 관점에서 볼 때, 매우 건실한 내용을 갖출 수 있는 것들이었다. 즉 웨슬리는 칭의와 함께 성화(聖化)를 강조했고, 이 성화는 개인적인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사회적 차원을 지니고 있었고,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의 완전과 사회개혁을 추구하고자 하는 진지한 노력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성결교회가 채탁한 전도표제인 사중복음(중생, 성결, 신유, 재림)은, 비록 전도표제로서 제창되긴 했지만, 만약 성서적 관점에서 제대로 해석된다면, 총체적, 전인적 구원을 포함하는 신학으로 심화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선교사들이나 대부분의 초기 지도자들의 웨슬리 이해, 사중복음이해는 극히 단편적이고 시대제약적이었다. 즉 성화는 극해 개인적, 체험적 영역 안에서 이해되었고, 성화의 사회적 차원은 완전히 간과되었다. 그리고 웨슬리의 교회 갱신적, 사회개혁적, 민중해방적 열정은 전혀 이해되지 못하였다. 그리고 사중복음이 지니는 포괄적인 차원은 극히 개인구원적인 구원이해에 때문에 현저히 배제되었고, 특별히 역사적 전망과 책임을 해명해 줄 수 있는 재림에 대한 신앙마저도 매우 음울한 시대비관적 역사이해와 결부되어 역사적 책임, 예언자적 사명을 전혀 불러 일으키지 못했다. 예를 들어, 초기 성결교회의 대부(代父)와 같은 지도자 이명직 목사님은 간접적인 전도방식을(야학, 농촌계몽 등)을 일체 반대하였고, 오직 직접전도만을 선교의 전부인 것처럼 강조함으로써, 선교개념과 선교영역을 매우 좁혀버렸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사중복음을 웨슬리 신학 전체의 관점, 성서의 통전적, 총체적 구원관 아래서 적절히 해석한다면, 그것은 그 나름대로 훌륭한 신학유산으로 발전될 가능성을 안고 있다.

1) 중생 혹은 칭의는 바울에게서 매우 포괄적 신학의 기초가 되고 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의롭다 하심은 개인을 율법과 하나님의 진노, 죽음에서 해방시켜서 하나님과 화해시킬 뿐만 아니라, 유다인과 이방인을 화해시키고, 사회적-인종적-계급적-성적(性的) 차이를 지닌 모든 인간들을 화해시키는 능력을 지닌 화해의 기초이다. 그리고 칭의는 단지 개개인의 차원에서만 일어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받는 출발점이 되고(로마서 9-11장), 공동체의 일치와 협동, 섬김의 뿌리가 된다. 즉 하나님의 유일한 은사인 영생에 참여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서 은사의 분량에 따라 봉사하고 섬긴다. 더욱이 교회는 그리스도가 이 세상을 통치하시는 수단으로서 악한 정세와 권세와 투쟁하면서 온 우주의 범위로까지 성장, 확대되는 영역이다(골로새서, 에베소서를 보라). 이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화해의 승리는 개인과 교회, 세상과 우주의 영역까지 미친다.

2) 성결 혹은 성화는 단지 죄를 짓지 않는 것, 개인적 완전이나 이 세상과 부정한 것으로부터 분리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믿음 가운데서 역사하는 사랑'은 이웃 사랑 안에서 실현되며, 이웃사랑 안에서 구체화되는 성화의 과정은 사회정의, 사회정화의 차원을 포함할 수 밖에 없게 된다. 웨슬리의 '사회적 성결'의 개념을 참고하라("사회적 성결이 아닌 성결은 없다, 기독교는 사회적 종교이다!").

3) 신유는 기도로써 병이 낫는 하나님의 치유의 역사일 뿐만 아니라, 병들지 않게 하는 하나님의 보존의 역사(役事)도 포함한다. 특히 오늘 날에 질병은 단지 개인적 이유(하나님의 형벌, 귀신들림)에서만 이해될 수 없고, 사회구조적, 생태학적 범주 안에서도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신유는 불가피하게 인간을 병들게 하고 파괴하는 구조적인 병리의 제거, 하나님의 창조질서의 보존(특히 공해, 생태학적 위기, 자연파괴의 방지), 전 피조물의 샬롬(총체적 조화)을 의미할 수 밖에 없다. 이사야의 환상을 보라(온 피조물이 완전한 조화, 평화를 이루는 낙원의 비전).

