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성결운동을 쇠퇴시켰는가?  


이신건

 

성결교회역사연구소가 발간한 세 번째 논문집 "성결교회와 신학"의 목차 중에서 특별히 내 시야에 크게 들어오는 것은 "왜 성결운동이 죽었는가?"라는 것이다. 이 글은 나사렛 교단의 대표적인 신학자 리차드 테일러(Richard Taylor)가 God's Revivalist(1999년 3월호)에 게재한 글이다. 그는 미국에서 성결운동이 소멸, 쇠퇴하게 된 원인을 8가지로 말하고 있다.  

 

                1. 우리는 존경받기 원한다.

                2. 우리는 복음주의의 주류에 뛰어들었다.

                3. 우리는 젊은 세대에게 확신을 주는 데 실패했다.

                4. 우리는 성결을 핵심문제로 삼기를 중단했다.

                5. 우리는 평신도를 잃었다.

                6. 우리는 과거의 폐해에 대해 과잉반응했다.

                7. 우리는 교회성장의 사고를 신학적인 고려 없이 적용했다.

                8. 우리는 그 싸움의 진로가 달라진 것을 알지 못했다.  

               

그리 길지 않는 이 글에서 테일러는 위의 주장을 비교적 상세하게 뒷받침하는 사례들을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1, 2, 3, 5, 6 항목에 대해서는 자세한 설명을 덧붙이지 않고 있어서, 우리가 그 원인과 배경을 짐작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지은이는 성결운동이 무력하게 만든 가장 큰 원인(세력)들을 다음과 같이 더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1. 온전한 구원의 경험을 얻는 것은 겸손과 희생이 따른다. 하지만 겨우 몇 사람만 그 값을 기꺼이 치르려고 할뿐이다. 성결을 설교하는 것은 긴장과 스트레스를 드러내고, 그래서 목사도 그런 메시지를 쉽게 포기한다.             

2. 성결운동이 소멸하게 된 또 다른 이유는 그 운동이 지나치게 강조한 것에 대한 필연적인 반응이다. (1) 지나치게 외적인 것(옷, 악습)을 강조한 것에 대한 반발, (2) 빈약한 주석 수준, (3) 지나치게 급진적인 기준을 요구한 것(예를 들면, 어떤 집단에서 섹스는 오직 출산을 위해서만 허용되었다), (4) 진부한 용어들의 사용.

3. 성결에 대한 추구가 심리적인 상담에 의해 대치됨으로써 성결의 교리와 설교는 서서히 관심을 잃었다.   

4. 성결에 대한 설교는 급속한 교회성장을 이끌어내지 못했기 때문에 중단되었다.

5. 성결서적을 읽는 것을 기피하였다.             

6. 신학대학의 선생들에게도 잘못이 있다. 젊은 사상가들이 서서히 일탈하고 있다.

7. 와인쿱(M. Wynkoop) 의 책 "The Theology of Love"이 성결파 집단을 혼란으로 몰아넣었다. 많은 설교자들이 유전죄를 거부하고 제2의 은총의 역사를 무디게 만든 이 뛰어난 여성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결론에서 지은이는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라고 묻는다. 만일 성결운동이 정말 죽었다면, 우리의 비문은 이렇게 쓰여질 것이다. "당신, 어리석은 이방인(웨슬리안)이여! 누가 당신을 미혹했는가? 지은이는 부활의 소망, 아니 성결의 진리를 촉진하도록 도우시는 하나님을 믿기에 이런 비문을 즐거워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지은이의 예리한 통찰은 새 천년과 선교역사 100년을 앞두고 새롭게 재출발하려는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던져준다. 아니 먼 미국에서 던진 지은이의 도발적 질문은 우리에게 큰 공명을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즉 지은이의 질문은 "한국의 성결운동은 죽었는가?"라는 질문을 불러일으키기에 족하다. 미국 성결운동의 역사를 타산지석의 교훈으로 삼기 위해서 지은이의 질문을 우리의 상황에 옮겨볼 필요가 있다.              

한국성결교회의 조직은 여전히 건재하다. 아니, 비록 최근에는 교회 성장률이 조금 둔화하였지만(이것은 개신교의 전반적 현상이기도 하다), 그리 우려할 만한 현상은 아니다. 모든 종교현상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나듯이, 초기 교회의 종교적 열정 혹은 카리스마적인 열기는 제도와 교리의 형성을 통하여 어느 정도 그 열기를 잃게 마련이다. 비록 활기찬 운동이 제도로 변하고 생생한 경험이 차가운 교리로 고정되더라도, 운동의 잠재력이 완전히 소멸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지은이가 우려한 현상과 유사한 것이 우리에게도 분명하게, 점차로 명확하게 나타나고 있다. 지은이가 열거한 8가지 항목을 우리의 현실과 대비해 보기로 하자.              

1. 성결운동을 하는 사람들, 성결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이를 통해서 존경과 이익을 추구하려는 현상을 보인다. 성결을 강조하는 사람은 좁은 길을 가는 사람이기에 고난과 희생, 양보와 절제의 상징이 되어야 하건만, 성결 혹은 성화를 말하는 사람은 스스로를 존경받을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거나, 또 실제로 그럴 만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순수하고 지고한 성결의 가치가 매우 정치적이고 불순한 의도에 의해 흐려졌다.              

2. "우리는 복음주의의의 주류에 뛰어들었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분명하지 않다. 짐작컨대, 성결운동이 복음주의의 주류로 뛰어들면서 초기의 순수성을 상당히 상실하고, 복음주의의 매우 불투명한 노선에서 우왕좌왕하거나 변화하는 현실과 잘 타협하였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다. 한국성결교회는 복음주의 운동의 주류에 뛰어들었는가?

