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실현을 위한 교회의 실천과제

(1990년 11월 16일, 서울신대 신학과 학술심포지움)
 

이신건

 

들어가는 말

본인이 이 자리를 빌어 특별히 제기하고 싶은 문제는 "평화실현에 이바지하기 위하여 교회가 무엇보다 먼저 깨닫고 해결해야 할 과제가 무엇인가"하는 것이다. 여기서 본인이 제기하는 문제에 대한 완전한 처방전을 내리는 것은 본인의 임무는 아니다. 다만 여러분과 함께 심사숙고해 보고 싶은 내용을 함께 나누면서 각자가 해야 할 일을 찾아보자는 것이 본인의 뜻이다. 그리고 지금 본인이 제기하는 문제는 매우 낡고도 지겨워진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처럼 오래된 문제가 그처럼 오래 해결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매우 시급한 문제가 아닐 수 없고, 또 이 문제는 평화실현을 위해 기여해야 할 교회의 임무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교회 자체의 존립을 위해서도 대단히 중요한 근본적인 질문이기 때문에, 아무리 낡은 문제이라고 하더라도 결코 지나간 문제만은 아니다. 새 것은 낡은 것의 온전한 드러남이기도 하고, 또 낡은 것을 풀지 않는 한 우리는 한 발자국도 나아가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데 본인이 본 논지에 들어가기 전에 이 시대의 평화의 물결을 보면서 느끼는 몇 가지의 확신을 피력하고 싶다.

1)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평화를 주신다는 확신이다. 물론 사람들은 오늘 날에 데탕트(냉전과 평화)의 물결이 흘러온 여러 가지의 복합적 근원적 원인을 설명하고서, 이를 역사의 불가피한 과정으로 해석할지 모른다. 그리스도인인 본인은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배후에 있음을 의심하지 않는다.

2) 교회가 아니라 이 세상이 하나님의 평화의 활동의 장이라는 확신이다. 물론 교회도 세상 안에 있고 세상에 속해 있다. 그러나 확실히 세상은 교회보다 더 넓고, 하나님의 나라도 교회보다 더 크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는 포괄적으로 이 세계 안으로 돌입해 들어 온다. 오늘 날에 전개되는 평화는 교회를 통해서 들어오기보다는 오히려 세상을 통해서 교회의 문으로 밀려 넘쳐 들어오는 하나님의 나라의 물결인 것 같다.

3) 본인이 역설적으로, 아니 감탄하며 받아 들이는 또 하나의 사실은 "칼을 쳐서 보습으로, 창을 쳐서 낫으로"(사 2:4) 만들 것이라는 이사야의 예언이 이른바 기독교적 국가라는 미국에서가 아니라 전투적인 무신론 국가라고 일컬어지는 소련에서 이루어지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본인의 확신으로는,하나님은 한 때에 자본주의라는 물신(物神)을 숭배하던 타락한 서구사회를 심판하시기 위해 도구로 사용하신 바로 그 공산주의를 변화시켜서 이제는 화를 실현하는 도구로 사용하시는 것 같다.

그러므로 교회는 눈을 크게 떠서 이 세계 안에서 이 세계를 위해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나라의 현실을 보고, 이를 선구적으로 선포할 뿐만 아니라 이에 결연히 참여해야 한다. 물론 교회가 지금까지 얼마나 평화실현에 기여했고 또 앞으로 기여할 것인가를 생각할 때, 본인은 회의적이다. 왜냐하면 교회는 주로 세상의 물결에 떠밀려 거기에 적응하는 데 급급해 왔지, 그것을 거슬러 올라가거나 그것을 이끌어 가며 복음을 선포하고 실천해 왔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 원인은 교회가 세계의 인구에서 아직도 소수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설명될 수 있겠으나, 그보다는 교회가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 이후부터 지배체제에 순응하는 버릇을 길들여 왔다는 점에서 더 확실히 설명될 수 있으리라고 본다.

그러므로 교회가 평화실현에 조금이라고 기여하기 위해서는, 또 기여하려고 한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회개해야 한다. 교회는 평화실현에 소홀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지나간 수 백년 동안 세상을 온통 분쟁과 불화로 가득 채웠다"(바르트). 그러므로 교회는 세상보다 먼저 하나님 앞과 고통당한 이웃 앞에서 공개적으로 회개해야 한다. 그리고 회개는 단지 말로써만이 아니라 행동, 특히 교회갱신으로써 나타나야 한다. 그래서 본인은 교회가 평화 실현에 진정으로 이바지하려고 한다면, 그 전에 먼저 자신의 신뢰성을 회복해야 한다고 확신한다. 그래서 본인은 교회가 이를 위해 먼저 해결해야 할 선결과제가 무엇인지를 지적하고자 한다. 특히 본인은 오늘 날에 교회가 헤어나기 힘들도록 걸려 들어가 있는 세 가지의 흉칙한 분리와 불화의 덫을 지적한 후, 미약하나마 이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代案)을 제시하고자 한다.