4) 재림은 단지 멸망할 세상에서 신앙하는 개개인을 건져가기 위한 마지막 구출작전이 아니라, 피조물의 완전한 구원을 실현하기 위한 하나님의 종말론적 행위이다. 그러므로 재림은 개인의 육체적 부활을 통한 완성만이 아니라 역사와 우주의 완성(새 하늘과 새 땅)을 포함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장차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를 수동적으로만 기다릴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이 나라를 선포하고, 이 나라의 도래를 받아들이도록 준비시켜야 한다. 하나님 나라의 도래 앞에서 '회개하라'는 것은 '삶의 방향을 총체적으로 뒤바꾸라'는 것을 의미한다. 종말론적 희망은 인간에게 윤리적 충격을 주고, 윤리적 책임을 묻는다. 그리고 우리는 마지막 심판대에서 믿음의 행위에 따라서 심판을받기 때문에(마 25:31 이하), 재림에 대한 희망은 이 세상 속의 실천적 삶을 쓸데없는 것으로 만들기보다는 오히려 이를 더욱 더 촉진하고, 격려하고, 또 명령한다.

 

[V]

결론적으로 진정한 복음이해와 시대적 사명의 토대 위에서 성청운동이 지향해야 할 기본방향을 개괄적으로 제안하기로 하겠다. 이것은 다분히 원론적인 제안일 수 밖에 없다.

1) 첫째는 회개운동을 전개하는 일이다. 과거의 교회가 저질러 왔거나 방관, 방조, 협력해 왔던 모든 죄를 하나님과 세상 앞에서 회개, 자성하는 진지한 몸부림이 있어야 한다. 회개는 자기갱신, 교회갱신, 세상갱신의 출발점이다. 그리고 회개는 자신은 마치 의인(義人)인 양 자처하고 남만을 무조건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우리 전체를 대변함으로써 연대성과 대리성을 띄는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회개는 일회적인 요식행위나 시위행위로 일어날 것이 아니라, 인식과 삶의 양식 전체의 역전(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실천적 삶에로의 전향)이 온전히 이루어질 수 있도록 지속적이고 자기검증적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회개운동은 기도와 실천의 결합 속에서 항상 일어나야 한다.

2) 둘째는 올바른 성서적 복음이해를 확립하고, 이를 토대로 올바른 선교의 목적과 전략을 개발하는 일이다. 이를 위해 공동적인 성서연구, 토론 등이 활성화되어야 하고, 이를 통하여 지속적인 연구프로그램, 교재발굴 등이 이루어져야 한다. 특히 청년의 지적인 성숙도, 삶의 상황, 실천의 한계와 효율성 등을 고려하는 종합적인 성서공부방식이 적극 개발되어야 한다.

3) 셋째는 총체적 선교전략을 수립, 실천하는 일이다. 전통적 선교방식과 마찰하지 않는 가운데서, 그와 함께 그동안 배제되어 왔던 포괄적인 선교영역을 확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개인심령의 구원, 정치민주화, 경제의 사회정의화, 사회-문화적 인간화, 토착화, 자연환경보전과 반전, 반핵, 통일운동 등). 특히 청년의 특성에 맞는 선교전략을 수립, 실행하도록 연대적, 장기계획적, 효율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결론을 맺고자 한다. 한국교회, 그리고 성결교회의 미래는 청년 여러분의 어깨에 달려 있다. 목회자의 역량 만큼 교회가 성숙하고 발전한다고 흔히 말하지만, 거꾸로 목회자도 평신도의 역량 안에서 운신(運身)할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미래 교회의 주역인 청년 여러분의 시야와 역량 만큼 교회의 시야와 역량도 결정될 것이다. 여러분의 진지한 각성과 결단, 뜨거운 분발을 촉구해 마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