한국성결교회는 스스로를 복음주의적 교회로서 자부해 왔고, 또 복음주의적인 교단과 폭넓은 유대를 형성해 왔다. 하지만 우리가 복음주의의 주류라고 말하기는 아직 이른 것 같다. 분명한 것은 우리 성결교회도 초기의 특징을 상당히 상실하였으며, 다른 교회와의 차별성을 분명히 드러내지 못한다는 점이다. 교리적으로 말하면, 성결, 즉 성령세례의 교리는 순복음(초기에 우리가 즐겨 사용하던 용어) 교회에 넘겨주었고, 신유의 체험은 침례교회(김기동) 등에 넘겨주었으며, 재림 신앙은 다미 선교회(이장림)와 같은 집단에게 넘겨주었다. "사중복음"이라고 하는 것도 개신교회가 일반적으로 믿고 있는 교리를 추상적으로 축약해 놓은 것 같은 인상을 풍길 뿐, 다른 교파가 이를 성결교회의 신학 특징으로 분명히 인지하지 못한다. 제도적으로 말하면, 성결교회의 체제는 감리교적 특징(지역총회), 장로교의 특징(당회), 회중교회적 특징을 얼버무려 놓은 것 같다. 안수집사와 유아세례의 도입은 성결교회의 제도적 특징을 더욱 흐려놓았다.    

3. 우리도 젊은 세대에게 확신을 주는 데 실패했다. 젊은 목회자일수록 자신이 성결교회 목회자임을 숨기거나 심지어는 부끄럽게 생각하는 경향이 더 많아졌다. 심지어 중진 목회자들 중에서도 "자신이 장로교회의 간판으로 목회를 하였다면 교회를 더 크게 성장시켰을 것이라"는 말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 성장 컴플렉스가 성결의 자부심을 눌러버린 셈이다. 젊은 목회자일수록 성결의 체험은 고사하고 성결에 대한 분명한 정의, 확신을 찾아보기 어렵다.              

4. 우리도 성결을 설교와 생활, 교리의 핵심문제로 삼기를 중단한 지 오래다. 나는 아주 어릴 적부터 성결교회를 다녔지만, 성결에 대한 진지한 고민, 그에 관한 열렬한 설교와 체계적인 신학을 거의 들어보지 못했다. 물론 요즈음에는 지나칠(?) 정도로 성결만을 강조하는 목회자와 신학자도 더러 있다. 그리고 해마다 교단이 내거는 신년 표어나 교육국에서 발간하는 주일학교의 교재를 보면, 식상할 정도로 성결이라는 말을 많이 쓰고 있다. 지금은 "성결"이라는 이름을 내건 단체(연구소, 연구회, 선교회 등)도 갑자기 많이 생겨났다. 하지만 현장에서 느끼는 체감지수로 말하면, 우리는 이미 성결을 강조하는 것을 중단한 것이 아니라 아예 포기하지 않았나 생각될 만큼 성결운동 혹은 성결신학 운동은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5. "평신도를 잃었다"는 지은이 진의를 가리기는 어렵다. 하지만 우리의 경우, 청년과 어린이 평신도의 숫자는 갈수록 줄어든다. 사정이 이런 판에, 누가 어렵고 좁은 길을 가려고 하겠으며, 또 그 길을 강요할 수 있겠는가? 성결은 세속사회에서 더 이상 매력 있는 단어도 아니며, 성결의 길은 감당하기 쉬운 십자가가 아니다. 목회자도 그런 모범을 보이기가 쉽지 않거늘, 어찌 평신도들에게 그 길을 강요할 수 있겠는가? 더욱이 성결의 분명한 표지를 식별하기가 어려워졌고, 성결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교회성장의 걸림돌과 교회분열, 갈등의 씨앗이 되기 십상이다.              

6. "과거의 폐해에 대해 과잉반응했다"는 지은이의 의도도 파악하기 쉽지 않다. 단지 우리는 성결 추구로 인한 지나친 긴장과 외식주의, 심리적-교회정치적 부작용에 대한 과잉반응으로 스스로 성결을 기피하지 않았는지 반문해 볼 일이다.              

7. "교회성장의 사고를 신학적인 고려 없이 적용했다"는 지은이의 지적은 우리에게도 정확히 들어맞는다. 교회성장, 아니 성공의 신화를 고려 없이 추구하다가 우리는 성결, 즉 온전한 인격, 온전한 공동체, 온전한 삶의 가치를 헌신짝처럼 내버렸다. 오직 소수만이 외로운 길을 걷고 있을 뿐이다.              

8. "우리는 그 싸움의 진로가 달라진 것을 알지 못했다"는 지은이의 진의는 대충 알 것 같다. 성결을 위한 내면의 싸움, 사회적 성결을 이루려는 싸움이 교회성장과 고독한 성결의 싸움, 힘든 길과 쉬운 길의 싸움, 보수주의와 현대주의의 싸움, 아니 이름은 같이 하지만 이해를 달리하는 정치세력들의 싸움으로 변질된 것도 모르고, 우리는 "성결, 성결"이라는 말만 공허하게 외쳐대고 있지 않는가? 아니, 완전히 다른 길을 가고 있는 것조차 모르고 있지 않는가? 전통도 잃고, 목표도 잃고, 우왕좌왕하고 있지 않는가? 진지하게 고민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