1. 이원론적 심성과 신학의 극복

평화(샬롬)는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에서도 구원을 가장 포괄적으로 표현하는 개념으로서 기쁨, 화해, 조화, 정의, 진리 등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리고 성서가 말하는 평화는 분열, 구분과는 대립되는 총체적 정체성을 나타내며, 개인 영혼의 평화만이 아니라 이웃과 만물에까지 미치는 평화이다. 물론 진정한 평화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완전히 임하는 그 때에 가능하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에 온갖 종류의 갈등과 대립이 현실적으로 항상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들어가야 한다. 갈등을 인정하지 않고 이를 호도하거나 은폐하는 곳에서 오히려 더 큰 불화가 생겨난 경우가 허다하다. 그렇기에 우리는 완전한 일치가 이루어지기까지 갈등요인들을 최소화하고 또 서로 건설적으로 평화롭게 함께 일하도록 노력하는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바로 이점에서 대개의 그리스도인들의 심성(心性)은 평화실현에 매우 부적합하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특히 대부분의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심성에는 아직까지도 현실을 시간-영원, 영-육, 차안-피안, 성-속, 신적인 것-세속적인 것으로 이원론적으로 분리하는 버릇이 깊이 뿌리박혀 있다. 서구사회에서는 복음의 헬라화가, 그리고 특히 한국사회에서는 무속화(샤머니즘화)가 크게 이에 영향을 끼쳤으리라고 본다. 마틴 부버(M. Buber)가 서구 기독교의 위기의 뿌리를 바로 이 점에서 찾았다면, 본인은 한국 기독교의 위기의 뿌리도 바로 근본적으로는 여기에 있다고 확신한다.

그러나 이런 심성은 현대인에게도 맞지 않거니와, 더욱이 성서의 심성과 영성(靈性)에도 맞지 않는다. 하나님 예배와 세상 속의 인간 봉사는 그리스도인이 선택해서 신을 수 있는 '두 켤레의 신발'(Sartory)이 아니다. 하나님 예배는 동시에 세상 속의 인간 봉사이다. 하나님 예배는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세상 속에서 봉사하도록 무장시킨다. 신앙(경건)은 오직 일상적 삶에서 확증될 때에만 진정한 신앙일 수가 있다. 일상생활 속에서 거룩한 삶을 추구하는 것도 온 몸으로 하나님에게 드리는 예배이고(롬 12:1∼2), 올바른 정치도 예배이다(바르트: 정치적 예배).

그렇기 때문에 구원이 단지 정치적, 사회적 해방과 단순히 동일시 되어도 안 되지만, 이것들도 구원의 현실 안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는 부인해서도 안 된다. 바로 이런 점에서, 예를 들어, '로잔 언약'(복음주의자들의 신학선언)이 그리스도인들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면서도, 여전히 "인간과의 화해가 하나님과의 화해가 아니며, 사회적 행동이 복음화가 아니며, 정치적 해방이 구원이 아니다."고 말하면서, 복음화(개인구원)의 우선 순위를 내세우는 입장도 치명적인 이원론의 덫에서 완전히 빠져 나오지 못한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성서에서 해방과 구원은 엄격히 분리되어 있지 않으며, 예수에게서도 구원은 총체적 해방(눅 4:18∼19)이며, 그의 구원 활동도 선포와 치유, 말씀과 행동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앞당겨 왔음을 상기할 때, 위와 같은 입장은 아직도 이원론적인 도식 안에서 사고한 것이다.

구원은 분명히 정치적, 사회적 해방보다 더 큰 것이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것도 포함하고 있다. 이것도 한 분 하나님의 지배 아래 있는 세계질서들 중의 한 부분이기 때문에, 구원의 현실 안에 포함되어 있다. 만약 사회적 해방도 구원이 아니라면, 어떤 구원만이 구원인가? 영혼만의 구원을 말하는가? 이 세계가 없는 개인의 구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구원일 뿐만 아니라 환상적, 비현실적이기 조차하다. 우리는 이런 구원을 영-육, 차안-피안의 도밖으로는 이해하기 어렵다. 종말론적으로 구원받아야 할 것은 인간의 영혼만이 아니라 바로 인간 그 자체, 세계 그 자체이다. 더욱이 이 세계의 해방이 개인구원에 비해 이차적이라면, 이 세계의 해방은 등한시되어도 좋은, 아니 실제로 등한시되는 그리스도인의 미덕사항으로 격하(格下)될 것이다. 만약 그것도 구원이 아니라면, 우리가 부질없이 그것 때문에 신경쓸 필요가 없다는 교묘한 논리적 장치만이 크게 작동할 것임에 틀림없다. 로잔언약은 사회적 참여를 강조하면서도, 그 이원론적인 도식을 통하여 인간봉사의 열정에 김을 빼는 이중성을 드러내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구원활동에 선후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 그리스도인은 주어진 기회에 따라, 주어진 역량에 따라, 악과 더불어 전면전을 벌이는 그리스도의 군사이다.

