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결인의 정체성

우리의 현주소는 무엇인가?

 

 
이신건

 

 

성결교인들은 자신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성결교인의 자의식 혹은 정체성은 어떻게 나타나는가? 최근에 이르러 성결인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목소리가 부쩍 커졌다. 이것은 성결인의 정체성 상실이라는 위기의식의 발로이자, 그 극복의 몸부림이라고 이해된다. 특히 총회장 이병돈 목사가 주도한 매머드 성결인 대회를 기점으로 성결교인의 정체성에 대한 관심이 더욱 커졌으며, 후임 총회장 강신찬 목사가 전국적으로 확산한 성결인 대회 혹은 성결 세미나는 이런 관심을 가장 분명하게 드러내었다.

필자는 성결 세미나의 강사들이 무슨 모든 내용으로 강의하였을까 궁금히 여겼지만, 일일이 확인할 수는 없었다. 한국성결신문의 간략한 보도로는 그들의 생각을 충분히 가늠할 수 없었다. 사실 그들의 강의록을 입수하여 내용을 정리하거나, 강의를 들은 사람들의 반응과 견해를 정리할 수 있었다면, 이것은 성결인의 자의식을 요약하는 모처럼의 기회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이런 일을 시도하지 않았다. 분명히 강사들과 청중들 간에도 엇갈린 의견들이 나왔을 법한데, 기록과 정리가 없었다는 것은 우리의 역사의식의 빈곤을 의미한다.

하지만 지역별 성결인 대회를 주도한 강신찬 목사의 견해는, 총회장의 위상 때문인지, 여러 기회를 통하여 가장 분명하게 소개되곤 하였다. 그의 성결관은 한국성결신문 제295호(2000. 9. 23)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대담 내용을 그대로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강신찬 총회장의 성결관은 "깨끗하고 정직하게, 그리고 열심히 살아가는 것"으로 요약된다. 서울신대 대성전(성결인의 집) 봉헌 예배에서도 그는 성결인의 특징을 위와 같이 요약적으로 말한 것을 필자는 들었다. 여기서 그는 "사랑하는 것"을 성결의 특징으로 추가하였지만, 분명히 "사랑"은 그의 성결관에서 본질적인 것은 아닌 것 같았다.

그의 성결관이 곧 성결교인의 성결관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은 분명히 아니다. 그는 자신의 성결관의 근거를 그 어디에서도 분명히 제시하지 않았다. 필자의 견해로는 그의 성결관은 그 자신의 확신에 근거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비록 그의 성결관이 성결교인들의 보편적인 성결관을 요약하거나 대변한 것은 아니더라도, 총회장의 견해로서 상징적인 의미는 크다고 본다. 지금까지 성결관에 대한 문헌과 견해가 많이 소개되었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혼란한 점도 없지 않았다. 어떤 이는 웨슬리의 성결관을, 어떤 이는 미국 성결운동가들의 성결관을, 어떤 이는 우리 선배들의 성결관을 더 강하게 부각하곤 하였으며, 어떤 이는 우리의 전통과 무관하게 성서(이사야의 성결 체험이나 신약성서의 성결 이해)를 주요 전거로 삼아 성결론을 주창하곤 하였다. 또 많은 이들이 자신의 체험과 확신에 근거한 내용을 강조하기도 한다. 하지만 서로 다른 성서 인용과 전통 호소, 주관적 체험과 확신은 성결관에 대한 진지한 토론과 합의에 도달하지 못하고, 오히려 성결인의 정체성 부재에 혼란까지 더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런 상황에서 성결론을 분명히 요약해 준 강신찬 목사의 공로는 결코 작지 않다. "정직함"은 분명히 성결인의 특징이어야 한다. 분명히 우리들은 점점 더 부정직해지고 있다. 예수는 "예와 아니오"를 분명히 말하라고 가르쳤건만, 많은 사람들이 정확한 말을 기피하고 있다. 남의 눈치를 보고 남의 비난을 사지 않기 위해 모호한 말(기도해 보자, 노력해 보자)을 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고 치자. 하지만 안타깝게도 불리한 현장을 피하거나 남을 괴롭히기 위해, 혹은 정략적으로 거짓말하는 성결교회 지도자들을 나는 수많이 보아왔다. 거짓말이 판을 치는 이 세상에서 정말 성결교인이라도 최소한 고의적인 거짓말을 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필자의 솔직한 바람이다. "깨끗함"은 물론 환경적인 함의도 가지고 있겠고, 불의와 부패에 대한 거부의 뜻도 지니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직함과 깨끗함은 서로 뗄 수 없이 긴밀하게 얽혀 있는 것이다. 부정직함이야말로 불의와 부패의 중요한 원인이요, 그 현상과 결과이지 않겠는가?

그러나 성결을 "정직함과 깨끗함, 부지런함"으로 요약하는 것은 성결을 너무 도덕적으로만 이해할 위험을 가질 수 있다. 성결의 초월적 차원(하나님의 임재, 성령 체험)이나 객관적 차원(그리스도의 사역), 사회적 차원(사회적 성결)이나 은사적 차원이 전혀 언급되지 않은 것은 어떤 이유인가? 이미 이를 전제하고 있다는 뜻인가?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보기에는 내용이 너무나 간결하다. 혹시 위와 같은 성결의 다양한 차원들이 이미 타 교회의 특징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우리 교회만이 독특하게 주창할 수 있는 분명한 정체성을 새삼 붙들고자 한 것인가? 비록 그렇게 선의로 해석한다고 하더라도, 강 총회장의 성결관은 지나친 도덕적인 협소화의 위험을 안고 있다. 한국성결신문(296호 2000. 9. 30)의 사설도 이런 면을 지적하고 있다.     

  

새 총회장이 나라 안팎이 급격하게 변화하고 어지러워지는 현실 가운데서라도 교단의 발전을 모색할 수 있는 비전을 제시하리라 믿으며 그 비전이 성결인 모두의 공감을 얻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몇 가지를 제안하고자 한다.

첫째로 성결인의 정체성 확립을 주도하여야 한다. 우리나라의 교회들이 그 조직의 형태는 대부분 장로교회적 모습을 모방함으로 인해서 그 교단적 특성이 사라져버렸다. 외형적 특성의 소멸현상은 신앙고백의 특성까지도 사라지게 만들었다. 성결교회의 정체성을 성결이라고 규정하면서도 그것을 윤리적 차원의 도덕적 결백 정도로 소극적으로 이해하려는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성결은 하나님의 의지이고 성결해진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지를 이루어가는 것이라고 하는 성결교회의 전통이 더 이상 흐려져서는 안된다는 것을 새 총회장은 직시해야 할 것이다.

 

성결을 소극적으로 이해하게 된 현상은 비단 여기에서 처음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원래 웨슬리에게서 성결의 취지는 "그리스도인의 완전(온전)"을 향한 진지한 열망에서 비롯한다. 하지만 필자의 견해로는 완전(온전)이 성결과 동의어로 사용됨으로써, 이미 여기서 완전(온전)의 차원이 축소될 수 있는 위험성을 안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성결운동은 웨슬리의 운동을 더욱 더 완전(온전)하게 실현하려고 애쓰는 가운데서 중생과 성결에다가 신유와 재림을 추가하였다. 우리는 이를 "사중복음"(Foursquare Gospel)이라고 부르지만, 그 본래적 취지는 완전한 구원(Whole Salvation), 온전한 복음(Full Gospel)에 있다. 이것은 더 완전(온전)한 구원을 향한 적극적인 열망을 담고 있다.

하지만 미국 성결운동의 후반기에 근본주의와 전천년주의, 진화론과 고등비평, 사회복음 등 불길한 운동이 교회 안으로 파급되어 들어오자, 적극적인 열망은 소극적인 방어자세로 뒤바뀌게 되었다. 이리하여 "온전한 복음"이 "순전한 복음(순복음)"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이 용어마저도 한국의 하나님의 성회(일명 순복음 교회)에 넘겨주고(?) 나니, 우리가 붙들 수 있는 용어가 궁색해졌다. 그나마 사중복음이라도 우리의 분명한 신학적, 신앙적 지표가 되어주고 있는 것은 고마운 일이다.

분명히 사중복음은 온전한 구원의 열망을 잘 요약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자꾸 "성결, 성결"이라고만 외치는 이유는 무엇인가? 신유와 재림은 어찌하고 자꾸 "성결"만을 외치고, 또 성결도 자꾸 개인-윤리적인 차원으로 축소하는가? 도대체 사중복음의 정신을 따라야 하는가, 아니면 성결을 더 따라야 하는가? 사중복음을 외치니 성결이 죽는 것 같고, 성결을 외치니 사중복음이 죽는 것 같지 않은가? 이 둘을 포용하는 개념은 무엇이며, 그 실천적 방안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우리는 이에 관해서도 통일된 견해가 없다. 더욱이 교회 현장에서는 성결보다는 성장을, 사중복음보다는 기복정신을 강조하는 분위기가 더 강하다.

상황이 이러하다 보니, 강신찬 목사가 제안한 대로 성결의 도덕적 차원만이라도 우리의 특징으로 삼는 것은 그나마 다행한 일은 아닐까? 아무런 정체성도 없이 시류에 휩쓸려 가느니, 이만한 것이라도 견고히 붙들고 나가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이런 옹색한 결론은 우리의 입지를 자꾸 좁혀나가는 것만 같아서, 참으로 서글프다. 주여, 도우소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 지를 잘 모르겠나이다. 우리의 무능을 도우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