오늘 날에 특히 보수적인 그리스도인들의 심성에 깊숙히 뿌리내리고 있는 집요한, 아니 거의 정신분열증과 같은 이원론적인 도식의 극복이 먼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이들을 이 땅에서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자들'(마 5:9)로 만들 수 없으리라라고 생각한다.

2. 교회분열상의 극복

이 세계 안에서, 이 세계를 위하여 화해와 평화의 증인이 되려는 교회는 먼저 자신이 화해와 평화의 선구자, 아니 그 표징(表徵)임을 보여 주어야 한다. 그러나 바로 이 점에서도 교회는 세상을 바라보며 고개를 들 낯이 없다. 왜냐하면 세상은 교회를 향하여 "먼저 너희들부터 화해하라"고 손가락질할 게 뻔하기 때문이다. 본인은 남북 통일을 간절히 바라지만, 남한의 교회상을 그대로 두고 통일이 되는 일은 차마 없어야 되겠다고 생각한다. 만약 그렇게 된다고 가정하면, 남한의 수많은 교파들과 이단 종파들이 합세하여 북한 땅마저도 남한 땅처럼 온갖 형태로 찢어 놓을 것임에 틀림없다. 아니 이젠 중국 땅의 교포들, 아니 중국인들까지도 자기 교파의 간판 아래 분열시켜 놓을 게 뻔하다.

한국교회의 분열의 원인과 그 분열상을 여기서 일일이 거론하고 싶지 않다. 전체적으로 본다면, 교권투쟁과 이권다툼을 위해 갈라진 경우가 많았고, 평신도들 때문이 아니라 그들을 볼모로 잡은 권력지향적인 교권주의자들 때문이었다. 그리고 표면상으로는 신학적 차이가 분열의 원인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교회분열의 결정적 동기는 신학의 차이가 아니라 그것을 징계문제로까지 몰고가서 이득을 보려는 교권주의자들이 이른바 '도그마'(Dogma)라는 절대적인 칼로써 양심적인 (혹은 양심적이길 원하는) 소수인들을 내친 데 있다. 종교개혁 당시의 신-구교의 분열도 그렇고, 한국교회의 최초의 교회분열(기장-예장의 분열)도 그렇다.

물론 신학적 차이의 인정은 '신학적 상대주의'라는 위기를 낳지만, 특정한 시대에 특정한 인물에 의해 형성되고 고착되어 주입된 특정한 신학이론들을 절대화하여, 신학적 차이 그 자체를 무조건 정죄하는 행위는 '우상숭배'라는 더 큰 위험을 낳는다. 신학적 차이는 신학의 발전과 논쟁 속에서 평화적으로 걸러지거나 어느 정도 해소될 수 있지만, 신학적 도그마주의는 교회 분열이나 정치적 패배를 통해서만 (그것도 대부분 폭력적으로) 해결되기 때문에, 교회일치에 더 해롭다. 비록 교회의 기구적 통합은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하더라도, 걸레조각처럼 갈기갈기 찢겨진 한국 교회가 공동적 과제를 위해 연합하여 일치된 증인으로 나서게 되는 일이 없이, 어떻게 이 세계를 위해 효율적으로, 신빙성 있게 평화의 증인, 평화를 만드는 자가 될 수 있겠는가? 이런 점에서 볼 때, 주님의 한 몸이 찢겨져 나가는 '불가능한 가능성'(K. 바르트)은 교회의 역설(파라독스)이다. 이러한 역설의 해결이 없는 교회가 하나님을 진정으로 섬긴다거나 세상 평화의 증인이 되겠다고 자임하는 것은, 엄밀히 말하자면, 역설이고 위선일 수 밖에 없다.


3. 신앙와 실천의 분리의 극복

그리스도인들의 실존과 교회의 활동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또 하나의 이원론적 근거를 들라면, 그것은 바로 신앙과 실천의 분리이다. 신앙과 실천, 예배와 삶의 분리는 종종 비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들을 위선자, 부정직한 자로 보게 만드는 한 요인이기도 한데, 여하튼 대개의 그리스도인들은 실천을 위해 훈련되어 있지 못하며, 실천을 위해 준비되어 있지 않다. 이 점은 앞에서 지적한 그리스도인들의 이원론적인 심성 탓이기도 하겠지만, 종교개혁 이후로 교회가 '신앙주의'(Fideism), 아니 '신앙제일주의'로 지나치게 치달은 탓이 더 크다고 보여진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오직 믿음 만으로'(Sola fide) 의롭게 된다고 하는 이 복음은 율법주의로부터의 해방만이 아니라 인간 영혼과 인격의 가치, 양심과 신앙의 자유를 가져다 주었지만, 여기서도 그리스도인은 "신앙이냐 행함이냐?"라는 이원론의 덫에 걸려 들었다. "신앙이냐 행함이냐?"라는 양자 택일만이 문제가 아니라, 행함을 단순히 신앙의 부산물로 과소평가한 것도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 결과로 인간의 성화(聖化),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인간의 참여, 제자의 사명이 소홀히 여겨졌고, 신앙의 위로(慰勞)에만 매어달리는 '게으른 정적인 그리스도교'(L. 라가츠)가 생겨났다. 신앙과 행함은 한 그리스도인의 실존의 내면과 외면이고,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필수적으로 동반하는 관계를 이룬다.

오직 신앙주의는 종교개혁 당시에도 많은 혼란을 일으켰기 때문에, 머지 않아 "오직 믿음은 결코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sola fides nunquam sola!)고 천명되기에 이르렀던 것을 우리는 상기할 필요가 있다(협정신조). 신앙이 구원의 사실적 근거라면, 행위는 구원의 인식적 근거이다(H.G. 칉만). 그러므로 만약 교회가 오직 믿음 때문에 서고 넘어진다면(루터), 믿음은 행위 때문에 서고 넘어진다고 할 수 있다. 행함이 없는 신앙은 죽은 신앙이고(야고보), 행함이 약한 신앙은 결국 병든 신앙이며, 그래서 죽을 수 있는 신앙이라는 판단을 받아야 한다. 교회가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견디기 위해서는 '주여, 주여'하는 것으로는 안 되며, '주를 따르자'는 각오를 가져야 한다. 그렇기 위해서 교회는 바로 자신의 안팎에서부터 평화실현을 위해 당장 착수할 일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고, 이를 실천에 옮겨야 한다. 평화는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그리스도인들도 화평케 하는 임무를 맡은 한, 그리스도인들의 임무이기도 하다. 기복적(祈福的), 주술적(呪術的) 신앙이 아니라 실천적, 모범적 신앙만이 복음을 효율적으로 증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신앙이 실천적인 신앙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시급히 교회의 생활 구조가 갱신되어야 한다. 물론 교회생활의 심장부는 예배이다. 그러나 심장이 신체의 각 부분에 활력을 제공해 주는 것처럼, 예배도 이웃 인간을 온전히 섬기기 위해 동기와 동력을 주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오늘 날에 한국교회의 활동구조는 대부분 예배구조로만 집중화되어 있다. 큰 교회일수록 교인들 간의 정적인 사귐과 나눔은 두 말할 것도 없고 교회 안팎의 문제를 함께 터놓고 이야기하고 서로 조언하고 실천하는 기회는 희박하다. 교회의 예산과 시설, 활동이 지나치게 예배만을 위해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신앙과 행위, 예배와 삶의 고리를 공동적으로 맺는 절차는 완전히 탈락되어 있다시피 하다.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교회의 생활구조가 다원화(多元化), 입체화(立體化)되어야 하고, 교회의 결정과정이 민주적이고 공의회적(公議會的)인 구조로 갱신되어야 하며, 예배가 일상 생활과 연결될 뿐만 아니라 예배 외에도 실천지향적 모임이 활성화되어야 한다. 목회자는 '대화적 설교'를 자주 행하고, 교인들은 성찬과 애찬의 기회를 자주 가져야 하며, 교회는 지역사회의 문제를 위해 자신을 개방하여야 한다. 여하튼 어떠한 방식으로든지 간에, 신앙-행위, 예배-생활의 이원론적인 구조를 극복하려는 진지한 노력이 교회로부터 먼저 일어나지 않는다면, 교회가 평화실현을 위해 효율적으로 일하리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고 본다.

나가는 말

지금까지 지적한 그리스도인의 이원론적 심성 외에도 특히 지적할 만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이데올로기적 흑백논리, 교조적 반공주의일 것이다. 이것도 남북 통일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남한 사회의 갈등해결을 위해서도 극복해야 할 심각한 문제이지만, 시간적으로 제약되어 있기 때문에 더 이상 깊이 취급할 수 없다.

여하튼 앞에서 지적한 문제는 논리적, 시간적 선결과제 못지 않게 도덕적 선결과제이다. 그렇다고 이 선결과제가 그리스도인들의 평화사역의 발목을 묶어 놓을 순 없다. 그렇지만 이 문제의 진지한 해결노력이 없는 교회의 평화 사역은 신학적, 도덕적 정당성을 얻기 어려울 것이다. 이 모든 일에 우리 모두는 더 한층 매진해야 한다.